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안중근의 유가족 김아려, 안준생, 안현생

막내 준생은 안중근 순국 당시 태중(中)에 있었으니, 1912-1913년경의 사진으로추정된다. 김아려는 황해도 재령 출생으로 16세 때 한 살 아래의 안중근과 결혼하여현생, 분도 준생의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분도는 준생이 태어난 지얼마 되지 않아 홍역으로 죽었다. 남편이 순국한 뒤 김아려는 자녀들을 데리고망명하여 시어머니, 시동생들과 함께 연해주, 상하이 등지로 떠돌았다.
1937년 일본군이 중국 상하이를 점령한 뒤에는 일본군의 포로와 다를바 없는처지가 되었다. 해방 이듬해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생과 현생은 일본군의 강요에의해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인 서울 남산의 박문사에 참배하는 굴욕을 겪었다.
준생은 한국전쟁 중 덴마크 병원선에서 사망했으며, 현생은 해방 후 귀국하여효성여자대학교 교수, 민주당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고1960년 아현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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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가 약자를 억압하지 않는 세계,
서로 싸우기보다는 서로 돕는 세계를 꿈꾼 그의 이상은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인 ‘인도주의‘ 고조(高潮)로일차 꽃을 피웠으며, 20세기 말 유럽연합 성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안중근은 당대를 지배한 논리의 모순을 정확히 인식했으며,
그를 토대로 더 나은 시대를 만들어갈 전망을 세웠다.
그의 자아민족 전체를 품을 정도로 컸고,
그랬기에 피압박민족의 일원으로서 제국주의 침략 논리를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안중근 사상의 선구성은 일차적으로그가 제국주의 시대에 살면서 제국주의 시대 이후를상상했던 데에서 연유한다."
지은이 전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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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이든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일은 유쾌하지 않다. 더구나 그것이 국가와 공동체의 집단 기억과 관련된 역사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심지어 공동체 구성원 내부의 집단 갈등을 불러일으켜사회를 서로 대립하는 두 진영으로 갈라놓을 수도 있다. 공동체의기억을 독점해 역사를 사유화하고자 할 때 비판과 다양성이라는 역사학의 본질적 가치는 실종된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어떻게 기억할 것이냐는 기억 선택과 독점의 문제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실제로 이봉창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과 임시 정부는점차 성역화되었고, 반대로 그에 관한 비판적인 성찰과 연구는 점점더 어려워지고 있다. 인간의 역사가 점차 신의 역사를 닮아 갈 때, 역사학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쓰는 동안 심한 열병과 두통을 앓듯이 몸과 마음이 아팠다. 32년이라는 길지 않은 이봉창의 삶에 끝없는 연민과 존경을 느꼈기 때운이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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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천황 폭살 계획은 치밀하지 못했다. 우선 시관병식에 대한정보가 부족했다. 육군 시관병식은 해마다 거의 같은 날에 거행되는연례행사였다. 이봉창이 천황 폭살을 시도한 이듬해 같은 날에 열린육군 사관병식 행사에 참여한 히로히토의 동정이 <동아일보>에 실려 있다. 보도에 따르면, 히로히토는 오전 9시 20분에 궁성문을 출발하여 10시 5분에 식장인 요요기 연병장에 도착했다. 식장까지의이동에 걸린 시간은 45분, 황실 근위사단과 제1사단 약 1만 명이 참석한 관병식은 10시 20분에 시작해서 비행대 57기의 공중 분열식까지 포함해서 11시 10분에 끝났다. 관병식에 소요된 시간은 50분. 분열식이 끝나고 히로히토는 11시 15분에 요요기 연병장을 출발했다.
갈 때와 같은 방식으로 이동했다면 출발지인 궁성에는 대략 12시에도착했을 것이다.
천황에 관한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이봉창은 윤봉길처럼 자신이 목표로 한 천황의 사진을 구해 얼굴을 익히거나 천황이 행차할 때 몇 번째 마차에 타는지조차 조사해 두지 않았다. 그것이 목표를 잘못 판단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시간이 부족했던것도 아니다. 1월 6일에 알아내지 못했더라도 그에게는 시간이 하루더 있었다. 그런데도 끝내 천황의 행차 길에 대해 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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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사진을 찍기 위해 이봉창은 선서문을 목에 걸고 양손에 수류탄을 하나씩 들고 두 손을 가슴 높이까지 올리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벽에 붙어 섰다. 그림자가 태극 모양을 가렸다. 중국옷을 입은 청년이 다시 사진을 찍었다. 이번에도 이봉창의 얼굴은 우울해 보였다.
이로써 이봉창의 한인애국단 입단식은 모두 끝났다. 김구가 말한대로, 이봉창은 한인애국단의 최선봉에 선,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이 되었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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