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수의를 짓는 상상을 하다보면 뜻밖에도, 정말 잘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수의가 불러일으키는 죽음의 이미지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다. 수의에 내재한 미감은 마술처럼 지금 이 순간의 삶의 미감으로 삼투한다. 햇살 아래 수의를 거풍시키거나 매만진 다음 날, 다른 날보다 더 오래 공들여 장독을 닦거나 긴 산책을 하는 엄마를 보게 되는 것처럼, 아름다운 매듭을 위해 오늘 이 순간을 가장 충만하게 살라고 요구하는 어떤 목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는 속삭이듯, 간질이듯, 나의 내부 어딘가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다. 깨어 있어라. 매 순간, 가장 충만한 방식으로 깨어 있어라. 아름다운 무명옷을 입은 그 목소리는 뒤돌아보지 않으면서 글썽거리고, 손 내밀지 않으면서 이미 내 손을 잡고 있다.”(206쪽)


내 기억 속에는 두 벌의 수의가 있다. 할머니께서 손수 짠 베로 만드신 당신의 수의와 막내아들, 즉 내 아버지의 수의다. 당신의 수의를 손수 지으신 것은 의당 그렇다 치고 왜 하필 막내아들의 수의를 지어놓으셨던 것일까? 막내아들은 서른이 채 안 되어 이혼했다. 재혼에 다시 실패하여 두 번째 이혼하는 꼴을 보고 어머니로서 막내아들의 향후 인생을 직감하신 듯하다. 저 화상이 끝내 제 인생을 제 손으로 갈무리하지 못 하고 황천 강 건너겠구나. 어미 손을 타고야 말지. 결국 그 막내아들은 이혼 재혼을 여러 번 되풀이하며 배다른 자식들을 어린아이 밥알 흘리듯 남겨놓고 어머니가 지어놓으신 수의 품에 쓰러져 예순이 채 안 되어 황망히 저승으로 떠났다. 아이인 채 죽은 것이다.


이런 곡절의 흐름을 지켜 본 나이기에 수의를 생각하는 마음 길은 언제나 정갈하게 비질이 되어 있다. 자신과 인생에 대하여 곡진함으로 예의를 다한 사람이 손수 수의를 마련하는 것이다. 자신과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놓아줄 수 있는 사람만이 손수 수의를 마련하는 것이다. 아들이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집안과 모진 가난을 끌어안고 한 평생 결곡함을 잃지 않으신 할머니 같으신 분이 나지막이 구음 장단 내며 자신의 수의를 바느질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수의, 곧 죽음 옷은 내 삶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나는, 적어도 나는, 수의 앞에서 먼저 큰절을 올린다. 할머니와 그 삶에 표하는 경의다. 그리고 무릎 꿇어 앉는다. 아버지와 그 삶으로 나를 들여다보는 성찰이다.


깊은 호흡 하고 고요히 질문에 잠긴다. 너는 지금 수의를 지을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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