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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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시자들과 SS대원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평균적 인간이었고, 평균적 지능을 가졌으며, 평균적으로 악한 사람들이었다.·······그들은 괴물이 아니었으며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교육을 받았다.·······모두가 크든 작든 책임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독일 국민들 대다수는 정신적 나태함 때문에, 근시안적 타산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국민적 자부심 때문에 애초에 히틀러 대장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였다. 히틀러에게 행운이 따른 동안에 그를 추종했고 아무런 가책 없이 그를 지지했다. 그러다 히틀러의 파멸이 그들을 휩쓸어버렸고, 그들은 죽음과 비참함, 회한으로 괴로워하다가 몇 년 뒤 부도덕한 정치놀음의 결과로 재활했다. 바로 그런 독일 국민들 대다수의 책임도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251-252쪽)

 

대한민국 헌법의 시작은 이렇게 장엄합니다.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선출한 국가 원수 및 대표에 의하여 국정이 운영되는 나라인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이 요즘처럼 섬뜩하면서도 우습게 다가온 때가 일찍이 없었습니다.

 

섬뜩한 까닭은 이리 장엄하게 선언하고도 일거에 헌법조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어두운 힘이 엄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스운 까닭은 헌법의 선두에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민民’의 무게가 이 조문을 전혀 감당하지 못한 채 산산이 부서져 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손으로 세운 권력이 주인 행세를 하는데도 종 취급당하는 민이 속수무책인 이 민주공화국은 대체 어떤 민주공화국입니까. 종 취급당하면서도 요지부동인 민은 "정신적 나태함 때문에, 근시안적 타산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국민적 자부심 때문에" "애초에" 이 반 헌법 세력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였"으며 "추종했고 아무런 가책 없이·······지지했"던 것입니까. 적어도 결과만 놓고 보면, 작금의 현상만 놓고 보면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선거 때만 주권자라 하더라도 이렇게 제 발등을 찍고도 괴괴하기만 하니 여기에 대한 책임 문제가 불거질 때도 미상불 아무 생각 없이 나태함으로 또는 타산으로 또는 어리석음으로 또는 자부심으로 눙치며 지나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주권자로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지켜 나아가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상위 1%가 악의를 가지고 구사하는 전략전술에 “평균적 지능을 가졌으며, 평균적으로 악한” “평균적 인간”이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가히 필연에 가까울 것입니다. “평균”을 가지고 저들과 맞서는 것 또한 필연이니 의당 어려움을 견뎌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 까요? 프리모 레비를 따라 ‘나머지’ 99%의 약한 고리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에서 실마리를 풀어보겠습니다.

 

[정신적 나태함, 국민적 자부심] 얼핏 이 둘은 상치되는 정신적 가치처럼 보입니다. 발맘발맘 따져 가면 이 둘은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납니다. 거기에 이르려면 의학적 안목이 필요합니다. 나태함의 사전적인 뜻은 게으르고 느림이지만 이는 전형적인 우울증상입니다. 우울증의 본령인 자기신뢰 결핍으로 말미암아 망설이고 미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부심은 자기신뢰와 동의어가 아닙니다. 반의어입니다. 자기신뢰가 무너진 사람이 맞은편에 세워놓은 허구적·이상적 자아에 걸어놓는 애착입니다. 이 또한 우울증의 신랄한 증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렇게 만나는 이 둘은 공포·불안에 대한 자기 파괴, 그러니까 자기를 죽여 가는 병리적 반응입니다. 불의한 권력이 전천후로 일으키는 공포·불안의 실체를 직면하지 않으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99%의 문제입니다.

 

[근시안적 타산] 이것은 잘 알다시피 알량한 탐욕입니다. 불의한 권력은 99%를 공포·불안으로 뒤흔드는 전 과정에 교묘히 서푼도 안 되는 떡고물을 매복시켜 놓습니다. 때로는 장밋빛 약속으로. 때로는 확실한 현찰로. 때로는 눈물겨운 보상으로. 이 매복에 걸리면 아무 생각 없이 행복한 돼지를 즐길 수 있습니다. 돈이 가져다주는 편리함, 가족을 보고 느끼는 뿌듯함, 남 앞에서 세워지는 ‘폼’에 중독되기 때문입니다. 중독은 옆에서 누가 죽어가도 관심 없어지게 만들어줍니다. 신경 거슬리는 자는 ‘근본 없는 것 따위’로 무시해버리면 그만입니다. 사회고 역사고 말짱 부질없는 것입니다. 일단 오늘 나만 살면 그만입니다. 전후좌우 따지지 않고 떡밥에 낚시 덜컥 무는 단세포적 탐욕의 실체를 직면하지 않으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99%의 문제입니다.

 

[어리석음] 이에 대한 긴 설명은 도리어 사족일 것입니다. 진실에 대한 무지입니다. 불의한 권력이 던져주는 거짓 정보만 가지고 세계는 투명하다 믿는 맹목입니다. 불의한 권력은 교육과 언론을 통제함으로써 불투명성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진실들을 유언비어로 몰아 죽입니다. 권력은 신비화됩니다. 권력의 정상은 초월적 권위를 획득합니다. 사이비종교의 교주에게 꿇어 엎드린 자처럼 스스로가 얼마나 어떻게 무지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는지 직면하지 않으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99%의 문제입니다.

 

위 셋은 99%의 약한 고리이므로 불의한 권력의 무기가 됩니다. 99%가 절대 불리합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영웅적 용기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멈칫거리면서 나아가는 “평균적” 용기만으로 감사합니다. 연대가 필요합니다. 위대한 통일전선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손잡고 함께 나아가는 “평균적” 연대만으로 감사합니다. 각성이 필요합니다. 고결한 경지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런가, 질문하는 “평균적” 각성만으로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평균적” 용기와 “평균적” 연대와 “평균적” 각성만으로도 99%는 저 사악한 “대장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장의 “파멸이 그들을 휩쓸어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죽음과 비참함, 회한으로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부도덕한 정치놀음의 결과로 재활”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 프리모 레비에 기댄 지금-여기의 성찰은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였습니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프리모 레비는 우리 앞에 결곡한 모습으로 앉아 있습니다. 히틀러 대장을 따랐던 독일 국민에게 아우슈비츠의 책임을 묻는 바로 그 음성으로 오늘 박근혜 대장을 따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세월호의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잊으면 안 됩니다. “평균적” 용기. “평균적” 연대. “평균적”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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