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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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 필요하다는 추악한 이야기가 있었다. 인간은 갈등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함정이 있고 수상쩍은 이야기들이다. 악마는 필요치 않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전쟁과 폭력은 필요치 않다. 선의와 상호 신뢰가 있다면, 탁자에 둘러앉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248-249쪽)

 

제 선친은 몇 가지 특이한,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괴이한 신념을 지녔던 분이었습니다. 자식은 반드시 때려서 키워야 한다는 소신이 그중 하나입니다. 해마다 봄이면 낫을 파르라니 갈아들고 산에 오릅니다. 하루 종일 싸리나무 덤불을 뒤져 당신의 새끼손가락 굵기의 매를 만듭니다. 수백 개의 매를 가져와 응달에 말립니다. 때릴 때에는 미리 물에 불려둡니다. 그 많은 매들은 이듬해 봄이 오기 훨씬 이전에 사라지고 맙니다. 매가 없으면 손과 발이 그것을 대신했음은 물론입니다.

 

자식을 때리기 위해 싸리나무를 낫으로 베면서, 응달에 말리면서, 물에 불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또한 아비가 되고 이순耳順이 된 오늘까지도 짐작이 잘 가지 않습니다. 체벌(폭력)이 사랑의 방법이라고 굳게 믿을 수는 있으되 그러면 어찌하여 대화는 그 굳은 믿음에 포함시키지 않았을까요. 매를 만드는 정성으로 “탁자”를 만들 수는 정녕 없었던 것일까요.

 

어찌 제 선친뿐이겠습니까. 인간이 탁자보다는 매 만드는 쪽으로 더 기울어진 진화를 해왔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게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구적 지식은 과대 진화하고 윤리적 지혜는 과소 진화했음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죽임의 기술에 비해 살림의 솜씨는 얼마나 누추합니까. 강고한 살해의 시스템에 비해 공생의 커뮤니티는 얼마나 허술합니까. 이런 진화를 이제 거절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진화와 맺은 인연을 저주로 마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화란 말이 귀에 거슬리는 사람한테는 신의 창조와 섭리에 이와 동일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거절”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는 명백한 대상의 존재를 전제로 합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악마

 

그렇습니다. 진화의 선택, 그 끝에는 악마가 된 인간이 ‘낫’을 들고 서 있습니다. 악마는 그 ‘낫’으로 다듬어 아우슈비츠를 만들었습니다. 악마는 그 ‘낫’으로 걸어 당겨 세월호를 뒤집었습니다. 악마는 그 ‘낫’으로 국기문란을 벤다더니 국민을 베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악마는 필요치 않다.

 

우리가 남겨두어야 할, 또는 복구해야 할 것은 “선의”이며 “상호 신뢰”입니다. 함께 느끼는 온기입니다. 공존의 알아차림입니다. 상생의 의지입니다. 파괴의 규모는 전 지구적이고 멸절의 범위가 전 인류적인 지금 나라와 백성을 팔아 제 곳간을 채우는 자들의 악의와 상호 불신을 그대로 두고서야 어찌 이 생명공동체를 온전히 지킬 수 있겠습니까. 모두 제 인연에 맞는 “탁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탁자”를 잇대어 놓아야 합니다. 잇닿아 있는 “탁자” 앞에 “둘러앉아”야 합니다. “둘러앉아” “선의”로 “상호 신뢰”로 대화해야 합니다. 대화로 연대의 삶을 열어야 합니다. 그렇게 연 연대의 삶으로 기어이 장엄한 날을 맞아야 합니다. 원통히 죽어간 저 생떼 같은 목숨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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