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전통은 법학, 신학, 의학을 3대 신성 학문이라 일컫는다. 법관·사제·의사는 공식 업무를 행할 때, 가운을 입는다. 가운을 걸친 채 보수적이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3대 신성 학문은 자연스럽게 보수가 된다. 아니다. 태생 자체가 보수 본성을 지닌다.

 

통속한 인식에서 보면 의학을 놓고 보수 운운하는 일은 낯설다. 정치와 무관한 학문처럼 보이니까. 제대로 알고 보면 의학처럼 정치적인 학문도 없다. 정치적 승자, 그러니까 지배 권력 시선으로 질병을 규정·진단·치료하는 서사가 의학이다. 현대 주류의학은 제국주의 주체 세력인 백인(특히 앵글로아메리칸남성·성인 의학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인류 최초로 금융제국을 이룩한 미국 지배 엘리트 집단이 초국적 제약회사와 보건성을 장악하여, 각종 질병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면서, 세계를 지배하는 의학적 방식이다: 백색 가운 입은 자들이 제국에 부역하는 의료적 방식이다.

 

의학 제국주의에 맞선 혁명 운동이 다름 아닌 녹색의학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불의한 권력과 그 지배에 반대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인종주의를 거부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성 불평등을 용인하지 않는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아이들 학대에 맞선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정치적 평등·자유를 근본 기치로 삼는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정치적 기치 문제에서, 정치적 관점이나 성향 문제와 의학 내용 문제는 분리 불가능하다. 불의한 제국 권력이 토건으로 병을 일으킬 때는 의학 이론을 조작하기 마련이다. 진단과 치료에 동원되는 조건 구축 과정 또한 기획한다. 미국을 위시해 이른바 선진국이라 불리는 제국은 이렇게 병과 진단 기술, 그리고 (약이라 주장하는) 화학합성물질을 만들어 식민지에 하달한다. 각기 다른 여러 인종·남녀·나이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폭력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의학 토건 볼모로 징발되어수탈당하고 있다. 반제국주의 백색의학은 학문을 조금 섞어 넣어 만든 신흥종교 체계다. 이 악성 이데올로기 쌍끌이기선저인망이 암과 DSM표 정신장애다. 우리는 제국주의 백색의학 정치적 정신장애, 정치적 암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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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내 생각에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한 육두구의 저주에 나오는 이야기부터 다시 한다. 이 내용은 이미 쓴 <의학 제국주의: 제국주의 의학> 대부분을 그대로 가져왔다. 근간 문맥 형성에 앞서 서구의학, 그러니까 백색의학이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서 제국주의에 봉사했으며, 나아가 제국주의 한 축으로 작동했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장면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백인 신체가 본디 생물학적으로 우월하다는 믿음은 미국 역사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다.···

  수 세기 동안 아메리카 토착민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놀랄 만큼 불균형하게 많이 죽어간 여러 유행병을 거치면서 그 같은 믿음은 점점 더 굳건해졌다. 예컨대 남북전쟁 이후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민 유행병 치사율은 백인보다 2배 이상 높았다. 물론 이 결과는 주로 빈곤·영양실조·강제 이주·폭력 같은 구조적 요인이 어우러져 빚어낸 현상이지만, 타고난 생물학적 결함 때문이라고 해석되었다. 당시 의학계는 그런 해석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부추기기까지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미국에서 인종 간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믿음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미국 특정 인구통계집단이 자기네가 다른 집단보다 코로나19에 더 강하다고 믿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새로운 증거가 연일 쏟아져 나왔다.”(육두구의 저주235~236)

 

대한민국 대부분 양의사가 한의사를 의사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양의학, 그러니까 서구의학은 과학이고 한의학은 비과학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따져보자.

 

저들이 과학이라고 믿는 서구의학은 어디서 기원했을까? 질병이라는 부역자를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부추기기까지 했던 제국주의 제노사이드 현장, 바로 거기가 서구의학 뿌리다. 이 제국주의 의학이 세계체제로 뻗어나갈 수 있게 한 거대한 음모는 록펠러와 카네기가 합세해서 만든 <플렉스너 보고서>에 담겨 있다. USA 제국이 세계를 제패하는 과정과 제국 의학이 세계를 석권하는 과정은 본질상 같은 궤적을 그릴 수밖에 없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관류하며 제국주의 특권층 부역자 대열에 자연스럽게 합류한 대표적 기회주의자 가운데 하나가 서구의학을 배운 의사, 그러니까 양의사다. 직업이 지니는 비 정치적 이미지 때문에 열외 대접받으며 순조롭게 승승장구해 여기까지 왔다. 저들이 얼마나 정치적 골수 특권층 부역 집단인지 모르는 사람은 여전히 모른다. 물론 알면서, 아니 도리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각성 없는 회색지대 대중들은 더욱 양의대 몰빵으로 질주하고 있다.

 

결국 저들 서구의학·의료, 그 지향에 줄 선 인간 모두 제국주의 구조 일부일 뿐이다. 제국주의 구조는 그 자체로 오류에 기반하고 있다. 오류 구조에 충성하고 있는 서구의학을 과학이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출산, 아니 임신에서 장례까지 인간 생사 문제를 모조리 병원이 거머쥐고 있는 과잉 의료 사회임에도 질병과 그 고통은 도리어 날로 증가하는 근저에 제국주의 사이비의학이 도사리고 있다는 진실을 통렬히 직시해야 한다.

 

백인이 신체적으로 유색인보다 우월하다 믿는 서구 제국주의 양의사에게서 배운 일제 양의사는 일본인이 신체적으로 조선인보다 우월하다 믿었다. 일본인이 신체적으로 조선인보다 우월하다 믿는 일제 양의사에게서 배운 한국 특권층 부역자 양의사는 한국 특권층 부역자가 신체적으로 생계형부역자나 부역 구조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자 애쓰는 사람보다 우월하다 믿는다. 이런 양의사가 고치는 질병은 무엇이며 퍼뜨리는 질병은 무엇인가.

 

아닌 사람도 있다고? 개인 하나하나를 겨냥한 이야기가 아니다.···양의사 집단은 통째로 특권층 부역자임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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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나는 스스로 사람을 사랑해 사람이 된 나무라고 생각하며 산다. 내가 구성해온 본성 서사다. 그러나 엄연히 나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으로서 사람 질병을 치료하는 의자다. 의자로 살면서 의자로서 제국주의에 기생한 무지렁이 부역자다. 그 참회와 속죄부터 해야 순서가 맞다. 순서를 삼가 따른다.

 

1. 한의학은 식물, 그러니까 녹색 생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의학이다. 엄밀히 따지면 서구의학을 포함한 모든 의학이 그렇지만, 특히 한의학은 약물 처방을 대부분 식물 자체로 구성하므로 이렇게 말한다. 한의사는 약으로 어떻게 무슨 식물을 쓸지 고민하는 일로 평생을 보낸다. 식물을 훤히 꿰뚫고 있을 듯 보이는 바로 그 점이 함정이다. 필요한 사항만 알기에 식물 서사 전체는 잘, 아니 전혀 모른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으면서 아닌 듯 오랜 세월 살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내가 나무 사람 아니, 사람 나무라고 한평생 굳게 믿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내 믿음은 마냥 허구가 아니었으나 바로 그 점이 또 더 깊은 함정이었다. 전제하면 의심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알 수 없는, 그러니까 비 인과적 경로를 통해 식물이, 식물 본성 자체로 내게 들이닥쳤다. 그 순간부터 주업과 부업이 뒤바뀌었다. 광화문 교보 식물 코너에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을 때까지 나는 식물 공부에 심취했다. 공부 중 아픈 사람이 치료받으러 찾아오면 맹랑한 부아가 치밀어오를 정도였다. 공부는 식물에서 멈추어지지 않았다. 지의류, 균류, 박테리아, 마침내 바이러스까지 나아갔다. 세계의식이 확장일로를 걷는 동안 인간중심주의는 남김없이 무너졌다. 자연스럽게 지구 생태계, 기후 재앙, 지구 위기 문제가 더한층 날카로운 화두로 자리 잡았다. , 이제는 구체적, 실용적 차원에 뿌리를 내려야겠구나, 하는 순간, 홀연히 내 눈을 사로잡은 책이 앞에서 본 육두구의 저주(아미타브 고시)였다.

 

육두구의 저주는 항일무장투쟁 선봉에 서셨던 증조부 덕분에 생긴 제국주의에 대한 정서 중심 시각을 단칼에 베고, 제국주의 속살을 결결이 들여다보는 이성적 시각을 구축해주었다. 더군다나 현실 문제를 자본주의라는 납작한 범주로만 해석하던 피상성마저 날려버렸다. 지구 위기 문제가 어떻게 제국주의에서 발원했는지 알고 나서 나는 <녹색의학 이야기>를 새로이 쓸 수밖에 없다는 자각 먼저 했다. 그 자각을 2023522일부터 717일까지 브런치스토리에 고쳐 쓴 글을 올림으로써 실행으로 옮겼다. 이제 다시 좀 더 핍진한 반제국주의 의학 서사가 되도록 또 한 번 고쳐 쓴다. 그 시작을 2023818일에 한다.

 

3. 나는 한의학으로 의료행위를 하는 의자다. 중첩 식민지 무지렁이 부역 의자로서 내가 처한 상황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일이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는 작업을 하려 한다. 내 눈에 나를 둘러싼 풍경은 그대로 질병 포르노다. 병 걸리도록 중독적으로 유혹하는 의료독재 살풍경 말이다. 의료독재가 제국주의를 부추겨 극한 파국으로 밀어 가고 있다. 아니다. 거꾸로다. 어제 제국주의가 의료독재를 구성했으므로 오늘은 그 모진 업보다.

 

여기서 의학이란 무엇인가. 이치에 따라 말한다면 의학은 제국주의에 맞서 혁명하는 논리와 실천이어야 맞다.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의학, 특히 주류 서구의학은 도리어 제국이 부리는 마름으로서 수탈체제 거대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나는 이를 백색의학이라고 이름한다.

 

백색의학에서 백색이라는 말은 크게 세 가지 함의를 지닌다. 하나, 제국 권력 집단이 혁명 운동에 가하는 탄압으로서 백색공포라는 백색이다. , 제국 자본주의라는 백색이다. , 화학합성약물이라는 백색이다.

 

백색의학에 맞서 질병 포르노 제국을 혁명할 논리와 실천을 창조하는 실재로서 나는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을 제시한다. 그동안 온갖 잡다한 마케팅에서 이 말을 써왔음이 사실이다. 익히 알기에 나는 이 말을 재정의해 혁명 언어로 거듭나도록 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에서 녹색은 크게 세 가지 함의를 지닌다. 하나, 제국 권력 집단이 혁명 운동에 가하는 탄압인 백색공포에 항거하는 자유로서 녹색이다. , 제국 자본주의에 항거하는 평등·평화 팡이실이(networking)로서 녹색이다. , 치료를 가장한 제국 제약회사 화학합성물질 공격에 항거하는 진정한 치유와 박애로서 녹색이다.

 

대략 이런 방향과 내용을 담고, 흐르는 대로 생각을 펼쳐보려 한다. 때에 따라서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digression)’도 없지 않다. 그동안 이런저런 지면, 하다못해 술자리에서 했던 말들도 나와 돌아다닌다. 그때 했던 말과 어긋나는 말도 한다. 함께 어우러져 이 묵시적 상황에서 내가 흔쾌히 결곡히 쉴 숨 길, 할 말 길, 갈 짓 길을 열었으면 좋겠다. 질병 포르노 식민지에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이야기가 팡이실이 길잡이로 읽힐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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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봉산 회룡 계곡 바위벽에서 세 번씩이나 굴러떨어져 아프다고 했더니 오랜 벗이 귀하신 몸 그리 마루타로 굴리면 되겠느냐며 웃는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생체 실험 아니고 산 속죄제라네. 기독교식으로 Agnus Dei(Ο αμνός του Θεού) 이러면 이단 소리 들을 테니 아서고 여기서나 그 뜻풀이를 한다.

 

그동안 숲으로 가면서 나는 나무와 풀과 곰팡이가 내게 해주는 말을 듣고자 했다. 듣기 전에 고마움부터 전했다. 고마워하기 전에 속죄부터 했다. 다시 순서대로 하면, 잘못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듣습니다, . 정직하게 말한다면 그 가운데 속죄 질량이 가장 가벼웠다. 죄는 제국과 특권층 부역 집단이 졌다고 당연히 막연히 타성을 따라 생각했다. 무지렁이 부역자가 지은 죄쯤이야, 하고 극진함을 덜어내고 말았다.

 

이분법에 편승한 피해의식 탓일 테다. 아직도 털어내지 못한 정신적 유형성숙(neoteny)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벗이 오답을 내준 덕분에 나는 정답을 찾았다. 제국과 특권층 부역 집단은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저들에게는 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룩한 인간 영들은 이미 살해당했으니 그나마 목숨 부지하고 있는 나 같은 무지렁이 부역자가 너덜거리는 영으로라도 속죄하는 일이 유일한 속죄 아닌가

 

옹근 속죄 없는 팡이실이(networking)란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과 부역 인간 범죄가 바로 팡이실이 파괴기 때문이다. 숲에서 숲에 속죄하는 까닭은 숲이 팡이실이 본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살해당한 거룩한 인간 영들이 숲 팡이실이 공동 주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회룡 계곡 숲에서 지고 질량 속죄제를 올렸다그렇게 나는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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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역 이야기를 닫으며

 

<우리 부역 이야기를 닫으며> 제목 걸어놓고 이 글을 쓰려면 꼭 도봉산 회룡 계곡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겨울에 눈 덮인 회룡 계곡으로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결국은 되돌아 나오면서 見人忘吾를 거쳐 나 자신이 부역자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았으니 이번에는 결코 되돌아 나오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깨달음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그래야만 했다.

 

망월사역에서 내려 도봉산 3대 계곡 중 하나인 원도봉 계곡으로 향했다. 장마 끝이라 계곡은 아직도 습한 기운에 젖어 있었다. 곳곳에 물놀이하는 피서객 웃음소리가 낭자했다. 나는 나무와 풀과 버섯과 물, 그리고 바위에 도취해 그 소리들을 바람처럼 날려 보냈다. 망월사를 지나 능선에 도달한 뒤 카카오 지도에 점선으로 처리된 회룡 계곡 길 가까이 접근했다.

 

지도에서 확인한 회룡 계곡 길 진입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다가 결국 이번에도 길 없는 길로 다시 들어서기로 했다. 경사가 급했지만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난겨울에는 올라가는 경로, 게다가 눈이 덮여서 실패했지, 이번에는 내려가는 경로라 일단 물길이 시작되는 곳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순진한 생각임이 즉시 드러났다.


회룡천이 발원한 곳

 

물길 주변은 바위투성이면서 높고 낮은 폭포 지형이 형성돼 있어서 위험천만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곳은 위험을 무릅쓰고 직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수직 바위벽에서 세 번이나 미끄러져 굴러떨어졌다. 찰나적으로 사람이 산에서 이러다가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무겁지 않은 외상을 몇 군데 입었을 뿐, 안경마저 멀쩡해 너무나 신기했다.

 

임계점에 도달했다. 도저히 직진할 수 없는 낭떠러지 폭포 바위 위에 섰다. 경사 40도가량 넓적한 바위를 옆으로 기어올라 능선 쪽 우회 경로를 찾아야 했다. 올라가다가 구르면 그대로 끝인 상황이었다. 공포와 용기는 반대말일 수 없다는 진실이 찰나적으로 들이닥쳤다. 생각 멈추고 즉시 바위를 타기 시작했다. 안전한 곳에 이르자 갑자기 몸이 소리 하나를 토해냈다.

 

68년 만에 처음 알았다, 몸에서 토해져 나오는 울음이 꺽 하는 소리를 낸다는 사실. 마음으로 제어되지 않았다. 한참 그러고 울다가 깨달았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진실. 인적 없는 깊은 숲에서 수염 허연 늙은이가 꺽꺽 우는 광경은 누가 봐도 기이하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내 운명을 느꼈다, 숲 주체성을 인정하는 삶은 낭만이 아니라 목숨을 나누는 일이라는 진실.

 

물소리와 밀고 당기며 끊길 듯 이어진 소로를 따라가다가 지난겨울 내가 왔던 길을 거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내 알아차렸다. 방향이 같지만, 지난겨울에는 회룡 계곡을 끝내 걷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길이었고 이번은 회룡 계곡을 마침내 걸어 마무리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두 발길이 서로 같지 않은 요체가 성패 자체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즉시 알아차렸다.


지난겨울에는 내 생각을 잃고 타인을 따라갔다. 이번에는 내 생각을 붙들고 숲을 따라갔다. 타인은 느닷없이 대화를 끊어버렸다. 숲은 끝까지 대화를 이어갔다. 내가 식민지 인간 부역 이야기를 하는 중에 부단히 숲에 든 까닭은 인간 아닌 숲을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에서 궁극적 동지로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실패와 성취 동시 지점에 이르러 나는 이 진실을 확인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숲을 보고, 그러니까 숲을 따라서 내게 되돌아왔다(見林回吾)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내가 사람이 된 나무라는 서사를 소환한다. 이 부름에 응해 나는 의자로 살아온 내 후반 삶을 걸고 사람 나무 생각으로 의학 이야기부터 고쳐 쓴다. 그 너머 이야기를 어찌할지는 아직 모른다. 나중에 알게 되면 이 부분을 고친 다음 그 이야기를 쓰기로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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