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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화장대 앞에 앉은 사람들은 개개인이 모두 하나씩의 고유한 세계다. 화장대 앞에서 우리 모두가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 자기만족적이었으면 좋겠다. 여성이나 남성이나 마찬가지다. 혹자는 남성들이 점점 여성화되어 간다고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성들은 아직도 더 많이, 적극적으로 여성스러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지난 역사 속에서 과잉 축적되어온 남성성은 우리 모두를 얼마나 힘들게 해왔던가. 경쟁과 정복과 힘의 숭배로부터 벗어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기도가 날마다 멀리까지 번져갔으면 좋겠다. 더 섬세하고 더 나지막하게, 경쟁이 아니라 연대를, 힘에 의한 배타적 지배가 아니라 공존과 포용과 아름다움을 꿈꾸는 세계가 날마다 넓어졌으면 좋겠다. 저마다의 화장대에 앉아서 자유분방하게 아름다움을 사유하는 제의들이 날마다 넘쳤으면 좋겠다. 하나의 성 정체성으로 규정받아온 화장대가 양성구유였으면 좋겠고 개별자로서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화장대들이 일상이라는 꽃밭에 날마다 가득했으면 좋겠다.”(187-188쪽)
파르라니 면도한 뒤 날카롭고 강한 향기 풍기는 남성용 스킨로션을 얼굴에 바르고 손바닥으로 경쾌하게 두드리던 아버지 모습이 알 수 없는 부러움으로 쌓여가던 어린 시절의 기억. 도시 사내아이라면 누구한테나 있는 영상이지 싶다. 자라서 내 손으로 그 ‘아버지 화장품’을 사서 바르던 첫 날의 감회도 새롭고....... 그런데 느지막이 결혼하고 나서 얼마 뒤 나는 더 이상 남성용 화장품을 쓰지 않게 되었다.
처음엔 남성용 화장품을 무심코 사다주던 아내가 어느 날 우연히 내 피부를 살펴보더니 대뜸 여성용 화장품을 권했다. 지금까지 나는 아내가 쓰는 여성용 화장품을 같이 쓴다. 아내는 늘 내게 이것저것 다양한 피부 미용 방법과 화장품을 권한다. 나는 그 가운데 간단한 두세 가지 정도만 쓴다. 물론 여성적 방식으로. 20년 동안 이렇게 하고 있는데 이제는 오히려 남성용 화장품 냄새가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화장을 아내처럼 삶의 중요한 일부로 여겨 정중히(!) 대하지 못 한 게 사실이다. 아마도 화장은 여성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인습 때문일 것이다. 오늘 아침 출근 준비를 하다가 찬찬히 아내와 내가 함께 쓰는 화장대를 살펴보았다. 내가 썼다고 하기에는 내 손 탄 흔적이 엷다. 화장이 참으로 “자유분방하게 아름다움을 사유하는 제의”일진대 바야흐로 제. 의. 로서 내 삶에 자리 매겨야 할 때 아닐까.
아내와 나의 화장대
삶을 전체적으로 보면 나는 확실히 여느 남성에 비해 여성성이 농후하다. 지금 장년의 끄트머리에서 구태여 이 화장 문제를 내가 진지하게 사유하는 까닭은 醫者로서 내가 행하는 치유가 참으로 양성구유적인 것이 되려면 의학과 인문사회학적 지평을 넘어 예술적 차원, 즉 아름다움의 경지가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화장대 앞에 앉아 외연의 화장도 곡진하게, 내면의 사유도 간절하게,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아름다움은 필경 기품 있는 쾌락을 일으키는 것이니 화장대의 제의는 무엇보다 신나는 놀이가 될 터이다. 그 놀이는 곧 내 치유의 본질로 흘러들 것이다. 치유 행위 자체도 놀이고 치유 결과도 놀이다. 일과 놀이를 분리하는 엄숙주의자는 놀이를 건성건성 하는 무엇이라 업신여기지만 놀이야말로 순수 몰입 없이는 불가능하다. 순수 몰입의 놀이가 몰고 오는 순도 높은 쾌락은 마침내 거룩함에 가 닿고야 만다. 릴라(lîla)다. 다 이룬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