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무엇보다도 상담이 꼭 필요해요.


사람의 마음은 다만 뇌 활동이 아닙니다. 마음의 핵심에 뇌가 있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마음=뇌, 아니죠. 마음>뇌, 맞습니다. 마음은 삶 전체 활동을 일으키고 이끄는 선도 운동이자 결과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뇌를 넘어선 마음의 치유에는 현실 삶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현실 삶이 개입되는 치유는 스토리가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대화, 즉 심리 상담이 필수적입니다.


실제로 아이들, 할 말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어른들은 막무가내로 무시하지만 아이들, 이미 “알 건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진실을 들어주고 정서적 지지를 보내주고, 이성적으로 수긍해주고, 의지적으로 동참해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의 심리적 현실도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어른들이 제대로,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특유의 감수성으로 어른보다 빨리, 다양하게 이 변화무쌍한 세계를 따라잡고 적응, 변용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다만 뭔가 덜 자란 준비 단계의 예비 인간이 아닙니다. 그들의 현재는 어른의 현재와 동일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공부나 해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경청하는 어른이 꼭 있어야만 합니다.


경청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경청이란 자기 선입견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진실에 주의를 온통 맡기겠다는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경청하면 고통의 감염이 일어납니다. 감염이란 말이 서늘하다면 공유로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 내 고통을 함께 나누어질 때 그 고통의 무게는 쑥쑥 덜어지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참으로 경청하는 사람은 다만 내 고통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게 아닙니다. 고통보다 더 큰 나를 알아차립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곧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 고통은 내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리하면 그 투명한 힘은 이내 내게로 감염됩니다. 고통만 감염되는 게 아니고 치유와 깨달음도 감염됩니다.


그러면 고통보다 큰 내가 고통의 여백이 됩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고통, 그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홀연히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영원한 고통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나 또한 영원히 고통에 신음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고통을 호소하는 이, 그것을 경청하는 이, 그리고 고통이 함께 흘러감으로써 치유와 성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통섭(通躡)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이루어낼 수 있는 최상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위대한 변화를 몰고 오는 것이 치유상담입니다. 그래서 꼭 필요합니다. 


(4) 쉬고 싶거든요.......


아이들의 한결같은 소원이 잠 실컷 자 보는 거, 부담 없이 쉬어 보는 거, 그렇지요. 예. 그렇다마다요. 큰 휴식이 필요합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지운 짐, 거의 죄악 수준입니다. 그래 놓고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지요.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하지만 그 잘된다는 것이 가도 가도 멀어지는 수평선 같아서 아이들한테는 사실상 속임수처럼 느껴지는 무엇입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단한 여정, 여기에 무슨 애착이 있겠습니까. 하여 자꾸 죽음을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길이 나버린 생각은 두고두고 남은 생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어찌하면 쉬게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개인 차원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내 아이가 장차 무인도에서 살아갈 것이 아닌 이상 평범한 사람의 처지에서 사회적 삶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결국 이 문제는 아이들 교육, 입시 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중심축으로 하여 사회적 가치를 재구성하는 매우 커다란 국가적 과업일 수밖에 없습니다.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관심을 환기하여 아이들의 관점과 정서에 맞는 양질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나마 각 가정 또는 소규모 가정 공동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본다면 이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족/공동체끼리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삶의 길을 합의, 조정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적절한 여유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휴식이 꼭 양적 개념만은 아니므로 아이들에게 높은 행복감을 제공하면서도 압박감을 주지 않는 질적인 길을 제시하는 것이 마냥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현재 우리사회 분위기상 그리 녹록치는 않겠지만 그럴수록 이런 요구에 대한 갈망도 커질 것임을 감안한다면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아늑한 오솔길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어찌하든 우리 아이들에겐 지금 절대 개념의 휴식을 주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왜 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달려온 길을 문득 멈출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잠시 또는 일부의 여백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삶의 가치와 행복을 재정립하는 방향전환이 그 휴식을 낳는 것이어야 합니다. 참으로 절박한 문제인데 그만큼 한없이 답답한 문제입니다. 생각 있는 사람은 힘이 없고 힘 있는 사람은 생각이 없으니 말입니다. 기성세대 한 사람으로 오직 참담할 따름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한 가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엄마들이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챙기는 것을 혼동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아이의 삶, 특히 감정의 형성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이며 함께해주는 것입니다. 챙기는 것은 결과만을 염두에 두고 해결을 돕거나 제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이 자신에게 맡기고 기다리며 “그냥 내비 둬~”할 줄 아는 너그러움입니다. 챙기는 것은 한사코 손 대고 입 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악착스러움입니다. 이 혼동에서 벗어나야 아이의 휴식에 진심으로 동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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