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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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런 걸 본 적이 없다. 그의 눈앞에, 작은 유리 두 개가 철사로 된 둥근 고리에 매달려 있다. 그는 맹인일까? 만약 맹인이라는 걸 감추기 위해서라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맹인이 아니다. 유리는 검은색이어서 밖에서 보면 불투명하지만, 그는 그걸 통해 볼 수 있다. 그는 그것이 새로운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p.7

소설은 첫 페이지부터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화자의 시점, 상황, 화자가 바라보는 대상이 등장한다. 나는 검은색 유리 안경이라는 새로운 발명품을 본 적 없는 이 화자에게 "혹시 당신이 야만인 이십니까?"라고 마음 속으로 물어보기 까지 했지만, 몇 페이지 책을 넘기고 보니 그는 어떤 제국의 변방, 오지에서 무려 30년 간 치안판사를 해온 인물. 그 곳의 평화와 자연을 즐기고 오지의 과거를 추측해볼 수 있는 소소한 탐구를 소일거리 삼아 지내는 평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할 것도 없는 은퇴를 기다리며 유유자적 조용한 삶에 만족하는 나이 든 노인이었다.

 

제국의 수도로부터 검은 안경으로 눈빛을 감추고 나타난 졸대령이 마을에 나타나고 제국의 적으로 붙잡혀와 고문을 당한 뒤 마을에 홀로 남게 된 눈 먼 야만인 여인이 그의 삶에 걸어들어오게 된 이후 그의 인생과 세계는 급변한다. 그는 야만인 역시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과 진실 앞에서 깊은 갈등과 번민을 거듭한다. 그는 제국의 신민이기에 앞서 그저 인간다운 인간이고 싶었을 뿐인 가운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이유로 마을에서 가장 먼저 그것을 박탈당하고 또 그 처절하게 짓밟혀진다. 소설은 그렇게 지극히 평범한 인간다운 노인, 식민지의 관리이지만 '인간성'과 '평화', '정의의 원칙'에 대한 신념이 있었던 인간이 어느 한 시절 갑작스럽게 이 모든 가치를 빼앗기는 이야기이다. 아니, 그 시절 그 곳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상황을 겪는 가운데에도 오직 그 노인만이 인간성을 상실한 제국의 행위에 "그건 아니지 않소"라고 조용히 대꾸를 하며 황망해 하는 이야기이다.

 

페이지를 넘기고 넘겨도 이 곳이 어디인지, 언제인지, 어느 나라의 변방인지 언급되지 않는다. 그저 수도에서 먼 변방의 오지에서 야만인을 쓸어내고 제국의 땅으로 선포하고자 하는 군인들과 화자를 비롯해 변방에서 평범한 삶을 꾸려온 제국의 시민들 그리고 자신들에게 벌어지는 갑작스럽고 생경하고 충격적인 상황과 상상하지도 못했던 폭력과 억압에 말을 잃은 야만인들... 작가는 이 곳을, 이 시기에 이름을 주지 않았음에도 이 곳은, 이 때는 여러 가지 선명한 이미지로 연상되며 책장을 따라 겹겹이 내 안에 떠올랐다. 인류 역사에 무지한 나임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의 이미지는 내 안을 넘치도록 쌓여갔다. 그만큼 제국주의의 역사는 역사를 잘 아는 이들이던 그렇지 않은 이들이던 간에 많은 이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자리잡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화자인 치안판사가 보고 겪고 마주하게 되는 모든 상황, 현실은 끔찍한 악몽 그 자체였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악몽 속에서 혼자만의 절규, 아무도 듣지 못하는 외침을 부르짖고 있는 듯한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마음 아팠다. 그리고 아무런 이유 없이 정복의 대상을 적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경계를 넓혀가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던 이들이 어디 먼 시절, 그들의 모습 뿐일까 싶기도 하다. ​상대가 되지 않는 상대를 향한 힘없고 외로운 싸움. 노인의 시선과 생각을 따라 책장을 넘기다 보니 나 역시 치안판사 노인의 눈빛과 마음에 물이 드는 듯 싶었다. 권력으로 가진 것을 부풀리고 확장시키고자 하는 이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상황 앞에서 나또한 야만인이 되어, 인간다움 앞에서 갈등하는 노인이 되어 능욕당할 수 있다는 것... 그런 느낌이 불현듯 생생히 다가와 불안하고 두려웠다. 더불어 제국주의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듯 보이지만... 인간성과 평화, 정의가 상실된 채 돈, 물질, 부를 목적으로 하는 제국의 식민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보다는 효율성을 극대화하며 남들보다 많은 부를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제국. 그리고 그에 반(反)하며 이건 아니잖아...하다가는 야만인 혹은 치안판사처럼 미치광이 노인네로 조롱의 시선을 받게 되는 세상... 제국주의 그 자체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의 그늘을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현대인의 사회, 그 너머의 세상을 바라본 작가의 통찰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야만인을 기다리며...

그들은 어떤 마음 이었을까. 제국주의의 충실한 하수인들 그리고 그저 인간다운 인간이고 싶은 치안판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 그들은 각각 어떤 마음으로 야만인을 기다렸을까. 폭력과 억압의 대상이 되는 야만인이 있어야 제국의 존속 가치가 증명된다며 야만인 사냥에 나섰던 제국주의. 제국의 대척점에 있는 다른 세계, 야만인을 짓밟고 능욕하는 것으로 제국의 우월함을 부각시키고자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했던 그들의 마음을 상상해 보는 것 만으로도 섬뜩하다. 그러나 소설의 화자처럼 야만인들이 제국주의에 쉽게 무너지지 않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있다.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과 인간성, 자연에 순응하고 나름의 문화를 지키고 살아가는 야만인들이 보란 듯이 자신들의 땅을 지켜내길 간구하는 마음. 왠지 그 기다림이 아직도 이어져 오고 있는 것만 같아 나또한 그의 기다림에 내 마음을 보태본다.
 

... 나는 그런 걸 본 적이 없다. 그의 눈앞에, 작은 유리 두 개가 철사로 된 둥근 고리에 매달려 있다. 그는 맹인일까? 만약 맹인이라는 걸 감추기 위해서라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맹인이 아니다. 유리는 검은색이어서 밖에서 보면 불투명하지만, 그는 그걸 통해 볼 수 있다. 그는 그것이 새로운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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