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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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시자들과 SS대원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평균적 인간이었고, 평균적 지능을 가졌으며, 평균적으로 악한 사람들이었다.·······그들은 괴물이 아니었으며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교육을 받았다.·······모두가 크든 작든 책임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독일 국민들 대다수는 정신적 나태함 때문에, 근시안적 타산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국민적 자부심 때문에 애초에 히틀러 대장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였다. 히틀러에게 행운이 따른 동안에 그를 추종했고 아무런 가책 없이 그를 지지했다. 그러다 히틀러의 파멸이 그들을 휩쓸어버렸고, 그들은 죽음과 비참함, 회한으로 괴로워하다가 몇 년 뒤 부도덕한 정치놀음의 결과로 재활했다. 바로 그런 독일 국민들 대다수의 책임도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251-252쪽)

 

대한민국 헌법의 시작은 이렇게 장엄합니다.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선출한 국가 원수 및 대표에 의하여 국정이 운영되는 나라인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이 요즘처럼 섬뜩하면서도 우습게 다가온 때가 일찍이 없었습니다.

 

섬뜩한 까닭은 이리 장엄하게 선언하고도 일거에 헌법조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어두운 힘이 엄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스운 까닭은 헌법의 선두에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민民’의 무게가 이 조문을 전혀 감당하지 못한 채 산산이 부서져 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손으로 세운 권력이 주인 행세를 하는데도 종 취급당하는 민이 속수무책인 이 민주공화국은 대체 어떤 민주공화국입니까. 종 취급당하면서도 요지부동인 민은 "정신적 나태함 때문에, 근시안적 타산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국민적 자부심 때문에" "애초에" 이 반 헌법 세력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였"으며 "추종했고 아무런 가책 없이·······지지했"던 것입니까. 적어도 결과만 놓고 보면, 작금의 현상만 놓고 보면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선거 때만 주권자라 하더라도 이렇게 제 발등을 찍고도 괴괴하기만 하니 여기에 대한 책임 문제가 불거질 때도 미상불 아무 생각 없이 나태함으로 또는 타산으로 또는 어리석음으로 또는 자부심으로 눙치며 지나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주권자로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지켜 나아가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상위 1%가 악의를 가지고 구사하는 전략전술에 “평균적 지능을 가졌으며, 평균적으로 악한” “평균적 인간”이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가히 필연에 가까울 것입니다. “평균”을 가지고 저들과 맞서는 것 또한 필연이니 의당 어려움을 견뎌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 까요? 프리모 레비를 따라 ‘나머지’ 99%의 약한 고리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에서 실마리를 풀어보겠습니다.

 

[정신적 나태함, 국민적 자부심] 얼핏 이 둘은 상치되는 정신적 가치처럼 보입니다. 발맘발맘 따져 가면 이 둘은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납니다. 거기에 이르려면 의학적 안목이 필요합니다. 나태함의 사전적인 뜻은 게으르고 느림이지만 이는 전형적인 우울증상입니다. 우울증의 본령인 자기신뢰 결핍으로 말미암아 망설이고 미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부심은 자기신뢰와 동의어가 아닙니다. 반의어입니다. 자기신뢰가 무너진 사람이 맞은편에 세워놓은 허구적·이상적 자아에 걸어놓는 애착입니다. 이 또한 우울증의 신랄한 증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렇게 만나는 이 둘은 공포·불안에 대한 자기 파괴, 그러니까 자기를 죽여 가는 병리적 반응입니다. 불의한 권력이 전천후로 일으키는 공포·불안의 실체를 직면하지 않으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99%의 문제입니다.

 

[근시안적 타산] 이것은 잘 알다시피 알량한 탐욕입니다. 불의한 권력은 99%를 공포·불안으로 뒤흔드는 전 과정에 교묘히 서푼도 안 되는 떡고물을 매복시켜 놓습니다. 때로는 장밋빛 약속으로. 때로는 확실한 현찰로. 때로는 눈물겨운 보상으로. 이 매복에 걸리면 아무 생각 없이 행복한 돼지를 즐길 수 있습니다. 돈이 가져다주는 편리함, 가족을 보고 느끼는 뿌듯함, 남 앞에서 세워지는 ‘폼’에 중독되기 때문입니다. 중독은 옆에서 누가 죽어가도 관심 없어지게 만들어줍니다. 신경 거슬리는 자는 ‘근본 없는 것 따위’로 무시해버리면 그만입니다. 사회고 역사고 말짱 부질없는 것입니다. 일단 오늘 나만 살면 그만입니다. 전후좌우 따지지 않고 떡밥에 낚시 덜컥 무는 단세포적 탐욕의 실체를 직면하지 않으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99%의 문제입니다.

 

[어리석음] 이에 대한 긴 설명은 도리어 사족일 것입니다. 진실에 대한 무지입니다. 불의한 권력이 던져주는 거짓 정보만 가지고 세계는 투명하다 믿는 맹목입니다. 불의한 권력은 교육과 언론을 통제함으로써 불투명성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진실들을 유언비어로 몰아 죽입니다. 권력은 신비화됩니다. 권력의 정상은 초월적 권위를 획득합니다. 사이비종교의 교주에게 꿇어 엎드린 자처럼 스스로가 얼마나 어떻게 무지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는지 직면하지 않으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99%의 문제입니다.

 

위 셋은 99%의 약한 고리이므로 불의한 권력의 무기가 됩니다. 99%가 절대 불리합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영웅적 용기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멈칫거리면서 나아가는 “평균적” 용기만으로 감사합니다. 연대가 필요합니다. 위대한 통일전선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손잡고 함께 나아가는 “평균적” 연대만으로 감사합니다. 각성이 필요합니다. 고결한 경지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런가, 질문하는 “평균적” 각성만으로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평균적” 용기와 “평균적” 연대와 “평균적” 각성만으로도 99%는 저 사악한 “대장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장의 “파멸이 그들을 휩쓸어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죽음과 비참함, 회한으로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부도덕한 정치놀음의 결과로 재활”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 프리모 레비에 기댄 지금-여기의 성찰은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였습니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프리모 레비는 우리 앞에 결곡한 모습으로 앉아 있습니다. 히틀러 대장을 따랐던 독일 국민에게 아우슈비츠의 책임을 묻는 바로 그 음성으로 오늘 박근혜 대장을 따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세월호의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잊으면 안 됩니다. “평균적” 용기. “평균적” 연대. “평균적”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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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으로부터는 폭력이 나올 뿐이다.·······히틀러의 독일에서 지배적이었던 바로 그 폭력에서 갈라져 나오는 오늘날의 폭력의 계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절망에 빠진 유대인 생존자들은 거대한 난파 후 유럽에서 도피하여 아랍 세계의 내부에 서구 문명의 섬을, 즉 유대주의의 경이로운 부흥을 만들어냈고, 한편으로는 또 다른 증오의 구실을 만들어냈다.(249-250쪽)

 

오늘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원주민에게 가하는 무자비한 폭력을 보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자신들이 나치한테 그렇게 처절하게 당했으면서 어떻게 그와 똑같은 짓을 하는가, 나치와 다른 게 뭔가?”

 

이 질문의 연장선에서 프리모 레비의 글을 데면데면하게 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주위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되묻습니다.

 

“일제가 우리한테 가한 잔혹한 폭력을 비판하는 입으로 어찌 우리가 베트남에 가한 잔혹한 폭력은 모르쇠 하는가?”

 

이런 식의 주고받음은 사실상 무한히 계속되는 순환논법의 한 토막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범죄를 저지른다고 해서 나치가 유대인에게 저지른 범죄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베트남에게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일제가 우리에게 저지른 범죄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악무한의 고리를 누가, 어떻게 끊느냐, 에 초점을 맞추어야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문제를 풀려면 문제의 실재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일까요?

 

우리 속담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매운 시집살이한 며느리가 매운 시어미 된다.”

 

좀 더 보편적인 버전은 이것입니다.

 

“흉보면서 배운다.”

 

좋지 않은 것인 줄 알면서 모방하게 되는 현상을 맛깔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 말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습관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학습이 되는 것에 대한 경험적 통찰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국가적 차원에서도 이런 설명이 가능할까요?

 

프리모 레비는 “폭력의 계보”라는 용어에 터하여 “가르쳐주었다”(250쪽) “배웠다”(249쪽)라는 교육적 관계로 설명하였습니다. 이는 폭력이 의도적·계획적·체계적으로 전수되어가는 기술이며 문명임을 간파하였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폭력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권력 집단의 탐욕이 작동하며 그것은 반드시 자기 조직적으로 체계화되고 공유되고 계승되기 마련임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통찰은 마지막 지점을 관통합니다.

 

절망에 빠진 유대인 생존자들은 거대한 난파 후 유럽에서 도피하여 아랍 세계의 내부에 서구 문명의 섬을, 즉 유대주의의 경이로운 부흥을 만들어냈고, 한편으로는 또 다른 증오의 구실을 만들어냈다.

 

이 부분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모순성에 대한 고찰이 분명히 들어 있으나 기우뚱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듯 개운치 않기 때문입니다. 프리모 레비가 그 동안 여러 차례 진행된 중동전쟁을 몰랐을 리 없고, 그 전쟁의 성격이 무엇인지 몰랐을 리 없는데, 이스라엘의 건국은 “유대주의의 경이로운 부흥”이라고 명쾌하게 묘사하면서 전쟁은 “또 다른 증오의 구실”이라고 모호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세부 사항에 대한 근거 없는, 그러니까 프리모 레비의 정확한 견해를 모르는 상태에서의 쟁점화보다 문맥이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더 핵심적인 사항, 그러니까 나치가 인류역사에서 새로이 열어젖힌 “폭력의 계보”에 이스라엘의 폭력을 분명히 포함시켰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리모 레비로서는 당혹스럽고 심지어 부정하고 싶은 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가해자가 폭력의 메커니즘을 피해자에게 “가르쳐주었”으며,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그것을 “배웠”습니다. 이보다 더한 희극은 다시없습니다. 이보다 더한 비극은 다시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단언합니다.

 

폭력으로부터는 폭력이 나올 뿐이다.

 

폭력을 막는 폭력은 없습니다. 여기서 ‘폭력을 막겠다.’는 말은 ‘내 탐욕을 채우겠다.’는 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폭력 자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폭력을 포기하는 것은 그러므로 탐욕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탐욕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 존재와 삶 자체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 없이는 불가능한 결단입니다. 탐욕은 집중된 권력에 의해 자기조직화하기 때문에 네트워크로 평등하게 분산된 관계-권력으로 공존을 조직화하는 길만이 답입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신자유주의와 결합한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길입니다. 이 거대담론은 제 힘에 부치는 이야기입니다. 의학 이야기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이른바 베르테르효과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흔히 모방 자살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배워서 자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가해자한테 피해자가 배워서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희-비극보다 더 기막힌 일입니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거두는 사람한테서 그 마음을 스스로 배워 자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거둔다니 말입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단도직입으로 저는 이것을 상처의 감염이라 합니다. 몸의 병만 감염이 일어나는 것 아닙니다. 교과서적 서구의학을 한 사람에겐 터무니없는 말로 들릴 테지만 우울장애도 감염이 됩니다. 특별히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 지경까지 이른 경우는 그야말로 관통상의 감염입니다. 이를 비유, 그러니까 은유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 비유라 한다면 베르테르효과라는 이름은 얼마나 더 비유적인 것입니까. 무엇보다 아무리 과학이라 하더라도 언어적 표현은 궁극적으로는 비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 전달의 과정이 질병 차원의 침습이지 건강한 자발성에서 일어난 학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울장애 앓던 연예인이 자살한 뒤를 따라 비연예인이 자살하는 것은 의학적 치료, 그 너머 인문적 치유의 지평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에게 폭행당하며 자란 아이는 대부분 커서 자기 자식한테 똑같은 폭력을 행사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근본 조건인 탐욕 문제가 개입되어 있음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감염이 본질입니다. 치료/치유가 필요한 문제입니다. 치료/치유의 관점 또한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국가, 그리고 세계·문명의 차원으로 확대하여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어느 사회보다 폭력이 공공화해 있는 대한민국의 경우는 정말 심각한 상황입니다. 권력 최상층부의 ‘갑질’은 무한 연쇄의 ‘갑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갑질’은 동물에게도 심지어 땅과 물에게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 수천 명을 부당 해고함으로써 26명의 사람을 죽이고도 변하지 않고, 250명의 아이들을 배에 가두어 빠뜨려 죽이고도 변하지 않는 이 악마적 ‘갑질’ 또한 아우슈비츠에서 배워온 것일진대, 이 땅의 압제자들 책상 위에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놓여 있을진대, 바야흐로 99%의 을이 스스로 100%(서동진의 「변증법의 낮잠」)라고 선포해야 할 때가 아닐까요. 저는 그 바람 속에서 묵묵히 치료/치유로써 이바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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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 필요하다는 추악한 이야기가 있었다. 인간은 갈등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함정이 있고 수상쩍은 이야기들이다. 악마는 필요치 않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전쟁과 폭력은 필요치 않다. 선의와 상호 신뢰가 있다면, 탁자에 둘러앉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248-249쪽)

 

제 선친은 몇 가지 특이한,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괴이한 신념을 지녔던 분이었습니다. 자식은 반드시 때려서 키워야 한다는 소신이 그중 하나입니다. 해마다 봄이면 낫을 파르라니 갈아들고 산에 오릅니다. 하루 종일 싸리나무 덤불을 뒤져 당신의 새끼손가락 굵기의 매를 만듭니다. 수백 개의 매를 가져와 응달에 말립니다. 때릴 때에는 미리 물에 불려둡니다. 그 많은 매들은 이듬해 봄이 오기 훨씬 이전에 사라지고 맙니다. 매가 없으면 손과 발이 그것을 대신했음은 물론입니다.

 

자식을 때리기 위해 싸리나무를 낫으로 베면서, 응달에 말리면서, 물에 불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또한 아비가 되고 이순耳順이 된 오늘까지도 짐작이 잘 가지 않습니다. 체벌(폭력)이 사랑의 방법이라고 굳게 믿을 수는 있으되 그러면 어찌하여 대화는 그 굳은 믿음에 포함시키지 않았을까요. 매를 만드는 정성으로 “탁자”를 만들 수는 정녕 없었던 것일까요.

 

어찌 제 선친뿐이겠습니까. 인간이 탁자보다는 매 만드는 쪽으로 더 기울어진 진화를 해왔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게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구적 지식은 과대 진화하고 윤리적 지혜는 과소 진화했음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죽임의 기술에 비해 살림의 솜씨는 얼마나 누추합니까. 강고한 살해의 시스템에 비해 공생의 커뮤니티는 얼마나 허술합니까. 이런 진화를 이제 거절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진화와 맺은 인연을 저주로 마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화란 말이 귀에 거슬리는 사람한테는 신의 창조와 섭리에 이와 동일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거절”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는 명백한 대상의 존재를 전제로 합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악마

 

그렇습니다. 진화의 선택, 그 끝에는 악마가 된 인간이 ‘낫’을 들고 서 있습니다. 악마는 그 ‘낫’으로 다듬어 아우슈비츠를 만들었습니다. 악마는 그 ‘낫’으로 걸어 당겨 세월호를 뒤집었습니다. 악마는 그 ‘낫’으로 국기문란을 벤다더니 국민을 베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악마는 필요치 않다.

 

우리가 남겨두어야 할, 또는 복구해야 할 것은 “선의”이며 “상호 신뢰”입니다. 함께 느끼는 온기입니다. 공존의 알아차림입니다. 상생의 의지입니다. 파괴의 규모는 전 지구적이고 멸절의 범위가 전 인류적인 지금 나라와 백성을 팔아 제 곳간을 채우는 자들의 악의와 상호 불신을 그대로 두고서야 어찌 이 생명공동체를 온전히 지킬 수 있겠습니까. 모두 제 인연에 맞는 “탁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탁자”를 잇대어 놓아야 합니다. 잇닿아 있는 “탁자” 앞에 “둘러앉아”야 합니다. “둘러앉아” “선의”로 “상호 신뢰”로 대화해야 합니다. 대화로 연대의 삶을 열어야 합니다. 그렇게 연 연대의 삶으로 기어이 장엄한 날을 맞아야 합니다. 원통히 죽어간 저 생떼 같은 목숨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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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 집단적·근본적으로 중요하고 예기치 못한 사건의 증인이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기 때문에,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 사건은 모든 예상을 뒤엎고 일어났다. 이것은·······그러나·······복종을 이끌어냈고, 파국이 닥칠 때까지 칭송되었다. 사건은 일어났고 따라서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이다.

  ·······불관용과 권력에 대한 욕망, 경제적 이유,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광신, 인종적 마찰 등이 발생시키는 폭력이 난무하는 조류 속에서 미래에 면역성이 있다고 보장할 수 있는 나라는 소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벼리고 있어야 하며 예언자들과 마법사들, 또한 타당한 이유들의 밑받침이 없는 “아름다운 말들”을 말하고 쓰는 사람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247-248쪽)

 

 

오늘 우리에게 느닷없이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이것을 과연 누구 이야기로 들을 수밖에 없을까요?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 집단적·근본적으로 중요하고 예기치 못한 사건의 증인이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기 때문에,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 사건은 모든 예상을 뒤엎고 일어났다.

 

구태여 대답할 필요조차 없이 자명합니다. 문제는 모르는 채, 아니 모르는 체 한 채, “불관용과 권력에 대한 욕망, 경제적 이유,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광신·······등이 발생시키는 폭력이 난무하는 조류 속에서” “타당한 이유들의 밑받침이 없는 “아름다운 말들”을 말하고 쓰는 사람들을 믿”는 자들이 알고도 속수무책인 사람들을 제압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저들은 거짓말과 폭력으로 공포에 떠는 이웃의 “복종을 이끌어냈고” 자신의 주인을 “칭송”하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저들은 이 파렴치한 짓을 앞으로도 강고하게 계속할 것입니다.

 

파국이 닥칠 때까지”!

 

파국은 그러면 언제 닥칠까요? 우리가 “우리의 감각을 벼리고” 그 감각을 용기로 달여 내지 못하는 한 파국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은 언제라도 “모든 예상을 뒤엎고” “또다시” 사건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각의 날은 기억의 숫돌로 갈아서 벼립니다. 기억을 찰나마다 갱신해야 합니다. 찰나마다 새로워지는 기억이 벼려 내는 감각에서 무서움과 두려움을 끌어안고 칠흑의 바다, 저 진실의 심연으로 한 걸음 내디디는 용기가 우러날 것입니다. 침묵 아니면 막말로 일관하는 '야차'에게 닥치는 파국은 깨어서 행동하는 '사람'이 열어젖히는 새벽과 동의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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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편지를 보내온 40명의 독일인들에게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이 페이지들을 바친다. 이들은(내가 앞서 인용한 T. H. 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첫 번째(기분 좋은-인용자)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222-223쪽)

 

<L. I. 의 편지> ·······당신은 우리 독일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스스로도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우리가 한 일을 우리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때 당신은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유죄입니다.·······(223쪽)

 

·······내 책이 독일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내 책을 읽을 필요가 덜한 독일인들 사이에서였다·······. 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 없는 사람들이 내게 뉘우치는 편지들을 내게 보내왔던 것이다. 죄인들은 당연히 침묵했다.(237쪽)

 

마음병 치유 과정에서 가장 힘든 고비 가운데 하나는 아픈 사람이 먼저 상처 입힌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단계입니다. 아픈 사람이 상처 입힌 사람과 일상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경우 이 문제는 당연히 매우 결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용서라는 지고의 지점에 이르기 전에 무수히 시선, 언어, 행위를 주고받아야 하는 구체적인 상황을 어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치유하는 사람 처지에서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왜 그래야 하는지 아픈 사람이 공감·수긍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풀어내주는 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가해가 계속되고 있거나 가해자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피해자가 감정을 조절하고 일상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것 자체가 억울한 일일 뿐만 아니라 상처를 증폭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공감·수긍하고 실천하기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이 경우 제가 하는 말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손을 내미는 것이 치유 세계의 진실입니다.”

 

마음병 치유의 본질에는 반드시 앎, 그러니까 깨달음이 포함됩니다. 깨달음이 치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깨달음 없는 치유는 없습니다. 깨달음은 진실의 문제입니다. 진실은 결국 내 마음에 역설을 담아내는 일입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 없는 사람들이 내게 뉘우치는 편지들을 내게 보내왔던 것이다.

 

죄가 없는데, 그럼에도, 뉘우친다, 그러니까 사죄를 한다는 말입니다. 아니 도저하게 말한다면 죄가 없으므로 사죄한다는 것입니다. 이 역설이 세계의 진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 깨달은 사람이 손을 내민다는 것의 윤리적·정치적 버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죄가 없으므로 뉘우친다, 상처 입었으므로 손 내민다는 것은 인간이 사적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공적인 인격, 공적인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공공성의 지평으로 펼쳐져 간다는 것입니다. 광활함spaciousness, 그러니까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영성, 불교식으로 말하면 불성의 세계로 번져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졌습니다. 싯다르타는 왕위를 버렸습니다. 사적인 자아에 갇혀 어둠만 들여다보거나 어둠을 한사코 부인하면 병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적인 자아에 갇혀 제 손에 피 묻지 않은 것만 보면 자기 존재가 터하고 있는 공동체의 부도덕함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월호사건 일어나자 대통령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호통 치는 자들이 결국은 판을 따냈습니다. 대통령이 배를 뒤집었느냐, 아이들한테 가만히 있으라 했느냐, “따위”의 여부를 가지고 판단할 문제가 아님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저들은 파렴치하게 본질을 호도했습니다. 대통령은 이 나라 최고 헌법기관입니다. 주권자인 국민 수백 명이 한꺼번에 죽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러면 그 책임을, 그 죄를 누가 져야 한다는 말입니까. 대통령을 모독하는 것은 곧 국가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말할 줄은 알면서, 어찌 고작 유병언 “따위”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손을 씻는다는 말인가요. 히틀러가 저지른 죄에 대하여 평범한 시민이 이렇게 고백한 것을 저들은 어찌 들을까요.

 

우리는 유죄입니다.

 

저들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타인에게도 그 침묵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프리모 레비의 이 말은 저들이 어떻게 들을까요.

 

죄인들은 당연히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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