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사진기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을 전율과 설렘, 분노와 경악, 기쁨과 슬픔 같은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사진들이 있다. 케빈 카터의 <수단의 굶주린 소녀>를 볼 때도 그랬다. 기아와 내전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수단 남부로 들어가다가 굶주려 죽어가는 어린 소녀와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독수리를 향해 그의 사진기가 셔터를 열었다 닫았을 때, 사진기 내부의 어두운 방은 얼마나 깊은 슬픔으로 몸을 떨었을까? 순간의 빛이 보내온 정보를 자신의 몸에 아로새기는 동안, 사진기의 몸속을 떠다녔을 절망감과 흐느낌 같은 것이 사진 속에 묻어 있다.”(221쪽)

 

 

 


고백하거니와, 실은, 나도, 아니, 나, 는 사진기다. “나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을 전율과 설렘, 분노와 경악, 기쁨과 슬픔 같은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상담 언어들이 있다. “순간의 빛이 보내온 정보를 자신의 몸에 아로새기는 동안, 의 몸속을 떠다녔을 절망감과 흐느낌 같은 것이 상담 언어 속에 묻어 있다.” 그렇다. 나는 아픈 마음의 사진기다.


제대로 된 상담치유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각하는 바다. 상담은 경청에서 시작된다. 경청은 나를 내려놓고 남을 듣는 거다. 남의 분노, 남의 슬픔, 남의 절망을 내 몸 온전히 열어, 내 영혼 온전히 열어 듣는 거다. 온전히 열어 들으면 내 몸이, 내 영혼이 놀란다, 떤다, 운다, 분노한다, 절망한다, 설렌다, 웃는다....... 이것은, 실로, 감염이다. 그러면서,


감염을 넘어선다. 넘어서는 순간 두 개의 자력이 대칭적으로 작동한다. 하나는 고통 속에 있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달려가는 연대의 방향, 융합의 힘이다. 다른 하나는 고통에 처한 사람과 그를 둘러싼 삶의 조건 전체를 냉철히 살피고 비판하는 자율의 방향, 독립의 힘이다. 온전한 치유가 되려면 이 대칭의 근본구도는 늘 유지되어야 한다.


이 대칭은 매순간 자발적으로 깨지면서 비대칭의 대칭, 그 기우뚱한 균형으로서 생명의 숨길을 열어간다. 언제 어떤 변화가 올지 아무도 모른다. 누가 일방적으로 정할 문제가 아니다. 특히 밖에 서 있는 사람이 왈가왈부할 일은 더욱 아니다. 상담자가 깨어 있어 전체적 관점을 잃지 않으면서 순간마다 아름다운 선택이 가능하도록 도와야 한다.


실제 상담을 진행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이런 선택의 순간이다. 회심의 선택이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망설이고 망설인 선택이 결정타가 될 수도 있다. 혼신의 힘을 다한 환자가 졸지에 발길을 끊기도 한다. 데면데면 대한 환자가 시절인연이 되기도 한다. 꿈같은 말이긴 하지만 길은 하나다. 늘 절박한 호흡으로 가는 거다. 그렇지만,


.......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사진으로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지 삼 개월 후 케빈 카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진 발표 당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촬영보다 먼저 소녀를 도왔어야 했다는 비판이 그의 자살과 얼마나 연관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구도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고통 앞에 함부로 돌멩이를 던질 수는 없는 것이다. 고통의 현장으로 스스로를 몰고 간 이들의 작업으로 인해 보이지 않던 진실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고 연대와 보호의 실천이 시작되곤 하므로.”(221쪽)


그 현실에 내재한 ‘진실’은 본인을 제외한 상태라면 누구도 알지 못 한다. 알지 못 하는 상태에서 이른바 ‘사실’에 터 잡아 바른 말이랍시고 해댄 결과가 한 사람, 더군다나 감추어진 진실 속의 본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면 이것은 명백히 문제가 있다. 어떤 순간이든, 그가 누구든, 자기 “....... 앞의 생으로 오는 것들은 언제나 절박한 호흡으로 온다.”(198쪽)


설혹 일부 언론이 보도하듯 케빈 카터가 퓰리처상에 ‘필 꽂혀’ 소녀의 생명을 잠시 등한히 했다 하자. 그러나 그는 전쟁과 기아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고통의 현장으로 스스로를 몰고 간” 사람이다. 그의 “작업으로 인해 보이지 않던 진실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고 연대와 보호의 실천이” 시작되었다. 한 마디 말로 단언할 수 없는 진실의 모순이 있다.


상담의 찰나마다 나는 이런 모순, 그 이율배반 앞에서 모골이 송연해진다. 마음 아픈 사람들과 나누는 치유적진실의 도구가 말이니 말이다.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내 말로 치유 받고 나를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이 여럿 있다. 하지만 똑 같은 내 말에 상처 입고 쓰러진 사람 또한 여럿 있지 않을 것인가? 화급히 심장에 손을 얹는다. 아앗(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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