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도봉산 회룡 계곡 바위벽에서 세 번씩이나 굴러떨어져 아프다고 했더니 오랜 벗이 귀하신 몸 그리 마루타로 굴리면 되겠느냐며 웃는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생체 실험 아니고 산 속죄제라네. 기독교식으로 Agnus Dei(Ο αμνός του Θεού) 이러면 이단 소리 들을 테니 아서고 여기서나 그 뜻풀이를 한다.

 

그동안 숲으로 가면서 나는 나무와 풀과 곰팡이가 내게 해주는 말을 듣고자 했다. 듣기 전에 고마움부터 전했다. 고마워하기 전에 속죄부터 했다. 다시 순서대로 하면, 잘못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듣습니다, . 정직하게 말한다면 그 가운데 속죄 질량이 가장 가벼웠다. 죄는 제국과 특권층 부역 집단이 졌다고 당연히 막연히 타성을 따라 생각했다. 무지렁이 부역자가 지은 죄쯤이야, 하고 극진함을 덜어내고 말았다.

 

이분법에 편승한 피해의식 탓일 테다. 아직도 털어내지 못한 정신적 유형성숙(neoteny)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벗이 오답을 내준 덕분에 나는 정답을 찾았다. 제국과 특권층 부역 집단은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저들에게는 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룩한 인간 영들은 이미 살해당했으니 그나마 목숨 부지하고 있는 나 같은 무지렁이 부역자가 너덜거리는 영으로라도 속죄하는 일이 유일한 속죄 아닌가

 

옹근 속죄 없는 팡이실이(networking)란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과 부역 인간 범죄가 바로 팡이실이 파괴기 때문이다. 숲에서 숲에 속죄하는 까닭은 숲이 팡이실이 본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살해당한 거룩한 인간 영들이 숲 팡이실이 공동 주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회룡 계곡 숲에서 지고 질량 속죄제를 올렸다그렇게 나는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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