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무슨 말이 내게로 건너오는지를 듣기 위해 참으로 진지하게 귀를 쫑긋하던 그 설렘과 떨림의 거리. 그만큼이 전화기라는 사물이 구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거리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그 쫑긋거림, 저편의 숨결까지 감지하고자 온몸을 기울이는 극진함이 살아 있는 세계. 문 저편이 침묵 중이라면 침묵의 언어를 극진한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사람의 말뿐 아니라 갖가지 사물과 동식물과 흙과 물의 말 앞에서도 좀 더 극진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몸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처럼 나무둥치 속에서도 물이 순환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그것이 나무의 말이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갖가지 사물들이 실은 너무도 풍성한 말을 거느린 언어의 마법사들이라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깨달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극진하게 들을 수 있는 낮은 무릎이 필요하다.” (237-238쪽)


전문서적 아닌 책 한 권을 가지고 이렇게 달여 읽은 적이 없다. 하기는 달이려고 읽은 것이니 그럴 밖에. 마지막 장을 읽던 중이었다. 읽다가 문득 “몸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을 느끼는 찰나 눈길 꽂힌 곳을 보니 책에 “꼬르륵”이라고 써 있다! 아.......물아일체. 아니, 이심전심.


이 작은 기적을 체험한 직후, 아니 그 결과, 나는 한바탕 펑펑 울고야 마는 사건과 마주했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다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물론 실체적 진실은 사회적 타살이지만, 고등학생의 유서 마지막 문장 을 본 것이다. 극진한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나 목말라 마지막까지 투정부려 미안한데 물 좀 줘...


아, 이 얼마나 외로운 목마름인가. 대체 얼마를 울다가 뛰어내렸던 것일까. 처절한 엄마 그리움 어찌 하고 저리도 황망히 갔을까. 눈두덩이 새빨개진 채 침을 놓고 돌아다니는데 연신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 아이 목마름의 절망이 내 목에 들어온 듯 울대가 뻑뻑하고 가슴이 아파온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말 끊어진 저승 넘어 그 아이 영혼이 지금 내게 와 오열하는 듯, 미소 지으며 등을 토닥이는 듯, 말끄러미 내 눈을 들여다보는 듯....... 나는 그 아이“침묵의 언어를 극진한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었으면”하는 비원(悲願)에서 “낮은 무릎”으로 이 하루를 보내려 한다. 이 어린 생명에 대한 예의로 오늘 이후 내 영혼의 휴대폰을 “무슨 말이 내게로 건너오는지를 듣기 위해 참으로 진지하게 귀를 쫑긋하던 그 설렘과 떨림의 거리”에 두기로 한다.


휴대폰, 특히 스마트폰이 사람 사이 시공을 너무 좁혀서 오히려 세상은 아득한 소외로 갈가리 찢어진다. 지체 없이 말을 섞을 수 있어서 마음이 가려진다. 검색만 하면 생면부지 타인 신상을 죄다 털 수 있어서 정작 가까운 사람에겐 무지하다. 침묵은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온갖 것을 부풀려 떠들어서 값 올리는 통에 인제 참된 가치란 찾아볼 수 없다. 인간 이외의 사물과 자연은 너무나 편리한 도구와 대상이어서 그들 내면의 풍성한 소리는 사라져버린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 아니 우리 삶의 극진함을 먹어버린 휴대폰을 김선우는 김선우답게 와삭! 먹어버린다고 꿈꾼다. 그 맛있는 상상력이야 ‘천하시인’ 김선우의 몫. 나는 홀연히 휴대폰을 잊는다. 완전히 잃어버려서 새로 산 경우는 없지만 잊을만하면(!) 잊어버리고 빈손으로 다닌다. 그 빈손은 다른 생명과 사물에 내가 귀를 쫑긋하고 있다는 증거일 터이니.......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