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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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슨 말이 내게로 건너오는지를 듣기 위해 참으로 진지하게 귀를 쫑긋하던 그 설렘과 떨림의 거리. 그만큼이 전화기라는 사물이 구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거리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그 쫑긋거림, 저편의 숨결까지 감지하고자 온몸을 기울이는 극진함이 살아 있는 세계. 문 저편이 침묵 중이라면 침묵의 언어를 극진한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사람의 말뿐 아니라 갖가지 사물과 동식물과 흙과 물의 말 앞에서도 좀 더 극진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몸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처럼 나무둥치 속에서도 물이 순환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그것이 나무의 말이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갖가지 사물들이 실은 너무도 풍성한 말을 거느린 언어의 마법사들이라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깨달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극진하게 들을 수 있는 낮은 무릎이 필요하다.” (237-238쪽)


전문서적 아닌 책 한 권을 가지고 이렇게 달여 읽은 적이 없다. 하기는 달이려고 읽은 것이니 그럴 밖에. 마지막 장을 읽던 중이었다. 읽다가 문득 “몸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을 느끼는 찰나 눈길 꽂힌 곳을 보니 책에 “꼬르륵”이라고 써 있다! 아.......물아일체. 아니, 이심전심.


이 작은 기적을 체험한 직후, 아니 그 결과, 나는 한바탕 펑펑 울고야 마는 사건과 마주했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다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물론 실체적 진실은 사회적 타살이지만, 고등학생의 유서 마지막 문장 을 본 것이다. 극진한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나 목말라 마지막까지 투정부려 미안한데 물 좀 줘...


아, 이 얼마나 외로운 목마름인가. 대체 얼마를 울다가 뛰어내렸던 것일까. 처절한 엄마 그리움 어찌 하고 저리도 황망히 갔을까. 눈두덩이 새빨개진 채 침을 놓고 돌아다니는데 연신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 아이 목마름의 절망이 내 목에 들어온 듯 울대가 뻑뻑하고 가슴이 아파온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말 끊어진 저승 넘어 그 아이 영혼이 지금 내게 와 오열하는 듯, 미소 지으며 등을 토닥이는 듯, 말끄러미 내 눈을 들여다보는 듯....... 나는 그 아이“침묵의 언어를 극진한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었으면”하는 비원(悲願)에서 “낮은 무릎”으로 이 하루를 보내려 한다. 이 어린 생명에 대한 예의로 오늘 이후 내 영혼의 휴대폰을 “무슨 말이 내게로 건너오는지를 듣기 위해 참으로 진지하게 귀를 쫑긋하던 그 설렘과 떨림의 거리”에 두기로 한다.


휴대폰, 특히 스마트폰이 사람 사이 시공을 너무 좁혀서 오히려 세상은 아득한 소외로 갈가리 찢어진다. 지체 없이 말을 섞을 수 있어서 마음이 가려진다. 검색만 하면 생면부지 타인 신상을 죄다 털 수 있어서 정작 가까운 사람에겐 무지하다. 침묵은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온갖 것을 부풀려 떠들어서 값 올리는 통에 인제 참된 가치란 찾아볼 수 없다. 인간 이외의 사물과 자연은 너무나 편리한 도구와 대상이어서 그들 내면의 풍성한 소리는 사라져버린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 아니 우리 삶의 극진함을 먹어버린 휴대폰을 김선우는 김선우답게 와삭! 먹어버린다고 꿈꾼다. 그 맛있는 상상력이야 ‘천하시인’ 김선우의 몫. 나는 홀연히 휴대폰을 잊는다. 완전히 잃어버려서 새로 산 경우는 없지만 잊을만하면(!) 잊어버리고 빈손으로 다닌다. 그 빈손은 다른 생명과 사물에 내가 귀를 쫑긋하고 있다는 증거일 터이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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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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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을 전율과 설렘, 분노와 경악, 기쁨과 슬픔 같은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사진들이 있다. 케빈 카터의 <수단의 굶주린 소녀>를 볼 때도 그랬다. 기아와 내전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수단 남부로 들어가다가 굶주려 죽어가는 어린 소녀와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독수리를 향해 그의 사진기가 셔터를 열었다 닫았을 때, 사진기 내부의 어두운 방은 얼마나 깊은 슬픔으로 몸을 떨었을까? 순간의 빛이 보내온 정보를 자신의 몸에 아로새기는 동안, 사진기의 몸속을 떠다녔을 절망감과 흐느낌 같은 것이 사진 속에 묻어 있다.”(221쪽)

 

 

 


고백하거니와, 실은, 나도, 아니, 나, 는 사진기다. “나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을 전율과 설렘, 분노와 경악, 기쁨과 슬픔 같은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상담 언어들이 있다. “순간의 빛이 보내온 정보를 자신의 몸에 아로새기는 동안, 의 몸속을 떠다녔을 절망감과 흐느낌 같은 것이 상담 언어 속에 묻어 있다.” 그렇다. 나는 아픈 마음의 사진기다.


제대로 된 상담치유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각하는 바다. 상담은 경청에서 시작된다. 경청은 나를 내려놓고 남을 듣는 거다. 남의 분노, 남의 슬픔, 남의 절망을 내 몸 온전히 열어, 내 영혼 온전히 열어 듣는 거다. 온전히 열어 들으면 내 몸이, 내 영혼이 놀란다, 떤다, 운다, 분노한다, 절망한다, 설렌다, 웃는다....... 이것은, 실로, 감염이다. 그러면서,


감염을 넘어선다. 넘어서는 순간 두 개의 자력이 대칭적으로 작동한다. 하나는 고통 속에 있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달려가는 연대의 방향, 융합의 힘이다. 다른 하나는 고통에 처한 사람과 그를 둘러싼 삶의 조건 전체를 냉철히 살피고 비판하는 자율의 방향, 독립의 힘이다. 온전한 치유가 되려면 이 대칭의 근본구도는 늘 유지되어야 한다.


이 대칭은 매순간 자발적으로 깨지면서 비대칭의 대칭, 그 기우뚱한 균형으로서 생명의 숨길을 열어간다. 언제 어떤 변화가 올지 아무도 모른다. 누가 일방적으로 정할 문제가 아니다. 특히 밖에 서 있는 사람이 왈가왈부할 일은 더욱 아니다. 상담자가 깨어 있어 전체적 관점을 잃지 않으면서 순간마다 아름다운 선택이 가능하도록 도와야 한다.


실제 상담을 진행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이런 선택의 순간이다. 회심의 선택이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망설이고 망설인 선택이 결정타가 될 수도 있다. 혼신의 힘을 다한 환자가 졸지에 발길을 끊기도 한다. 데면데면 대한 환자가 시절인연이 되기도 한다. 꿈같은 말이긴 하지만 길은 하나다. 늘 절박한 호흡으로 가는 거다. 그렇지만,


.......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사진으로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지 삼 개월 후 케빈 카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진 발표 당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촬영보다 먼저 소녀를 도왔어야 했다는 비판이 그의 자살과 얼마나 연관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구도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고통 앞에 함부로 돌멩이를 던질 수는 없는 것이다. 고통의 현장으로 스스로를 몰고 간 이들의 작업으로 인해 보이지 않던 진실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고 연대와 보호의 실천이 시작되곤 하므로.”(221쪽)


그 현실에 내재한 ‘진실’은 본인을 제외한 상태라면 누구도 알지 못 한다. 알지 못 하는 상태에서 이른바 ‘사실’에 터 잡아 바른 말이랍시고 해댄 결과가 한 사람, 더군다나 감추어진 진실 속의 본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면 이것은 명백히 문제가 있다. 어떤 순간이든, 그가 누구든, 자기 “....... 앞의 생으로 오는 것들은 언제나 절박한 호흡으로 온다.”(198쪽)


설혹 일부 언론이 보도하듯 케빈 카터가 퓰리처상에 ‘필 꽂혀’ 소녀의 생명을 잠시 등한히 했다 하자. 그러나 그는 전쟁과 기아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고통의 현장으로 스스로를 몰고 간” 사람이다. 그의 “작업으로 인해 보이지 않던 진실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고 연대와 보호의 실천이” 시작되었다. 한 마디 말로 단언할 수 없는 진실의 모순이 있다.


상담의 찰나마다 나는 이런 모순, 그 이율배반 앞에서 모골이 송연해진다. 마음 아픈 사람들과 나누는 치유적진실의 도구가 말이니 말이다.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내 말로 치유 받고 나를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이 여럿 있다. 하지만 똑 같은 내 말에 상처 입고 쓰러진 사람 또한 여럿 있지 않을 것인가? 화급히 심장에 손을 얹는다. 아앗(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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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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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를 짓는 상상을 하다보면 뜻밖에도, 정말 잘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수의가 불러일으키는 죽음의 이미지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다. 수의에 내재한 미감은 마술처럼 지금 이 순간의 삶의 미감으로 삼투한다. 햇살 아래 수의를 거풍시키거나 매만진 다음 날, 다른 날보다 더 오래 공들여 장독을 닦거나 긴 산책을 하는 엄마를 보게 되는 것처럼, 아름다운 매듭을 위해 오늘 이 순간을 가장 충만하게 살라고 요구하는 어떤 목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는 속삭이듯, 간질이듯, 나의 내부 어딘가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다. 깨어 있어라. 매 순간, 가장 충만한 방식으로 깨어 있어라. 아름다운 무명옷을 입은 그 목소리는 뒤돌아보지 않으면서 글썽거리고, 손 내밀지 않으면서 이미 내 손을 잡고 있다.”(206쪽)


내 기억 속에는 두 벌의 수의가 있다. 할머니께서 손수 짠 베로 만드신 당신의 수의와 막내아들, 즉 내 아버지의 수의다. 당신의 수의를 손수 지으신 것은 의당 그렇다 치고 왜 하필 막내아들의 수의를 지어놓으셨던 것일까? 막내아들은 서른이 채 안 되어 이혼했다. 재혼에 다시 실패하여 두 번째 이혼하는 꼴을 보고 어머니로서 막내아들의 향후 인생을 직감하신 듯하다. 저 화상이 끝내 제 인생을 제 손으로 갈무리하지 못 하고 황천 강 건너겠구나. 어미 손을 타고야 말지. 결국 그 막내아들은 이혼 재혼을 여러 번 되풀이하며 배다른 자식들을 어린아이 밥알 흘리듯 남겨놓고 어머니가 지어놓으신 수의 품에 쓰러져 예순이 채 안 되어 황망히 저승으로 떠났다. 아이인 채 죽은 것이다.


이런 곡절의 흐름을 지켜 본 나이기에 수의를 생각하는 마음 길은 언제나 정갈하게 비질이 되어 있다. 자신과 인생에 대하여 곡진함으로 예의를 다한 사람이 손수 수의를 마련하는 것이다. 자신과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놓아줄 수 있는 사람만이 손수 수의를 마련하는 것이다. 아들이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집안과 모진 가난을 끌어안고 한 평생 결곡함을 잃지 않으신 할머니 같으신 분이 나지막이 구음 장단 내며 자신의 수의를 바느질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수의, 곧 죽음 옷은 내 삶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나는, 적어도 나는, 수의 앞에서 먼저 큰절을 올린다. 할머니와 그 삶에 표하는 경의다. 그리고 무릎 꿇어 앉는다. 아버지와 그 삶으로 나를 들여다보는 성찰이다.


깊은 호흡 하고 고요히 질문에 잠긴다. 너는 지금 수의를 지을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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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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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은 두렵다. 그것은 소리 높여 스스로를 외치지 않으면서도 생의 모든 방위에 질기게 스며 있는 것이다....... 어느....... 지도 위에 남아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생은 비밀이면서도 또한 숨길 수 없다. 어디에 무엇으로든 흔적이 남는다. 지도는 기억에 직결된 가장 강력한 흔적의 창고다.”(195-196쪽)


얼마 전 한 일간신문에 친 아버지한테 성폭행당한 상처의 고통을 호소하는 여성이 보낸 질문과 국민 멘토로 회자되고 있는 한 고수급 승려가 준 답변이 실렸다. ‘쾌도 상담’이란 멋진 타이틀 아래 그가 내린 ‘처방’의 골자는 이랬다.


“네가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니 떨치고 가서 감사하라.”


그 기사를 읽고 나는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이것은 법문이지 상담이 아니다. 법문은 도를 가르치는 것이지만 상담은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다. 가르침과 치유 사이의 다른 점을 무시하는 거야말로 空 망상이다.”


성폭행 당했다는 생각은 상(相)이다. 상은 헛되다. 헛것에 매달리지 말고 감사로써 흘려보내라. 맞는 말이다. 그러나 헛된 상이 평범한 중생의 심리적 현실에서 어떻게 절박한 문제인지, 얼마나 두려운 힘인지, 있는 그대로 헤아리지 않은 답변은 그 자체 또한 헛된 상이다. 실체가 아니라고 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상하다고 해서 실재가 nothing이 될 수는 없다. actual reality만 reality가 아니라 psychic reality도 reality다.


심리적 실재는 “소리 높여 스스로를 외치지 않으면서도 생의 모든 방위에 질기게 스며 있는”, 그래서 두려운, “흔적”의 부활이다. 실체가 아닌데 힘 있다. 아니, 실체가 아니어서 힘 있다. 이것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무시하는 자는 구름 위를 떠다니는 공관(空觀) 마니아에 지나지 않는다. 수시로 부활하는 흔적과 싸우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아픈 일인지 “공명”(196쪽)하지 못하는 자가 가르침이라면 몰라도 치유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구름 아래 있는 아픈 사람에게 구름 위의 진실을 냉큼 던져주는 것은 염장 지르기를 방편으로 쓰는 결과/해결 중심 사유에 터 잡은 남성 가부장적 대승불교가 전가의 보도로 쓰는 구도의 방식이다. 일리 있다. 그러나 이것은 따뜻한 보살핌을 기조로 하는 과정/문제 중심 사유에 터 잡은 여성 또는 모성적 치유와는 맞지 않다. 간화선적 깨달음이 모든 것을 통괄하고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그 깨달음으로 √2가 무리수임을 증명해보라.


더 빨리 어떤 목적지에 닿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해 지도를 펴 들게 된다면 서둘러 그 지도를 버려야 한다. 자기 앞의 생을 찾아가는 그 모든 과정들이 얼마나 애틋한지를 보여주는 징표로서의 지도는 ‘거기’를 꿈꾸게 할 뿐만 아니라 ‘여기’를 돌아보게 하는 아주 느린 흔적들의 집이기 때문이다.”(199쪽)


해답을 알고 있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자가, 두 점 사이에 직선 긋듯 하는 교설은 상에 갇힐 수밖에 없는 현실에 놓인 사람한테 성마름, 더 나아가 폭력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자기 앞의 생을 찾아가는 그 모든 과정들이 얼마나 애틋한지” 살피는 따스함, 어루만짐 없이 “‘거기’” “더 빨리 어떤 목적지에 닿기 위한 길을” 던지는 차가움, 도도함은 아픈 사람의 분노와 절망을 증폭시킨다.


어둠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해주어야 할 일은 함께 그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게 공명이며 공감이며 공유다. 한 생명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출발점이다. 빛을 가리키며 이끄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바로 이 순서가 생명의 순서다. 인간의 순서다. 붓다의 순서다. 중생의 고통과 함께 한다고 입만 열면 떠드는 이른바 깨친 자가 싸늘한 사실 부여잡고 죽비나 내려치고 있으면서 불도를 운위하다니 실로 가소로운 노릇이다.


이 가소로운 일들이 어찌하여 대승불교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그럼? 탈속적인 삶을 구가하는 깨친 자들의 여유, 긴, 길어도 너무 긴, 그래서 늘어진 호흡에서 그런 실패(!)가 나온다.


내 앞의 생으로 오는 것들은 언제나 절박한 호흡으로 온다. 자기 앞의 생에 ‘오버’란 없는 것이다.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내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내 앞의 문제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온 것이다. 내가 의식하고자 하지 않으면 그저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것이지만, 민감한 더듬이를 지니고 자기 앞의 생에 직면하고자 할 때 생은 얼마간 고달프지만 또한 얼마나 찬란해지는가.”(198쪽)


내 앞의 생으로 오는 것들은 언제나 절박한 호흡으로 온다.” 아, 절창이다! 나는 이 한 문장 앞에서 참으로 오랫동안 영혼을 담그고, 아니 맡기고 머물렀다. 슬프도록 아름답다. 아름다이 슬프다. 이 절박한 호흡에 온 생명이 실려 있고 온 우주가 안겨 있지 않은가.


중생의 공포, 무지, 탐욕이 절박함을 몰고 온다, 왜곡하지 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의 근본은 바로 이 절박함이다. 절박함이야말로 생명에 대한 최고의 예의다. 절박함에서 놓여나는 일을 깨침이라, 열반이라 하지 마라. 그런 깨침, 그런 열반이라면 사양 억만 제곱이다. 그렇게 성취된 부처라면 단칼에 베어버릴 일이다.


절박함으로 “자기 앞의 생에 직면하고자 할 때 생은 얼마간 고달프지만 또한 얼마나 찬란해지는가.” 그렇다. 아니다. 고달프기에 찬란하다. 그러므로 더 고달프고 덜 찬란하더라도 인간인 한 절박한 호흡으로 자기 앞의 생에 직면해야 한다. 직면은 ‘여기’ 문제다. ‘저기’ 답, 아니다. 이 절박한 직면에 나 부끄러운 헌사 하나 바친다.


때로 절박함이

아무런 껴울림 없어

홀로 날숨으로

스러지는 삶 있으나

외로워하지 마라

어딘가

그 날숨 제 들숨으로 받아

일어서는 삶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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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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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대 앞에 앉은 사람들은 개개인이 모두 하나씩의 고유한 세계다. 화장대 앞에서 우리 모두가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 자기만족적이었으면 좋겠다. 여성이나 남성이나 마찬가지다. 혹자는 남성들이 점점 여성화되어 간다고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성들은 아직도 더 많이, 적극적으로 여성스러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지난 역사 속에서 과잉 축적되어온 남성성은 우리 모두를 얼마나 힘들게 해왔던가. 경쟁과 정복과 힘의 숭배로부터 벗어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기도가 날마다 멀리까지 번져갔으면 좋겠다. 더 섬세하고 더 나지막하게, 경쟁이 아니라 연대를, 힘에 의한 배타적 지배가 아니라 공존과 포용과 아름다움을 꿈꾸는 세계가 날마다 넓어졌으면 좋겠다. 저마다의 화장대에 앉아서 자유분방하게 아름다움을 사유하는 제의들이 날마다 넘쳤으면 좋겠다. 하나의 성 정체성으로 규정받아온 화장대가 양성구유였으면 좋겠고 개별자로서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화장대들이 일상이라는 꽃밭에 날마다 가득했으면 좋겠다.”(187-188쪽)


파르라니 면도한 뒤 날카롭고 강한 향기 풍기는 남성용 스킨로션을 얼굴에 바르고 손바닥으로 경쾌하게 두드리던 아버지 모습이 알 수 없는 부러움으로 쌓여가던 어린 시절의 기억. 도시 사내아이라면 누구한테나 있는 영상이지 싶다. 자라서 내 손으로 그 ‘아버지 화장품’을 사서 바르던 첫 날의 감회도 새롭고....... 그런데 느지막이 결혼하고 나서 얼마 뒤 나는 더 이상 남성용 화장품을 쓰지 않게 되었다.


처음엔 남성용 화장품을 무심코 사다주던 아내가 어느 날 우연히 내 피부를 살펴보더니 대뜸 여성용 화장품을 권했다. 지금까지 나는 아내가 쓰는 여성용 화장품을 같이 쓴다. 아내는 늘 내게 이것저것 다양한 피부 미용 방법과 화장품을 권한다. 나는 그 가운데 간단한 두세 가지 정도만 쓴다. 물론 여성적 방식으로. 20년 동안 이렇게 하고 있는데 이제는 오히려 남성용 화장품 냄새가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화장을 아내처럼 삶의 중요한 일부로 여겨 정중히(!) 대하지 못 한 게 사실이다. 아마도 화장은 여성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인습 때문일 것이다. 오늘 아침 출근 준비를 하다가 찬찬히 아내와 내가 함께 쓰는 화장대를 살펴보았다. 내가 썼다고 하기에는 내 손 탄 흔적이 엷다. 화장이 참으로 “자유분방하게 아름다움을 사유하는 제의”일진대 바야흐로 제. 의. 로서 내 삶에 자리 매겨야 할 때 아닐까.

 

아내와 나의 화장대


삶을 전체적으로 보면 나는 확실히 여느 남성에 비해 여성성이 농후하다. 지금 장년의 끄트머리에서 구태여 이 화장 문제를 내가 진지하게 사유하는 까닭은 醫者로서 내가 행하는 치유가 참으로 양성구유적인 것이 되려면 의학과 인문사회학적 지평을 넘어 예술적 차원, 즉 아름다움의 경지가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화장대 앞에 앉아 외연의 화장도 곡진하게, 내면의 사유도 간절하게,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아름다움은 필경 기품 있는 쾌락을 일으키는 것이니 화장대의 제의는 무엇보다 신나는 놀이가 될 터이다. 그 놀이는 곧 내 치유의 본질로 흘러들 것이다. 치유 행위 자체도 놀이고 치유 결과도 놀이다. 일과 놀이를 분리하는 엄숙주의자는 놀이를 건성건성 하는 무엇이라 업신여기지만 놀이야말로 순수 몰입 없이는 불가능하다. 순수 몰입의 놀이가 몰고 오는 순도 높은 쾌락은 마침내 거룩함에 가 닿고야 만다. 릴라(lîla)다. 다 이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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