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강의 요법(Lecture Therapy)이란 게 있다면서요?
그 동안 적지 않게 아이들과 개별적으로 상담하면서 겪었던 것 중 하나는 반드시 일대일로 만나 대화하는 것만이 힘 있는 상담치유의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상담하면서 틈틈이 강의를 나가 적게는 십 수 명, 많게는 몇 백 명과 소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 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일대일 상담 이상으로 후련한 소통, 가슴 뭉클한 감동, 홀가분한 해방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경험하였습니다.
지금 아이들이 처한 현실은 수공업적 일대일 상담으로 풀어나갈 상황을 넘어선 측면이 있습니다. 여러 아이들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강의를 통해 집단적 소통과 해방이 일어나게 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종교적 강론/설법이나 단학, 기공 강의에서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종교지도자나 수행의 스승이 아니라고 해서 이런 효과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몰입하는 말하기와 듣기는 모두 고급한 실용 명상입니다. 강의자와 수강자, 그리고 수강자 상호간에 진심어린 교감이 일어난다면 강의요법은 예상 밖의 시너지로 증폭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할 때 강의 요법(Lecture Therapy)은 정신치료의 새로운 아침을 여는 빛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현실 여건상 그 많은 아이들이 일일이 상담전문가를 찾아가 개별상담을 받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경제적 부담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시간적으로도 그렇고요. 결국 이런 식의 해결 방안은 너무나 많은 사회적 비용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 무엇보다, 부모 된 처지에서, 내 자식이 우울증이다, 생각하고 상담실 문을 두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개된 강의 구조를 통해 현실적 난관을 일거에 해결한다면 모두에게 행복한 일이 될 것입니다.
(6) 의학은 결국 양육의 문제 아닌가요?
마음의 문제를 가진 분들과 만나면서 갈수록 깊어지는 생각이 있습니다. 의사가 지니고 있는 어떤 의학적 도식에 따라 그들의 고통을 일방적으로 이해하는 게 얼마나 안일한가, 아니 옳지 않은가, 하는 깨달음이지요. 의사라면 으레 무슨 병이라고 진단하고 약 처방하는 게 할 일이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만 고통을 겪는 당사자한테는 그런 행태가 모욕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병이라고 해야 할 것을 병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고통에 빠진 이를 더욱 깊은 고통으로 몰아넣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의사란 본디 사람의 생명과 삶, 즉 생명현상의 전 과정에 관여하는 조력자이며, 나아가 안내자, 더 크게는 스승이어야 합니다. 사회의 성격이 변화하는 데 따라 신성한 사제에서부터 싸구려 기술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 놓이지만, 인류가 갈수록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치닫는 작금의 현실을 볼 때, 의사가 그 본분에 대해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앞에서 말씀드린 <발달장애를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의 저자 호시노 요시히코의 견해를 참조해 의학의 좀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발달장애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이른바 자폐증과 아스퍼거증후군을 아우르는 광범성발달장애(PDD), 학습장애(LD)를 모두 담아내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 장애라는 표현이 주는 편견을 고려하여 저자는 발달장애를 발달불균형증후군으로 다시 고쳐 말합니다. 발달불균형증후군이 또 하나의 병명으로 인식되든 아니든, 그게 저자의 의도이든 아니든, 우리는 사람의 고통을 인식하는 데 "발달"이란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중요합니다.
발달이란 말은 '신체, 정서, 지능 따위가 성장하거나 성숙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장, 성숙이란 말로 바꿔 써도 무방하겠지요. (이 모든 한자말을 아우르는 순 우리말 "자람/자라남"을 필요에 따라 쓰겠습니다.) 발달 문제가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는 이유는 유독 인간이란 종(種)만이 긴 성장기를 거치기 때문입니다. 다른 동물에게는 이런 문제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이 긴 성장기에 어떤 형태로든 상처를 입으면 발달의 균형이 깨지고, 바로 거기서부터 수많은 고통이 일어납니다.
발달의 불균형은 전체적 관점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불균형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러 할 것입니다. 즉,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자라지 못하고,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자라고, 또 어떤 부분은 알맞게 자람으로써, 두루 고르게 자라지 못하는 것이지요. 물론 현실적으로는 지나치게 자라지 못하는 부분이 문제가 되겠지만, 실은 지나치게 자란 부분도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부분 때문에 다른 부분이 소홀히 되어 실제 삶이 기우뚱거리고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들쭉날쭉한 발달이 생각, 언어, 행동의 조화와 협동을 깨뜨림으로서 나타나는 다양한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가 지녀 온 몇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첫째, 이 문제를 인격적, 윤리적 차원에서 다루는 것입니다. 성질머리가 더럽다, 성격이 까칠하다, 배려심이 부족하다, 제 생각만 한다, 조신하지 못하다, 경망스럽다, 게으르다, 우유부단하다, 지저분하다, 예의바르지 못하다, 변덕스럽다, 정신력이 약하다, 못나빠졌다....... 말하자면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인격, 성격, 윤리적 감수성, 가치관, 따위의 틀을 뒤집어 씌워 책임을 묻고 다그치는 태도입니다.
둘째, 앞의 태도와 전혀 다른, 거의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특정한 부분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일 때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요. 뭔가 남다른 사람의 개성, 즉 ‘기인(奇人) 다움’으로 보는 것입니다. 가령, 여성편력이 심하다든가, 약물 의존 상태에 빠져 있다든가, 할 때, 아, 보통 사람과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지.......뭐,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지요.
셋째, 의학적 차원에서 장애나 병으로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이 책은 이런 태도를 취합니다. 뇌의 특정 영역이나 신경체계 문제라고 보는 것이지요. 저자가 이 문제를 인격적, 윤리적 차원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나아가 장애라는 말에 덧씌워진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 발달불균형증후군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현재로서는 이 태도를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발달불균형증후군을 만병의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생각을 철저하게 밀어붙여서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
"만병은 발달불균형증후군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병은 발달의 문제로 바뀝니다. 발달은 결국 양육 문제입니다. 양육은 무엇입니까? 아이를 보살펴서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근본 문제입니다. 윤리보다 깊고, 윤리보다 앞선 문제입니다. 아이가 덜 자란 것은 결코 그의 인격적 책임이 아닙니다. 그는 어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육은 치료보다 깊고, 치료보다 앞선 문제입니다. 아이가 덜 자란 것은 결코 병이 아닙니다. 그는 어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윤리도 의학도 어른의 기준으로 어른을 말하는 표준담론(!)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살피면 그 표준담론을 들이대는 장본인이 대부분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닙니다. 그가 제대로 된 어른이려면 자라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아이에게 어른의 기준을 들이대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그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통찰할 수 있어야 어른인 것이지요.
결국 정도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대부분 발달의 문제를 지니고 있고 양육이라는 보살핌이 필요한 미완의 존재입니다. 인간, 우리 모두는,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입니다. 나쁜 게 아니라 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훈계하려고 달려드는 것을 엄히 금합니다. 아픈 게 아니라 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치려고 달려드는 것을 엄히 금합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 이 현실을 공감/동조하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보살피는 삶의 흐름에 맡기는 것만을 허합니다.
그 동안 깊은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분들을 만나면서 그 분들의 내면에 학대 받은, 그래서 자라지 못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깊이, 또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아이들! 그들은 지금 여기서 상처 받고 있는 아이, 그 자체가 아니던가요. 아이들의 우울증 또한 내밀하게 살피면, 자기 자신의 생명과 그 가치를 업신여김으로써 자라나는 것을 막고 있으니, 이는 다만 기분장애가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발달 불균형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울증 치료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어루만져 보살피는" 일입니다. 하여 사람을 자라(나)게 하는 일입니다. 결국 어머니의 마음을 지녀야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성으로 감싸 안고 전인적 접근을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과연 어떤가요? 문제의 깊은 본질에서 너무나 아득히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부터, 지금, 당장, 시작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