7. 쌤, 엄마한테 꼭 말씀해주세요!



[질문]


저는 3~4년간 우울증을 앓아왔고, 지금은 우울증으로 인해 학업에 실패하고, 대학진학도 포기하고, 사람에 대한 기피현상이 심해져서 일반적이 사회생활이 힘들 정도입니다. 사람자체가 싫어 친구들과 연락을 끊은 지도 1달이 넘어가고, 가족들과의 상태는 우울증을 겪으며 급속히 나빠졌고, 저는 지금 가족들, 특히 엄마에 대한 많은 실망과 배신감들로 괴롭습니다.


자살충동을 자주 느끼고, 자살시도는 한번 있었고, 자살에 대한 생각들도 많이 합니다. 삶이 허무하기만 하고, 공허한 마음만 듭니다. 가끔은 세상 속에 있는 제가 투명한 막에 휩싸여 둥둥 떠다닌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인간이 작게 보이고, 저는 그보다 작게 보입니다. 열등감이나 외로움과 같은 갖가지 부정적인 감정들로 힘이 듭니다.


대학 진학을 다시 결심했지만 공부는 잘 되지 않고, 나아갈 방향도 잡지 못하겠습니다. 흥미가 있는 것도 없고, 절 그나마 오래 붙잡아 두는 것은 판타지, 무협 같은 소설이나 만화책 그리고 TV를 보는 것뿐입니다. 그것조차 좋아하는 감정보다는 지루하고, 재미없지만 그저 멍하게 보는 수준입니다. 이것조차 안하면 제가 정말 인간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요. 어느 것도 제게 긍정적인 마음이나 관심은 끌지 못하고, 그래서인지 꿈도 없습니다. 무언가를 시도해보려고 해도, 인간관계나 여러 능력 면에서 저는 너무 작아져서 생각에 그칠 뿐입니다. 갈수록 소심해지고, 신경질적이게 됩니다. 잘해나가고 싶지만, 사람들 말처럼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도움의 손길이 너무도 필요하지만 주위에는 그럴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병원에는 두 달 정도 다녔지만 의사선생님과 만나면 자꾸만 긴장을 하게 되고, 말을 잘 하지 못했었고, 여러 상황들로 상담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병원을 다니고 싶지만 가족 특히 엄마에게서 또다시 같은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 두려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엄마나 가족들은 제가 유별나다고 생각하고, 공부하기 싫어 핑계를 대는 거라 생각합니다. 저를 전혀 이해해 주지 못하고, 그런 가족들과 대화하는 것이 저에게는 상처일 뿐입니다.


지금 병원을 다닌다면 돈 때문에 가족들에게 말해야할 텐데, 아니 적어도 한사람에게는 말해야할 텐데 가족 중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습니다.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지켜질 보장도 없고요. 알바를 해서라도 병원비를 구하고 싶지만, 알바 할 때 부딪힐 사람들을 생각하면 포기하게 됩니다. 도움이 필요하지만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없고, 병원을 다니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주위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나아질 방법이 필요합니다. 가족들에게 알리는 게 가장 좋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갔었지만 부모님에 대한 제 실망만 커졌을 뿐입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가족들에게 알리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선생님.......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울증이란 병에서도, 그리고 제 인생에서도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답변]


1. 그야말로 사면초가시군요. 글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제 인생의 어떤 길목들과 겹쳐지는 바람에 가슴이 자꾸 가라앉는 걸 느꼈습니다. 이 상황에서 어떤 위로의 말이 귀에 들어 오겠습니까만 그래도 곁에 계신다면 등 한 번 따스하게 도닥여 드리고 싶은 마음은 꼭 전하고자 합니다.


2. 지금 상태를 이론이든 임상사례든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그닥 마땅해 보이지 않네요. 스스로 아시는 바대로 깊이 있는 대화/상담치료와 약물치료를 시급히 받으셔야 합니다. 이런 때일수록 판단은 간결하게 하셔야 해요. 이것저것 고려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핵심 하나만 붙잡으세요. 우울증에 사로잡힌 자신의 생명을 구출하는 일밖에 달리 선택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돈 걱정하다가 생명 놓치는 일을 선택하실 것입니까? 아직은 이 땅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 '사람' 속에 의사도 있는 법입니다. 돈 없다면 치료 안 하겠다는 의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3. 용기를 내셔서 직접 연락을 주시면 좋겠군요. 도와드릴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사시는 곳이 어딘지 등 상세한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제 안타까움도 막연할 수밖에 없거든요. 자, 일단 그 힘부터 내 보세요. 홧팅!


[두 번째 질문]


안녕하세요. 답변을 읽기 전까지 많은 망설임 끝에 읽고, 또 이런 글을 쓰기까지 한 10번은 썼다 지웠다....... 반복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글이 안 써지는지.......


저는 돈이 아깝다거나, 돈이 아까워 치료를 받지 않겠다거나 하는 생각을 절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상담하는 일이라고 해도 될까요? 그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짐작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제 상황에는 치료가 필요하다는 걸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 자신이 느끼고도 있고, 그 치료에 응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제 자신도 진지하고 끈기 있게 치료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돈이 없어 걱정하는 게 맞지만 뭐랄까....... 돈 구할 데는 있지만 뭐든 하기 전에 숨이 턱 막힌다는 게 문제이지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알바를 하거나,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거나 가족 중 누구 한사람에게라도 말하여 금전적 지원을 받는 것....... 셋 다 딱 이거다 마음 내켜 할 만한 게 없고, 그나마 알바가 차라리 낫지만....... 이 생각 저 생각 안하려 해도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저는 조그만 거에도 상처받고, 또 그 상처받는 거에도 스트레스 받고, 그 스트레스 받는 것에 또 제 자신에게 실망하고....... 그렇게 진행될 것들이 눈앞을 스치니 깜깜하기만 합니다.


저는 **에 살고 있고, 작년까지는 고2때부터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서울에는 친 언니, 오빠가 있어서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았는데 외지 살다보니 건강도 나빠지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다시 **로 온 것입니다.


직접 연락한다는 것이 전화말씀이신지? 02-***-**** 이리로 하면 되나요? 선생님이 직접 받으시나요? 아니면 간호사 언니들이.......?


오늘 따라 말투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제가 느끼기로 공격적인 것도 같고....... 왜이런지 잘 모르겠지만 혹시 선생님도 그렇게 느끼셔서 기분이 상하시지는 않을지 걱정이네요.


[두 번째 답변]


1. 그렇게 망설이면서도 글을 쓰고, 또 읽으시는 일 자체로 이미 치유의 길에 들어서신 것입니다. 우선 그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격려하시면 내면의 힘이 생길 것입니다. 조금 더 용기를 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를 향해 글을 쓰고, 또 그 상대방의 글을 읽는 일,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어려워해요. 저도 그렇습니다. 많이 망설이고, 또 고치고.......그럽니다. 무슨 일이든 시작할 때 숨 막히고 가슴 조이며 오만 생각 다 하게 되는 거, 웬만한 사람들 다 그래요.


자, 일단 심호흡 한 번 하세요. 그리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세요. 저 많은 사람들이 **님보다 훨씬 강하고 유능하고 행복해 보이겠지만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을 테지요. 중요한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입니다.


물론, 고통은, 당하는 사람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법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예민하고, 힘들고, 숨 막히는 느낌이 들게 되었는지 연유를 잘 생각해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직시함으로써 문제는 해결을 향하여 본격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2. 스스로 공격적이 된 사실을 알아차리신 것도 훌륭해요. 하지만 대뜸 상대방 걱정으로 넘어간 대목이 문제네요. 왜냐하면 상대방도 자신처럼 상처 받지나 않을까, 사실상은 그랬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돈 이야기를 꺼낸 것은 결코 **님이 돈 아끼느라 치료를 안 받으시려 한다거나, 돈 안 내고 어디 치료 받을 데 없나 두리번거린다는 의미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전체 문맥을 살피면 능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님이 스스로 공격적이라고 느끼실 만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신 것은 상대방의 현실적인 배려를 나름대로 공격으로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반응은 약도 되고 독도 됩니다. 약이 되도록 하는 게 우리 공통 목표 맞지요?


그럼, 아시는 바, 그 번호로 전화를 주세요. 제가 드릴 수도 있지만 스스로 전화하시는 것 자체도 하나의 치유행동이며, 성숙한 사회행동이기 때문에 그리 권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면 간호사가 그 즉시 저를 바꿔 줄 겁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그 때 나누기로 하지요. 힘!


2008년 초, 이 소녀와 실제로 만나 밥까지 먹여가며 하는 무료 상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뒤 몇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았지요. 그러나 획기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바로 엄마, 다른 하나는 돈. 바로 이게 우리사회의 좌우 아킬레스건입니다. 그중에서도 우선은 엄마.


사회적, 경제적 자립이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엄마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우주 자체지요. 엄마가 앞장서면 모든 길이 열립니다. 엄마가 가로막으면 모든 길이 닫힙니다. 이 소녀 가슴에는 분명히 이런 소원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제발, 우리 엄마가 제 상황을 꼭 알았으면 해요! 그런데 상황은 뒤집혀 있습니다. 2010년 벽두에 13살짜리 소녀하고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질문]


안녕하세요아직13살인데이런글올려도될지모르겠네요

마음상담실이라고해서올리는건데요

친구들이다들절싫어해요왕따는아니구요그냥대놓고

제가싫다고말하네요그리고엄마도많이아프세요

엄마가혼자일하세요왜냐면부모님이이혼했거든요

저정말마음도아프고힘드네요

친구들은저정말많이싫어하구요저이제중학교올라가는데요

입학식날친구들이절어떻게볼지걱정되네요

방금도많이울었어요엄마아픈것만생각하면진짜눈물나구요

친구들도절싫어하구요어떻해야되죠위로말씀듣고싶네요

정말자기전에안우는날이없습니다힘드네요


[답변]


1. 13살 소녀도 인격이며 생명입니다. 아플 수 있습니다. 위로 받을 권리도 있습니다. 이렇게 온라인으로나마 도움을 청해주셔서 고마워요. 그 용기와 진정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2. 부모의 이혼에 따른 상처, 어머니에 대한 걱정, 그리고 친구들 때문에 느끼는 소외감....... 누군가 감싸주지 않으면 홀로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군요. 우선 무조건의 위로를 전합니다. 다만 섣부른 격려는 일단 보류하지요. 이 상황에서 힘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부추김인지 잘 아는 까닭입니다.


그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 한 가지만 쉽게 말씀드려 볼까 해요. 이렇게 글을 쓰신 것처럼 되풀이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도록 하세요. "나 아파, 나 슬퍼, 나 외로워!"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듣고 스스로 고개를 끄덕여주세요. 아플만하고 슬플만하고 외로울만하다고 스스로 지지해주세요.


아파해선 안 돼, 슬퍼해선 안 돼, 외로워해선 안 돼, 이러지 마세요. 아니, 나 인제 안 아파, 안 슬퍼, 안 외로워, 이러진 더더욱 마세요. 부정하고 외면할수록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은 더 깊어지기 때문이지요. 따뜻하게 자신의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을 안아주고 다독여주세요.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은 상처에 대하여 병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것은 치유를 위해 감응하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표현이죠?^^ 하지만 무슨 뜻으로 드리는 말씀인지 알아차릴 수 있죠?^^ 좋아요! 일단 이렇게만 하더라도 마음의 힘이 조금씩 생긴답니다.


3. 오늘은 요기까지. 다시 한 번 위로의 마음을 전해드려요. 쌤이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럼.......^^


13세 초등학생 소녀가 아픈 엄마를 진심으로 걱정합니다. 그래서 눈물 흘립니다. 자기 자신의 우울증을 의심하면서도 엄마를 살피는 마음이 제 온 영혼을 적셔 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 긴 제 임상 기간 동안 딸이나 아들을 위해 이렇게 간절한 마음을 전해 온 엄마가 전혀 없었다는 기억이 새삼 저를 전율하게 합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도대체 어찌하여 우리가 이런 삶을 살게 된 걸까요?


물론 엄마들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갈 일, 아닙니다. 아니 엄마들이 더 힘들겠지요. 그들이 산 세월, 얼마나 신산했는지 모르는 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 또한 어디선가 흘러왔을 것입니다. 책임이 있다 해도 온통 뒤집어씌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각성은 고통을 겪은 자에게서 먼저 일어나는 법입니다. 먼저 각성한 자가 먼저 길을 여는 것, 또한 이치입니다. 엄마들의 각성은 잘못한 것에 대한 윤리적 책임 때문이 아니라 왜곡되고 억압된 자신과 자녀의 영혼을 본디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한 생명적 의무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마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진실을 보아야만 합니다. 내 자식이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내 자식이 발달불균형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내 자식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의 핵심에는 사회 체제가 있습니다. 이 사회 체제를 주도하고 있는 헤게모니 블록을 상대로 내가, 이 엄마가 싸워야 합니다. 혼자서는 안 됩니다. 연대해야 합니다. 생명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들이 죽어가면서 사무치게 엄마를 부르고 있습니다. 절통한 마음으로 제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쌤, 엄마한테 꼭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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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 무엇보다 사회제도 개혁과 인식 전환이 선결문제 아닐까요?


우울증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아이들의 우울증은 어른이, 그들이 주무르는 사회가, 제도가, 인식의 틀이 만든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른들은 아이들 개인 문제로 치부합니다. 사회가, 제도가 얽어매는 족쇄를 풀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아이들을 기성 체제와 가치의 노예로 만들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현실에 대한 어른들의 인식을 전환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아이들 탓만 하고 있습니다.


2010년 12월 8일 어느 일간신문 보도 내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만 15살 학생들의 읽기·수학·과학 실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1~4위에 올라 학업성취도가 최상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읽기 학습’에 대한 흥미도가 낮고 혼자 읽고 공부하는 능력이 다른 회원국 학생 평균보다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오이시디는 34개 회원국과 31개 비회원국의 만 15살 학생 약 47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09년 국제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PISA 2009) 보고서를 7일 공개했다. 우리나라에선 137개 고등학교와 20개 중학교 학생 5123명이 참가했다.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는 오이시디 회원국 가운데 읽기 1~2위, 수학 1~2위, 과학 2~4위로 모두 최상위권이었다. 피사 결과는 통계 오차 등을 고려해 순위를 1~2위처럼 범위로 표시한다. 읽기와 수학의 평균점수는 각각 539점, 546점으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았는데, 특히 수학에선 ‘만년 1위’ 핀란드(541점)를 처음으로 앞질렀다. 과학(538점)은 핀란드(554점)·일본(539)에 뒤졌다.

평가에 참여한 65개국 전체를 비교한 결과에서도 우리 학생들은 읽기 2~4위, 수학 3~6위, 과학 4~7위를 기록해 최상위권이었다. 과학은 2006년 평가 때는 7~13위였으나 이번에 순위가 크게 올랐다. 전체 참여국 비교에서 순위가 약간씩 떨어진 것은 중국의 대도시인 상하이가 새로 평가에 참여해 모든 분야에서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피사는 오이시디 회원국 평가를 중심으로 하되, 비회원국은 경제협력 파트너 자격으로 도시 단위로 참여할 수 있다.

성적은 최상위권이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습 흥미도는 여전히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평가의 집중 분석 과목인 읽기 영역에서 흥미·즐거움 지수가 65개 나라 가운데 28위에 그쳤다. 또 읽기 성취도에 영향을 주는 학습전략 가운데 ‘암기 전략’은 오이시디 평균을 웃돌아 37위로 나타났지만, ‘통제 전략’(자기학습관리능력)은 최하위권인 58위를 기록해 남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공부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 평가에서도 우리나라는 집중 분석 과목이던 수학 성적이 상위권이었지만 흥미도와 학습동기에서 전체 41개 나라 가운데 각각 31위와 38위였고, 과학이 집중 분석 과목이었던 2006년 평가에서도 흥미도가 오이시디 평균을 밑돌아 단순 암기식 교육의 부정적인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 바 있다.


후반 밑줄 그은 부분은 대개 생략된 채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보도 사실 자체가 우리사회의 커다란 문제점을 여지없이 폭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육이 단순암기식, 주입식이어서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은폐해야 할 만큼 부끄러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교육 제도, 그 제도를 뒷받침하는 지배집단의 전략, 그 전략의 노예로 살아가는 침묵하는 다수의 굴종이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무엇이든,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해주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흥미를 느껴 스스로 하는 일에서 생겨납니다. 흥미를 느껴 스스로 하는 일은 인간을 경이로움에 열려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가장 고귀하면서도 힘 있는 끌개는 바로 경이로움입니다. 이것을 박탈당한 사람은 살아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말하자면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그게 다름 아닌 우울증입니다.


해결의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아이들을 경이로움의 세계에 풀어놓아야만 합니다. 교육, 입시 제도를 총체적으로 혁파해야 합니다. 주입된 지식을 암기해서 성취하는 능력은 종당 자기 자신을 사악한 체계의 노예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이걸 누가 할 수 있으며, 그래서 누가 해야 할까요? 


정치인들로 대표되는 이른바 국가에 맡길까요? 어림없습니다. 피해 당사자인 아이들에게 맡길까요? 물색없습니다. 그 경계에 선 존재, 바로 엄마입니다. 엄마들이 뭉쳐야 이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럼 엄마들이 어떻게 뭉칠 수 있을 까요? 이 또한 오직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내 아이의 심리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입니다. 내 아이가 우울증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프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서 바야흐로 경천동지할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엄마들! 그들의 현주소는 어딜까요? 책의 들머리 초등학생 이야기에서 보셨듯이, 아이들의 현실과 고통을 가장 민감하게 감지해야 할 엄마들이 사실은 문제의 최전선에 서 있습니다. 물론 이 문제 또한 그 어머니 개인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려 두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어느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망치고 싶겠습니까. 그들 하나하나 물어보면 누군들 자기 자식 사랑한다고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회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그게 자식에게 어떤 상처가 되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성가부장적 경쟁 사회 속에서 자신들조차 그 희생양이 되어 아이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가 비극의 자궁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어머니를 깨워야 합니다. 모성을 복원해야 아이들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과 손길로 아이들을 돌보지 않으면 우리 미래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자신의 어머니 됨을 사무치게 각인하고 떨쳐 일어나 이 포악한 세상을 뒤집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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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강의 요법(Lecture Therapy)이란 게 있다면서요?


그 동안 적지 않게 아이들과 개별적으로 상담하면서 겪었던 것 중 하나는 반드시 일대일로 만나 대화하는 것만이 힘 있는 상담치유의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상담하면서 틈틈이 강의를 나가 적게는 십 수 명, 많게는 몇 백 명과 소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 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일대일 상담 이상으로 후련한 소통, 가슴 뭉클한 감동, 홀가분한 해방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경험하였습니다. 


지금 아이들이 처한 현실은 수공업적 일대일 상담으로 풀어나갈 상황을 넘어선 측면이 있습니다. 여러 아이들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강의를 통해 집단적 소통과 해방이 일어나게 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종교적 강론/설법이나 단학, 기공 강의에서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종교지도자나 수행의 스승이 아니라고 해서 이런 효과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몰입하는 말하기와 듣기는 모두 고급한 실용 명상입니다. 강의자와 수강자, 그리고 수강자 상호간에 진심어린 교감이 일어난다면 강의요법은 예상 밖의 시너지로 증폭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할 때 강의 요법(Lecture Therapy)은 정신치료의 새로운 아침을 여는 빛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현실 여건상 그 많은 아이들이 일일이 상담전문가를 찾아가 개별상담을 받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경제적 부담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시간적으로도 그렇고요. 결국 이런 식의 해결 방안은 너무나 많은 사회적 비용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 무엇보다, 부모 된 처지에서, 내 자식이 우울증이다, 생각하고 상담실 문을 두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개된 강의 구조를 통해 현실적 난관을 일거에 해결한다면 모두에게 행복한 일이 될 것입니다.


(6) 의학은 결국 양육의 문제 아닌가요?


마음의 문제를 가진 분들과 만나면서 갈수록 깊어지는 생각이 있습니다. 의사가 지니고 있는 어떤 의학적 도식에 따라 그들의 고통을 일방적으로 이해하는 게 얼마나 안일한가, 아니 옳지 않은가, 하는 깨달음이지요. 의사라면 으레 무슨 병이라고 진단하고 약 처방하는 게 할 일이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만 고통을 겪는 당사자한테는 그런 행태가 모욕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병이라고 해야 할 것을 병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고통에 빠진 이를 더욱 깊은 고통으로 몰아넣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의사란 본디 사람의 생명과 삶, 즉 생명현상의 전 과정에 관여하는 조력자이며, 나아가 안내자, 더 크게는 스승이어야 합니다. 사회의 성격이 변화하는 데 따라 신성한 사제에서부터 싸구려 기술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 놓이지만, 인류가 갈수록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치닫는 작금의 현실을 볼 때, 의사가 그 본분에 대해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앞에서 말씀드린 <발달장애를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의 저자 호시노 요시히코의 견해를 참조해 의학의 좀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발달장애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이른바 자폐증과 아스퍼거증후군을 아우르는 광범성발달장애(PDD), 학습장애(LD)를 모두 담아내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 장애라는 표현이 주는 편견을 고려하여 저자는 발달장애를 발달불균형증후군으로 다시 고쳐 말합니다. 발달불균형증후군이 또 하나의 병명으로 인식되든 아니든, 그게 저자의 의도이든 아니든, 우리는 사람의 고통을 인식하는 데 "발달"이란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중요합니다. 


발달이란 말은 '신체, 정서, 지능 따위가 성장하거나 성숙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장, 성숙이란 말로 바꿔 써도 무방하겠지요. (이 모든 한자말을 아우르는 순 우리말 "자람/자라남"을 필요에 따라 쓰겠습니다.) 발달 문제가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는 이유는 유독 인간이란 종(種)만이 긴 성장기를 거치기 때문입니다. 다른 동물에게는 이런 문제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이 긴 성장기에 어떤 형태로든 상처를 입으면 발달의 균형이 깨지고, 바로 거기서부터 수많은 고통이 일어납니다. 


발달의 불균형은 전체적 관점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불균형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러 할 것입니다. 즉,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자라지 못하고,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자라고, 또 어떤 부분은 알맞게 자람으로써, 두루 고르게 자라지 못하는 것이지요. 물론 현실적으로는 지나치게 자라지 못하는 부분이 문제가 되겠지만, 실은 지나치게 자란 부분도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부분 때문에 다른 부분이 소홀히 되어 실제 삶이 기우뚱거리고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들쭉날쭉한 발달이 생각, 언어, 행동의 조화와 협동을 깨뜨림으로서 나타나는 다양한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가  지녀 온 몇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첫째, 이 문제를 인격적, 윤리적 차원에서 다루는 것입니다. 성질머리가 더럽다, 성격이 까칠하다, 배려심이 부족하다, 제 생각만 한다, 조신하지 못하다, 경망스럽다, 게으르다, 우유부단하다, 지저분하다, 예의바르지 못하다, 변덕스럽다, 정신력이 약하다, 못나빠졌다....... 말하자면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인격, 성격, 윤리적 감수성, 가치관, 따위의 틀을 뒤집어 씌워 책임을 묻고 다그치는 태도입니다.


둘째, 앞의 태도와 전혀 다른, 거의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특정한 부분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일 때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요. 뭔가 남다른 사람의 개성, 즉 ‘기인(奇人) 다움’으로 보는 것입니다. 가령, 여성편력이 심하다든가, 약물 의존 상태에 빠져 있다든가, 할 때, 아, 보통 사람과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지.......뭐,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지요. 


셋째,  의학적 차원에서 장애나 병으로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이 책은 이런 태도를 취합니다. 뇌의 특정 영역이나 신경체계 문제라고 보는 것이지요. 저자가 이 문제를 인격적, 윤리적 차원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나아가 장애라는 말에 덧씌워진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 발달불균형증후군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현재로서는 이 태도를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발달불균형증후군을 만병의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생각을 철저하게 밀어붙여서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 


"만병은 발달불균형증후군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병은 발달의 문제로 바뀝니다. 발달은 결국 양육 문제입니다. 양육은 무엇입니까? 아이를 보살펴서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근본 문제입니다. 윤리보다 깊고, 윤리보다 앞선 문제입니다. 아이가 덜 자란 것은 결코 그의 인격적 책임이 아닙니다. 그는 어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육은 치료보다 깊고, 치료보다 앞선 문제입니다. 아이가 덜 자란 것은 결코 병이 아닙니다. 그는 어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윤리도 의학도 어른의 기준으로 어른을 말하는 표준담론(!)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살피면 그 표준담론을 들이대는 장본인이 대부분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닙니다. 그가 제대로 된 어른이려면 자라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아이에게 어른의 기준을 들이대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그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통찰할 수 있어야 어른인 것이지요. 


결국 정도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대부분 발달의 문제를 지니고 있고 양육이라는 보살핌이 필요한 미완의 존재입니다. 인간, 우리 모두는,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입니다. 나쁜 게 아니라 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훈계하려고 달려드는 것을 엄히 금합니다. 아픈 게 아니라 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치려고 달려드는 것을 엄히 금합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 이 현실을 공감/동조하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보살피는 삶의 흐름에 맡기는 것만을 허합니다. 


그 동안 깊은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분들을 만나면서 그 분들의 내면에 학대 받은, 그래서 자라지 못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깊이, 또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아이들! 그들은 지금 여기서 상처 받고 있는 아이, 그 자체가 아니던가요. 아이들의 우울증 또한 내밀하게 살피면, 자기 자신의 생명과 그 가치를 업신여김으로써 자라나는 것을 막고 있으니, 이는 다만 기분장애가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발달 불균형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울증 치료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어루만져 보살피는" 일입니다. 하여 사람을 자라(나)게 하는 일입니다. 결국 어머니의 마음을 지녀야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성으로 감싸 안고 전인적 접근을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과연 어떤가요? 문제의 깊은 본질에서 너무나 아득히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부터, 지금, 당장, 시작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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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엇보다도 상담이 꼭 필요해요.


사람의 마음은 다만 뇌 활동이 아닙니다. 마음의 핵심에 뇌가 있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마음=뇌, 아니죠. 마음>뇌, 맞습니다. 마음은 삶 전체 활동을 일으키고 이끄는 선도 운동이자 결과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뇌를 넘어선 마음의 치유에는 현실 삶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현실 삶이 개입되는 치유는 스토리가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대화, 즉 심리 상담이 필수적입니다.


실제로 아이들, 할 말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어른들은 막무가내로 무시하지만 아이들, 이미 “알 건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진실을 들어주고 정서적 지지를 보내주고, 이성적으로 수긍해주고, 의지적으로 동참해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의 심리적 현실도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어른들이 제대로,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특유의 감수성으로 어른보다 빨리, 다양하게 이 변화무쌍한 세계를 따라잡고 적응, 변용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다만 뭔가 덜 자란 준비 단계의 예비 인간이 아닙니다. 그들의 현재는 어른의 현재와 동일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공부나 해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경청하는 어른이 꼭 있어야만 합니다.


경청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경청이란 자기 선입견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진실에 주의를 온통 맡기겠다는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경청하면 고통의 감염이 일어납니다. 감염이란 말이 서늘하다면 공유로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 내 고통을 함께 나누어질 때 그 고통의 무게는 쑥쑥 덜어지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참으로 경청하는 사람은 다만 내 고통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게 아닙니다. 고통보다 더 큰 나를 알아차립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곧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 고통은 내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리하면 그 투명한 힘은 이내 내게로 감염됩니다. 고통만 감염되는 게 아니고 치유와 깨달음도 감염됩니다.


그러면 고통보다 큰 내가 고통의 여백이 됩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고통, 그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홀연히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영원한 고통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나 또한 영원히 고통에 신음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고통을 호소하는 이, 그것을 경청하는 이, 그리고 고통이 함께 흘러감으로써 치유와 성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통섭(通躡)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이루어낼 수 있는 최상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위대한 변화를 몰고 오는 것이 치유상담입니다. 그래서 꼭 필요합니다. 


(4) 쉬고 싶거든요.......


아이들의 한결같은 소원이 잠 실컷 자 보는 거, 부담 없이 쉬어 보는 거, 그렇지요. 예. 그렇다마다요. 큰 휴식이 필요합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지운 짐, 거의 죄악 수준입니다. 그래 놓고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지요.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하지만 그 잘된다는 것이 가도 가도 멀어지는 수평선 같아서 아이들한테는 사실상 속임수처럼 느껴지는 무엇입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단한 여정, 여기에 무슨 애착이 있겠습니까. 하여 자꾸 죽음을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길이 나버린 생각은 두고두고 남은 생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어찌하면 쉬게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개인 차원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내 아이가 장차 무인도에서 살아갈 것이 아닌 이상 평범한 사람의 처지에서 사회적 삶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결국 이 문제는 아이들 교육, 입시 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중심축으로 하여 사회적 가치를 재구성하는 매우 커다란 국가적 과업일 수밖에 없습니다.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관심을 환기하여 아이들의 관점과 정서에 맞는 양질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나마 각 가정 또는 소규모 가정 공동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본다면 이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족/공동체끼리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삶의 길을 합의, 조정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적절한 여유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휴식이 꼭 양적 개념만은 아니므로 아이들에게 높은 행복감을 제공하면서도 압박감을 주지 않는 질적인 길을 제시하는 것이 마냥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현재 우리사회 분위기상 그리 녹록치는 않겠지만 그럴수록 이런 요구에 대한 갈망도 커질 것임을 감안한다면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아늑한 오솔길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어찌하든 우리 아이들에겐 지금 절대 개념의 휴식을 주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왜 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달려온 길을 문득 멈출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잠시 또는 일부의 여백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삶의 가치와 행복을 재정립하는 방향전환이 그 휴식을 낳는 것이어야 합니다. 참으로 절박한 문제인데 그만큼 한없이 답답한 문제입니다. 생각 있는 사람은 힘이 없고 힘 있는 사람은 생각이 없으니 말입니다. 기성세대 한 사람으로 오직 참담할 따름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한 가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엄마들이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챙기는 것을 혼동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아이의 삶, 특히 감정의 형성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이며 함께해주는 것입니다. 챙기는 것은 결과만을 염두에 두고 해결을 돕거나 제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이 자신에게 맡기고 기다리며 “그냥 내비 둬~”할 줄 아는 너그러움입니다. 챙기는 것은 한사코 손 대고 입 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악착스러움입니다. 이 혼동에서 벗어나야 아이의 휴식에 진심으로 동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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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1) 약물치료, 문제없나요?


흔히들 말합니다. 우울증, 약만으로도 쉽게 나을 수 있다고. 그런가요? 물론 가벼운 경우 약으로 증상만 완화시켜도 일상생활로 금세 돌아갈 수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우울증이 이와 같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평생을 폐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약은 어쩌면 최소한의 치료법일는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우울증 치료약을 먹으면 자살충동이 일어난다는 지적까지 있고 보면 만만치 않은 문제입니다.


미국의 어떤 임상심리학자가 쓴 <우울증 치료제(SSRI)가 청소년 자살 증가의 원인인가?>라는 글 일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미국 내 10대의 자살률이 최근 크게 증가한 것으로 밝혀져 의학계와 심리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통계인 2004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8%나 증가 했고 그전 15년간의 자살률 감소 추세를 크게 벗어났습니다. 10세에서 14세까지의 여자 어린이의 75.9%의 자살 증가율을 비롯해 모든 나이의 남녀 청소년들의 자살시도가 동시에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에는 많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급증하는 자살의 가장 유력한 이유 중 하나는 뜻밖에도 2004년 당시 미국 연방 정부기관인 미국 식품의약국에서 대표적인 우울증 치료제인 SSRI에 부착한, 복약 후에 자살충동을 느낄 수도 있다는 내용의 경고문입니다. 이 경고문은 청소년의 우울증 치료제 사용을 즉각 20% 이상 감소시켰으며 치료제가 필요할 때 약의 사용을 기피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자리 잡히게 되었습니다.

 
우울증의 치료제인 SSRI가 어떻게 해서 우울증의 가장 무서운 증상인 자살을 치료하기는커녕 증대시킨다고 미국 식품의약국에서 경고문을 넣었을까요. 그것은 미국 식품의약국 자체에서 실행한 연구에서 이 약들이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자살시도 비율을 2%에서 13%까지 증가시켰다는 결과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연구 결과에 상응해 그런 경고문을 넣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간과된 것은 환자가 우울증을 경험할 때 정말 심한 경우엔 자살을 할 여력이나 자살을 생각할 여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우울증 치료제의 투여 시 갑자기 생기는 여력과 기운은 전에는 시도조차 못했던 자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줍니다. 그래서 많은 심리학계 권위자들은 우울증 치료제 투여 후의 많은 자살시도는 우울증 치료제의 본질적인 부작용이 아니라 환자에게 생기는 갑작스런 기운과 여유로 인한 현상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한번 짚고 넘어갈 것은 SSRI가 어린이와 청소년의 우울증에 많은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프로작(Prozac)은 어린이들에게 65%의 약효가 입증됐고, 졸로프트(Zoloft)는 75%의 약효가 입증되었습니다. 어린이가 심한 우울증을 경험해서 약을 처방해야 할 때 자살할 위험 때문에 약을 처방하지 않는 경우, 아직 심하지 않았던 우울증이 점점 더 심해지면서 자살의 위험이 오히려 증가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번 갑작스러운 청소년 자살 증가는 필요한 치료제를 자살의 위험을 의식해 기피한 것이 오히려 큰 이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우울증의 경우 약의 치료보다는 심리적인 치료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증세를 일으키는 원인이 있을 경우 근본적인 원인을 인식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그 증세가 언제나 재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약을 이용하지 않고 치료가 가능하다면 절대로 약을 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약을 병행해야 치료가 가능할 때가 많습니다.(이하 생략)


무슨 의도에서 쓴 글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임상심리학자로서 지니고 있는 기본 철학에 동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실관계와 논리에 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약을 먹고 자살을 하는 것이 약의 부작용이 아니고 오히려 약 효과로 나타난 여력과 기운 때문이라는 주장이 옳다면, 그 앞에서 경고문 때문에 약을 기피해서 자살률이 높아졌다는 해석과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약을 안 먹어서 여력과 기운이 생기지 않았는데 무슨 힘으로 자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말일까요? 약을 먹어서 자살하는 사람과 약을 안 먹어서 자살하는 사람이 같을 리 없는데 어떻게 이런 논리가 나왔을까요? 더군다나 바로 앞에서는 자살을 우울증에서 가장 무서운 증상이라고 했으면서도 약을 먹으면 증상이 완화되어 자살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한다고 하니 이 또한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혼란이 생긴 걸까요?


다른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SSRI라는 약 하나의 작용 범주에 함몰되어 논의를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로토닌 재흡수를 억제하면 세로토닌 양이 늘어나 우울증 상태를 완화한다는 사실에만 집착했지 신경전달물질 상호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염두에 두지 못했던 것입니다. 세로토닌은 도파민계열 모노아민 억제 효과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효과가 현저하게 나타나는 사람일 경우 세로토닌이 늘어나서 자살한 게 아니고 도파민이 억제되어 자살을 한 것입니다. 약의 효과와 부작용을 편리한 대로 분리하는 논리는 아무래도 제약회사의 입김 같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SSRI의 효과이자 부작용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살하는 사람은 본디 SSRI로 치료해서는 안 되는 환자였던 것입니다. 우울증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낳은 비극입니다. 제가 먼저 쓴 책(<안녕, 우울증>)에서 말씀드렸듯 우울증은 현재 적어도 크게 네 가지 정도로 분류를 할 수 있고 거기에 따라 치료를 달리해야 합니다. SSRI를 일단 줘 보는 식의 치료는 극히 위험합니다. 가령 도파민 부족으로 삶의 의미를 못 찾고 있는 사람에게 SSRI를 쓰면 자살을 권하는 꼴이 되는 것이지요. 거기다 대고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로 에너지가 생겨 자살했다고 말하면 누가 듣더라도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쓰면 약에 분명히 완화 효과 있다는 거, 인정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현재 교과서적 의학 수준에서 과연 제대로 약을 쓸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제 임상의들이 적절한 진단 방식을 통해 우울증의 유형을 분류해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지식을 갖추고 거기에 맞추어 약을 체계적으로 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판단됩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한, 다른 안전장치 없는 “아니면 말고” 식의 약물 치료는 삼가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공-화학적으로 조제된 약물로 뇌신경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의 병을 고치겠다는 발상 자체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람은 뇌가 조종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의학은 그 어떤 학문보다도 인간 생명에 대한 예의를 지킬 의무가 있는데도 현실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세 가지 구체적인 폐해 사실을 더해두기로 합니다. 우선, 거의 모든 정신과 양약은 칼슘과 마그네슘 효능을 탈취합니다. 두 물질 모두 사람의 정신 안정에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정신과 양약을 오래 복용하면 정신 안정이 무너진다는 모순에 봉착하게 됩니다.


둘째,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SSRI는 소화관을 망가뜨리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로토닌은 뇌에 2% 미만, 소화관에 98% 이상이 분포하기 때문입니다.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 효과가 소화관에 더 크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결국 과량의 세로토닌이 소화관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은 필연입니다. 더군다나 소화관은 이른바 “제2의 뇌”라고 말해질 만큼 정신 문제와 직결됩니다. 이 문제 또한 앞의 폐해와 똑같이 모순을 낳고 마는 것이지요.


셋째, 이는 양약 일반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거의 모든 양약은 우리 몸을 차게 합니다. 몸이 차다는 것은 한의학적 견지에서 보면 매우 좋지 않은 사실입니다. 암을 비롯한 수많은 중병들이 낮은 체온과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이런 일련의 문제를 놓고 생각한다면 양약 일변도로 우울증 치료에 접근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2) 아, 그럼, 한약은 어떤가요?


물론 한약도 약입니다. 약으로 마음의 병을 완벽하게 다스린다는 생각이 근본적으로 교만한 것이란 점에서는 양약과 다를 바 없이 대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약은 양약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선 양약은 기본적으로 병이라는 적대적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그 기전을 억제하는 작용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게 서양의학의 기본자세거든요. 우울증의 경우 앞에서 거론된 SSRI라는 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말 그대로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입니다. 부족한 세로토닌을 공급한다거나 세로토닌 신경계를 활성화한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한약은 이와 달리 기본적으로 보충해주고 활성화한다는 개념입니다. 서양의학에는 없는 보(補) 개념을 통해 생명의 자체 치유능력을 돕는 방법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양약과 같은 극단적인 부작용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약의 쌍방향조절 기능입니다. 양약과 달리 필요한 성분만 추출하거나 조작해서 쓰는 게 아니라 생명체인 식물 자체를 쓰기 때문에 식물의 생명 특성이 그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 땅에 뿌리 내리면 죽을 때까지 이동하지 못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쌍방향적 성품을 지니게 됩니다. 물론 정도 차이는 있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한약, 특히 여러 가지 약재를 조합해서 달이는 탕약은 사람의 생명 상태에 따라 유연하게 쌍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서양의학에서는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대로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약은 SSRI처럼 재흡수를 억제하는 방식으로 세로토닌 부족을 메우는 게 아니라 세로토닌 신경계를 활성화하고 세로토닌의 전구물질인 트립토판을 공급해주는 방식을 택합니다. 또한 일방적으로 이런 효과가 일어나 도파민 신경계를 과도하게 억제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쌍방향 작용을 합니다. 결국 약만으로 따졌을 때 한약이 양약에 비해 훨씬 안전하고 종합적인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약만으로 우울증을 치료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우울증을 잘 모르거나, 약을 과신하거나, 최악의 경우 그 둘 다거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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