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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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으로부터는 폭력이 나올 뿐이다.·······히틀러의 독일에서 지배적이었던 바로 그 폭력에서 갈라져 나오는 오늘날의 폭력의 계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절망에 빠진 유대인 생존자들은 거대한 난파 후 유럽에서 도피하여 아랍 세계의 내부에 서구 문명의 섬을, 즉 유대주의의 경이로운 부흥을 만들어냈고, 한편으로는 또 다른 증오의 구실을 만들어냈다.(249-250쪽)

 

오늘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원주민에게 가하는 무자비한 폭력을 보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자신들이 나치한테 그렇게 처절하게 당했으면서 어떻게 그와 똑같은 짓을 하는가, 나치와 다른 게 뭔가?”

 

이 질문의 연장선에서 프리모 레비의 글을 데면데면하게 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주위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되묻습니다.

 

“일제가 우리한테 가한 잔혹한 폭력을 비판하는 입으로 어찌 우리가 베트남에 가한 잔혹한 폭력은 모르쇠 하는가?”

 

이런 식의 주고받음은 사실상 무한히 계속되는 순환논법의 한 토막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범죄를 저지른다고 해서 나치가 유대인에게 저지른 범죄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베트남에게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일제가 우리에게 저지른 범죄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악무한의 고리를 누가, 어떻게 끊느냐, 에 초점을 맞추어야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문제를 풀려면 문제의 실재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일까요?

 

우리 속담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매운 시집살이한 며느리가 매운 시어미 된다.”

 

좀 더 보편적인 버전은 이것입니다.

 

“흉보면서 배운다.”

 

좋지 않은 것인 줄 알면서 모방하게 되는 현상을 맛깔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 말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습관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학습이 되는 것에 대한 경험적 통찰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국가적 차원에서도 이런 설명이 가능할까요?

 

프리모 레비는 “폭력의 계보”라는 용어에 터하여 “가르쳐주었다”(250쪽) “배웠다”(249쪽)라는 교육적 관계로 설명하였습니다. 이는 폭력이 의도적·계획적·체계적으로 전수되어가는 기술이며 문명임을 간파하였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폭력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권력 집단의 탐욕이 작동하며 그것은 반드시 자기 조직적으로 체계화되고 공유되고 계승되기 마련임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통찰은 마지막 지점을 관통합니다.

 

절망에 빠진 유대인 생존자들은 거대한 난파 후 유럽에서 도피하여 아랍 세계의 내부에 서구 문명의 섬을, 즉 유대주의의 경이로운 부흥을 만들어냈고, 한편으로는 또 다른 증오의 구실을 만들어냈다.

 

이 부분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모순성에 대한 고찰이 분명히 들어 있으나 기우뚱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듯 개운치 않기 때문입니다. 프리모 레비가 그 동안 여러 차례 진행된 중동전쟁을 몰랐을 리 없고, 그 전쟁의 성격이 무엇인지 몰랐을 리 없는데, 이스라엘의 건국은 “유대주의의 경이로운 부흥”이라고 명쾌하게 묘사하면서 전쟁은 “또 다른 증오의 구실”이라고 모호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세부 사항에 대한 근거 없는, 그러니까 프리모 레비의 정확한 견해를 모르는 상태에서의 쟁점화보다 문맥이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더 핵심적인 사항, 그러니까 나치가 인류역사에서 새로이 열어젖힌 “폭력의 계보”에 이스라엘의 폭력을 분명히 포함시켰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리모 레비로서는 당혹스럽고 심지어 부정하고 싶은 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가해자가 폭력의 메커니즘을 피해자에게 “가르쳐주었”으며,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그것을 “배웠”습니다. 이보다 더한 희극은 다시없습니다. 이보다 더한 비극은 다시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단언합니다.

 

폭력으로부터는 폭력이 나올 뿐이다.

 

폭력을 막는 폭력은 없습니다. 여기서 ‘폭력을 막겠다.’는 말은 ‘내 탐욕을 채우겠다.’는 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폭력 자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폭력을 포기하는 것은 그러므로 탐욕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탐욕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 존재와 삶 자체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 없이는 불가능한 결단입니다. 탐욕은 집중된 권력에 의해 자기조직화하기 때문에 네트워크로 평등하게 분산된 관계-권력으로 공존을 조직화하는 길만이 답입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신자유주의와 결합한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길입니다. 이 거대담론은 제 힘에 부치는 이야기입니다. 의학 이야기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이른바 베르테르효과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흔히 모방 자살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배워서 자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가해자한테 피해자가 배워서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희-비극보다 더 기막힌 일입니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거두는 사람한테서 그 마음을 스스로 배워 자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거둔다니 말입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단도직입으로 저는 이것을 상처의 감염이라 합니다. 몸의 병만 감염이 일어나는 것 아닙니다. 교과서적 서구의학을 한 사람에겐 터무니없는 말로 들릴 테지만 우울장애도 감염이 됩니다. 특별히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 지경까지 이른 경우는 그야말로 관통상의 감염입니다. 이를 비유, 그러니까 은유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 비유라 한다면 베르테르효과라는 이름은 얼마나 더 비유적인 것입니까. 무엇보다 아무리 과학이라 하더라도 언어적 표현은 궁극적으로는 비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 전달의 과정이 질병 차원의 침습이지 건강한 자발성에서 일어난 학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울장애 앓던 연예인이 자살한 뒤를 따라 비연예인이 자살하는 것은 의학적 치료, 그 너머 인문적 치유의 지평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에게 폭행당하며 자란 아이는 대부분 커서 자기 자식한테 똑같은 폭력을 행사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근본 조건인 탐욕 문제가 개입되어 있음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감염이 본질입니다. 치료/치유가 필요한 문제입니다. 치료/치유의 관점 또한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국가, 그리고 세계·문명의 차원으로 확대하여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어느 사회보다 폭력이 공공화해 있는 대한민국의 경우는 정말 심각한 상황입니다. 권력 최상층부의 ‘갑질’은 무한 연쇄의 ‘갑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갑질’은 동물에게도 심지어 땅과 물에게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 수천 명을 부당 해고함으로써 26명의 사람을 죽이고도 변하지 않고, 250명의 아이들을 배에 가두어 빠뜨려 죽이고도 변하지 않는 이 악마적 ‘갑질’ 또한 아우슈비츠에서 배워온 것일진대, 이 땅의 압제자들 책상 위에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놓여 있을진대, 바야흐로 99%의 을이 스스로 100%(서동진의 「변증법의 낮잠」)라고 선포해야 할 때가 아닐까요. 저는 그 바람 속에서 묵묵히 치료/치유로써 이바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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