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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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편지를 보내온 40명의 독일인들에게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이 페이지들을 바친다. 이들은(내가 앞서 인용한 T. H. 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첫 번째(기분 좋은-인용자)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222-223쪽)

 

<L. I. 의 편지> ·······당신은 우리 독일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스스로도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우리가 한 일을 우리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때 당신은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유죄입니다.·······(223쪽)

 

·······내 책이 독일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내 책을 읽을 필요가 덜한 독일인들 사이에서였다·······. 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 없는 사람들이 내게 뉘우치는 편지들을 내게 보내왔던 것이다. 죄인들은 당연히 침묵했다.(237쪽)

 

마음병 치유 과정에서 가장 힘든 고비 가운데 하나는 아픈 사람이 먼저 상처 입힌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단계입니다. 아픈 사람이 상처 입힌 사람과 일상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경우 이 문제는 당연히 매우 결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용서라는 지고의 지점에 이르기 전에 무수히 시선, 언어, 행위를 주고받아야 하는 구체적인 상황을 어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치유하는 사람 처지에서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왜 그래야 하는지 아픈 사람이 공감·수긍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풀어내주는 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가해가 계속되고 있거나 가해자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피해자가 감정을 조절하고 일상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것 자체가 억울한 일일 뿐만 아니라 상처를 증폭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공감·수긍하고 실천하기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이 경우 제가 하는 말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손을 내미는 것이 치유 세계의 진실입니다.”

 

마음병 치유의 본질에는 반드시 앎, 그러니까 깨달음이 포함됩니다. 깨달음이 치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깨달음 없는 치유는 없습니다. 깨달음은 진실의 문제입니다. 진실은 결국 내 마음에 역설을 담아내는 일입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 없는 사람들이 내게 뉘우치는 편지들을 내게 보내왔던 것이다.

 

죄가 없는데, 그럼에도, 뉘우친다, 그러니까 사죄를 한다는 말입니다. 아니 도저하게 말한다면 죄가 없으므로 사죄한다는 것입니다. 이 역설이 세계의 진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 깨달은 사람이 손을 내민다는 것의 윤리적·정치적 버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죄가 없으므로 뉘우친다, 상처 입었으므로 손 내민다는 것은 인간이 사적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공적인 인격, 공적인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공공성의 지평으로 펼쳐져 간다는 것입니다. 광활함spaciousness, 그러니까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영성, 불교식으로 말하면 불성의 세계로 번져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졌습니다. 싯다르타는 왕위를 버렸습니다. 사적인 자아에 갇혀 어둠만 들여다보거나 어둠을 한사코 부인하면 병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적인 자아에 갇혀 제 손에 피 묻지 않은 것만 보면 자기 존재가 터하고 있는 공동체의 부도덕함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월호사건 일어나자 대통령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호통 치는 자들이 결국은 판을 따냈습니다. 대통령이 배를 뒤집었느냐, 아이들한테 가만히 있으라 했느냐, “따위”의 여부를 가지고 판단할 문제가 아님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저들은 파렴치하게 본질을 호도했습니다. 대통령은 이 나라 최고 헌법기관입니다. 주권자인 국민 수백 명이 한꺼번에 죽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러면 그 책임을, 그 죄를 누가 져야 한다는 말입니까. 대통령을 모독하는 것은 곧 국가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말할 줄은 알면서, 어찌 고작 유병언 “따위”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손을 씻는다는 말인가요. 히틀러가 저지른 죄에 대하여 평범한 시민이 이렇게 고백한 것을 저들은 어찌 들을까요.

 

우리는 유죄입니다.

 

저들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타인에게도 그 침묵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프리모 레비의 이 말은 저들이 어떻게 들을까요.

 

죄인들은 당연히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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