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벌목 연장은 톱이 아니라 대화다.

  토박이 벌목꾼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개별성을 인정하여 사람처럼 대한다. 사람인간 아닌 사람나무로 여긴다는 뜻이다. 나무를 취하지 않고 나무에게 부탁한다. 예를 갖추어 자기 목적을 설명하고 벌목 허가를 청한다. 때로는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오기도 한다.(214)

 

사랑은 다양한 문맥에서 소통과 동의어다. 사랑한다면서 소통이 잘 되지 않아 찾아오는 천차만별 부부나 연인에게 주는 내 기본 처방은 동일하다. “질문이 소통의 시작입니다.” 대부분 수긍하고 동의한다. 중증인 사람은 대뜸 저항한다. “나는 질문 엄청 잘 하는데요?” 자기 확신에 빠진 사람이 턱을 치받쳐 올리고 눈을 내리까는 것과 반대로, 나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을 치뜨면서 말한다. “당신은 명령을 의문문 형식으로 내렸을 뿐입니다.”

 

때로는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오기도하므로 토박이 벌목꾼이 나무에게 한 부탁은 본질적으로 질문이다. “삼가 생명을 거둬드려도 되겠습니까?” 정갈한 제례다. “흔쾌히 목숨 내어드리겠습니다.” 즐거운 축의다. 엄숙과 질탕, 파괴와 창조를 가로지른 벌목 논리는 아닌 대화가 벼려낸 역설 미학이다. 거두는 사람에게는 죄책감이 없고 내주는 나무에게는 박탈감이 없다. 그러려고 거두는 사람이 기품 있고 결곡하게 나무 생명을 거둔다. 살육을 응시한다. 모진 시간을 찰나에만 둔다. 찰나 예절이 영원을 기린다.

 

두족頭足류 동물, 예컨대 낙지는 다리 모든 부분도 뇌다. 당연히 그 모든 부분에서 독립적 감각, 대표적으로 통각을 느낀다. 다리를 토막 낼 때마다 각각 통증을 느낀다. 최근까지 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안 뒤부터 나는 그 동안 일부러 청해 먹지는 않았으나 아주 드물게나마 기회가 생기면 먹기도 했던 낙지OO이를 먹지 못한다. 채식주의자가 날리는 비웃음을 가만히 끌어안으며 묻는다. 식물은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할까? 그러니 마음 놓고 먹어도 될까? 묻지도 않은 채, 베고 찢고 데치고 끓이고.......게다가 또 그런 방식으로 만든 온갖 양념을 끼얹어 잡냄새없앤 향락무인지경 음식 만드는 짓을 해도 될까? 그리 해도 될 정도로 식물은 얼굴 없는 하등 생명체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식물은 몸 전체가 얼굴인 고등생명체다. 생명 거둘 때 예의를 극상으로 지켜야 한다. 반드시 질문해야 한다. 비상한 생태주의자들이 왜 이 진실에 통 관심이 없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요즘은 도리어 내가 미친놈 아닐까 더럭 생각이 곤두박질치곤 한다. 정색하고 자가진단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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