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흔적은 두렵다. 그것은 소리 높여 스스로를 외치지 않으면서도 생의 모든 방위에 질기게 스며 있는 것이다....... 어느....... 지도 위에 남아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생은 비밀이면서도 또한 숨길 수 없다. 어디에 무엇으로든 흔적이 남는다. 지도는 기억에 직결된 가장 강력한 흔적의 창고다.”(195-196쪽)


얼마 전 한 일간신문에 친 아버지한테 성폭행당한 상처의 고통을 호소하는 여성이 보낸 질문과 국민 멘토로 회자되고 있는 한 고수급 승려가 준 답변이 실렸다. ‘쾌도 상담’이란 멋진 타이틀 아래 그가 내린 ‘처방’의 골자는 이랬다.


“네가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니 떨치고 가서 감사하라.”


그 기사를 읽고 나는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이것은 법문이지 상담이 아니다. 법문은 도를 가르치는 것이지만 상담은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다. 가르침과 치유 사이의 다른 점을 무시하는 거야말로 空 망상이다.”


성폭행 당했다는 생각은 상(相)이다. 상은 헛되다. 헛것에 매달리지 말고 감사로써 흘려보내라. 맞는 말이다. 그러나 헛된 상이 평범한 중생의 심리적 현실에서 어떻게 절박한 문제인지, 얼마나 두려운 힘인지, 있는 그대로 헤아리지 않은 답변은 그 자체 또한 헛된 상이다. 실체가 아니라고 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상하다고 해서 실재가 nothing이 될 수는 없다. actual reality만 reality가 아니라 psychic reality도 reality다.


심리적 실재는 “소리 높여 스스로를 외치지 않으면서도 생의 모든 방위에 질기게 스며 있는”, 그래서 두려운, “흔적”의 부활이다. 실체가 아닌데 힘 있다. 아니, 실체가 아니어서 힘 있다. 이것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무시하는 자는 구름 위를 떠다니는 공관(空觀) 마니아에 지나지 않는다. 수시로 부활하는 흔적과 싸우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아픈 일인지 “공명”(196쪽)하지 못하는 자가 가르침이라면 몰라도 치유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구름 아래 있는 아픈 사람에게 구름 위의 진실을 냉큼 던져주는 것은 염장 지르기를 방편으로 쓰는 결과/해결 중심 사유에 터 잡은 남성 가부장적 대승불교가 전가의 보도로 쓰는 구도의 방식이다. 일리 있다. 그러나 이것은 따뜻한 보살핌을 기조로 하는 과정/문제 중심 사유에 터 잡은 여성 또는 모성적 치유와는 맞지 않다. 간화선적 깨달음이 모든 것을 통괄하고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그 깨달음으로 √2가 무리수임을 증명해보라.


더 빨리 어떤 목적지에 닿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해 지도를 펴 들게 된다면 서둘러 그 지도를 버려야 한다. 자기 앞의 생을 찾아가는 그 모든 과정들이 얼마나 애틋한지를 보여주는 징표로서의 지도는 ‘거기’를 꿈꾸게 할 뿐만 아니라 ‘여기’를 돌아보게 하는 아주 느린 흔적들의 집이기 때문이다.”(199쪽)


해답을 알고 있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자가, 두 점 사이에 직선 긋듯 하는 교설은 상에 갇힐 수밖에 없는 현실에 놓인 사람한테 성마름, 더 나아가 폭력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자기 앞의 생을 찾아가는 그 모든 과정들이 얼마나 애틋한지” 살피는 따스함, 어루만짐 없이 “‘거기’” “더 빨리 어떤 목적지에 닿기 위한 길을” 던지는 차가움, 도도함은 아픈 사람의 분노와 절망을 증폭시킨다.


어둠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해주어야 할 일은 함께 그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게 공명이며 공감이며 공유다. 한 생명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출발점이다. 빛을 가리키며 이끄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바로 이 순서가 생명의 순서다. 인간의 순서다. 붓다의 순서다. 중생의 고통과 함께 한다고 입만 열면 떠드는 이른바 깨친 자가 싸늘한 사실 부여잡고 죽비나 내려치고 있으면서 불도를 운위하다니 실로 가소로운 노릇이다.


이 가소로운 일들이 어찌하여 대승불교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그럼? 탈속적인 삶을 구가하는 깨친 자들의 여유, 긴, 길어도 너무 긴, 그래서 늘어진 호흡에서 그런 실패(!)가 나온다.


내 앞의 생으로 오는 것들은 언제나 절박한 호흡으로 온다. 자기 앞의 생에 ‘오버’란 없는 것이다.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내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내 앞의 문제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온 것이다. 내가 의식하고자 하지 않으면 그저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것이지만, 민감한 더듬이를 지니고 자기 앞의 생에 직면하고자 할 때 생은 얼마간 고달프지만 또한 얼마나 찬란해지는가.”(198쪽)


내 앞의 생으로 오는 것들은 언제나 절박한 호흡으로 온다.” 아, 절창이다! 나는 이 한 문장 앞에서 참으로 오랫동안 영혼을 담그고, 아니 맡기고 머물렀다. 슬프도록 아름답다. 아름다이 슬프다. 이 절박한 호흡에 온 생명이 실려 있고 온 우주가 안겨 있지 않은가.


중생의 공포, 무지, 탐욕이 절박함을 몰고 온다, 왜곡하지 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의 근본은 바로 이 절박함이다. 절박함이야말로 생명에 대한 최고의 예의다. 절박함에서 놓여나는 일을 깨침이라, 열반이라 하지 마라. 그런 깨침, 그런 열반이라면 사양 억만 제곱이다. 그렇게 성취된 부처라면 단칼에 베어버릴 일이다.


절박함으로 “자기 앞의 생에 직면하고자 할 때 생은 얼마간 고달프지만 또한 얼마나 찬란해지는가.” 그렇다. 아니다. 고달프기에 찬란하다. 그러므로 더 고달프고 덜 찬란하더라도 인간인 한 절박한 호흡으로 자기 앞의 생에 직면해야 한다. 직면은 ‘여기’ 문제다. ‘저기’ 답, 아니다. 이 절박한 직면에 나 부끄러운 헌사 하나 바친다.


때로 절박함이

아무런 껴울림 없어

홀로 날숨으로

스러지는 삶 있으나

외로워하지 마라

어딘가

그 날숨 제 들숨으로 받아

일어서는 삶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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