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를 떠나보내며 - 상자에 갇힌 책들에게 바치는 비가
알베르토 망겔 지음, 이종인 옮김 / 더난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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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책장도 빈 공간이 사라지고 있다.그렇다고 책장을 더 늘리고픈 마음은 없었는데 책들이 숨을 쉬지 못하고 빽빽이 붙어 있는 것 같아 좀 덜어내야 하나 하다가도 막상 책을 덜어내려고 하니 움직여지지 않는다.

저자 망겔은 무려 3만 5천여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그의 서재는 누구나 탐낼 만큼 목가적인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개와 함께 헛간에 붙어 있는 탑에서 책을 볼 수 있는 자유로움에 상상만으로도 내 영혼이 달달해짐을 느낀다. 그러나 삶은 뜻하지 않게 흐른다. 그는 서재를 정리하고 아르헨티나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망겔이 책을 싸고 푸는 과정에서 느꼈던 책에 대한 회고록 같다. 어린 시절을 소환하여 들려주는 책에 대한 기억들과 사춘기 시절 그의 서재를 채워 간 책들, 그리고 그가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면서 사모은 책들에 대한 추억에 책들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이 한가득 묻어난다.
이 책의 부제인 '상자에 갇힌 책들에게 바치는 비가'라는 의미가 전혀 과한 문장이 아님을 되새기게 된다.
이쯤에서 문득 먼 훗날 나의 서재를 정리하게 되는 날이 오면 나는 어떤 추억들을 떠올리게 될까.

저자에게 있어 독서는 모든 즐거움의 원천이었고 행위에 있어 합리성을 부여한다 말할 정도로 애서가이다. "나의 개인 도서관은 나의 등딱지다."라는 문장은 그의 책 사랑을 충분히 대변한다. 그래서 칠십평생 그의 영혼을 울리고 웃게 만든 책들을 정리하며 독자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은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책에 관한 이야기를 쓴 책들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책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게 큰 이점이다. 게다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책에 대한 정보는 더욱 반갑다. 물론 그의 언어는 그동안의 방대한 지식이 축적된 결과물로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문장도 있지만 인생의 멘토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를 차근차근 듣는 마음으로 읽어내려갔다.

서재를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망겔은 책장에는 다양한 언어로 된 책이 언어별로 정리되어 있고 특정한 주제의 책들은 별도의 공간을 가지고 있지만 의외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작품들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책은 주로 소장하는 편이고 책을 빌려주기 보다 사주는 편이라고 한다. 책에서 읽은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또 다른  즐거움으로 함께 한 책과의 추억을 소중히 함을 느낄수 있다.
밑줄을 그은 흔적, 포스트잇이 끼워져 있거나 가끔 영수증과 말린 잎들이 발견될 때면 추억이 생각나서 충분히 나도 공감하는 점이다.
그런 서재를 정리해야 하는 시점이었다면 수많은 감정들이 오갔을 것 같다. 일부러 콘텐츠를 쥐어짜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생각들이 꼬리를 물며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의 방대한 독서량에 있겠다.

"우리는 질문하기 위하여 독서를 한다"라는 카프카의 말은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는다. 그렇게 만들어 낸 질문들로 우리는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며 성장해간다. 그리고 현재 나의 감정들을 소설 속 인물과 결부시키는 과정은 내면을 성장시킨다. 저자도 프랑스를 떠나오면서 느꼈던 우울감은 복수와 분노, 절망과 상실이라는 복합적 감정을 떠올리게 했고 사라진 책들을 떠올리며 돈키호테의 사기당한 노인을 백번 이해한다. 더불어 물건을 잘 잃어버리던 그의 할머니는 이런 말을 남긴다.

"물건을 잃어버리는 건 그리 나쁜 일이 아니야.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즐기는 게 아니라, 현재 기억할 수 있는 것을 즐기게 되니까. 우리는 상실에 익숙해져야 해." - p.108

그는 좀 더 나아가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단어들이 문장으로 재현되는 과정을 이해시킨다. 그리고 재현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꿈과 현실과의 관계를 논하다 보면 결국 창작이라는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이야기는 반복되고 재구성되며 그때마다 달라진다. 그것은 번역이라는 작업과정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이런 과정들이 여러 권의 책을 떠올려보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말뿐 아니라 글쓰기도 경계해야 함을 말한다. 그 예로 파라오는 글쓰기에 대한 기술은 자칫 지혜의 전달이 아니라 지혜에 대한 허세로 가득 찰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이 부분은 수많은 독자들이 한 번씩 곱씹고 지나쳐야 할 부분이다.
혹시 내가 많은 양의 독서를 근거로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그러나 읽지 않는 국가는 쇠락한다는 말처럼 독서는 효과적인 저항의 존재임을 알아야겠다.

우리의 책들은 다른 사람들의 체험과 지식을 헤쳐 나가는 길 안내가 되어 줄 수 있고, 불변의 과거에서 얻은 교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직관을 주기 때문이다. - p.218~219

비록 서재를 정리해야 하였지만 그는 국립도서관의 관장이 되어 그 아쉬움을 달랜다. 줄 곳 살아온 공간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도서관이 해야 할 의무에 충실하고자 한다. 지금의 모습이 그가 청소년 시절 보르헤스를 만남으로써 가능했다고 한다면 그는 엄청난 행운아다.

"영혼의 진료실"
어쩌면 이게 도서관의 궁극적 목표일 것이다. - p.224

문득 예전에 들은 라디오 사연이 생각이 났다. 남편이 보낸 사연으로 아내가 읽지도 않는 책을 사모은 다는 것이었다.
왜 읽지도 않는 책을 사 모으냐는 물음에 아내는 그냥 책이 집에 있으면 멋있고 언젠가는 읽게 되지 않을까?라는 얘기였다. 그런 아내가 불만인 남편보다는 아내의 솔직한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어찌 되었든 소유의 욕구가 책인것은 간접적 경험의 구매라고 본다면 다행스러운것이 아닐까. 지금쯤 사연 속 아내는 책장에 진열된 책을 꺼내보고 있을까.

나도 언젠가 내가 이 서재를 정리해야 될 때가 오면 감상문 한편 정도는 남겨놓고 떠나고 싶다. 망겔처럼 심오한 철학을 논할 자신은 없지만 담담하게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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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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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공포물에서 표식이 주는 호기심은 공포감을 증폭시킨다.
그래서 한낱 분필 하나가 주는 공포감이 생각보다 컸다.
초크맨을 쫓아가면서 보낸 열대야의 밤은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왜냐하면 시작과 마찬가지로 마지막까지 섬뜩함을 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의해 소녀의 시체 일부 중 머리가 발견된다.
그리고 배낭 안으로 넣어진다. 그가 범인인지 목격자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났던 그날의 진실은 애매모호하게 마무리가 되고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여느 십 대들이 그렇듯 그들만의 세계에서 그들만의 우정을 암호화하며 즐긴다.
각각 자기만의 컬러 분필로 기호를 만들어 의사소통을 하기로 한 것이다.
남자 넷에 여자 하나. 숲속에서, 놀이터에서, 그들은 늘 호기심 많은 십 대들일 뿐이었다.

마을 축제에 들뜬 아이들은 축제날 함께 놀이공원으로 향한다.
그러나 갑자기 눈앞에서 놀이기구 하나가 튕겨져 나오는 대형사고가 발생하고 에디의 눈앞에서 예쁘장한 한 여자아이가 쓰러진다.
얼굴과 다리에 끔찍한 충격이 가해진 소녀와 그 옆에 같이 쓰러진 에디.
도망치려 하던 찰나에 마침 그 자리에 있던 학교 선생님은 에디에게 소녀를 부축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한다.
다행히 소녀는 죽지 않았고 에디와 선생님은 영웅으로 함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평온한 일상이 마을을 덮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사건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다.
첫 부분에 등장했던 소녀의 머리가 바로 놀이공원에서 끔찍한 사고를 당한 이와 동일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건의 시작점이 그즈음 일것이라고 짐작만할 뿐.

이야기는 현재 어른이 된 에디와 사건이 발생하던 30년 전을 오간다.
표식을 따라 떨어져 있던 시신의 일부를 아이들이 발견했고
소녀의 죽음 이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는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관여되어 있다.
다만 그들은 침묵하고 있을 뿐 진실은 때로는 진실로 둔갑된 채 그렇게 남겨질 때도 있다.
그들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조용히 그렇게 묻혀간다.

유치하고 어리석고 사소했던 행동이 끔찍한 비극을 낳았다. -p.246

우리가 스스로 해답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건 정답이다.
그게 인간의 천성이다. 우리는 원하는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질문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뭔가 하면 진실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실은 그냥 진실인 습성이 있다.
우리는 그걸 믿느냐 믿지 않느냐만 선택할 수 있을 따름이다. -p.242


사건의 중심인물인 에디는 다섯 친구 중 하나다.
글재주가 있던 어린 시절의 재능을 키워 아이들을 가르친다.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지만 하숙생인 클로이라는 아가씨와 한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에디가 사건을 다시 되짚게 된 건 그날 도착한 우편물 때문이다.
그 속에 든 흰색분필과 편지는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그리고 어디선가 범인이 살아서 아이들을 노리고 있음으로 얼마든지 추론할 수 있다.
비슷한 시간에 우편물을 받은 다른 친구들도 뒤숭숭하긴 마찬가지다.

사건의 결정타였던 토막 시체가 발견되기 전 마을은 불행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에디의 일당을 괴롭히던 형들 중 한 명이 강에 빠져 익사하고,
일당 중 여자아이의 아빠는 마을 목사인데 에디 아빠가 날린 펀치로 사이가 썩 좋지 않으며
게다가 낙태수술을 한 에디 엄마는 목사와 그를 지지하는 시위자들에게 협박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익사한 아이의 장례식 날 임신한 십 대 소녀와 아버지가 들이닥쳐 죽은 아이를 욕보이고,
목사는 괴한의 습격을 받아 크게 다치는 일이 연일 벌어진다.
그리고 얼마 뒤 잔인하게 살해되어 조각나버린 소녀가 발견된다.

아이들이 남기던 분필 기호 외에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흰색의 낙서에 섬뜩한 마음이 앞서고
아이들의 우정도 어른들의 세상에 편입되면서 하나둘 갈라지게 된다.
그러나 각자가 받은 편지로 인해 에디를 만나고 돌아가던 친구 미키가 사고로 죽자 초크맨의 공포가 휘몰아친다.
과연 범인은 어디에서 치밀하게 그들의 목을 죄어 오는 것일까.

소설은 역시나 들려주는 이야기가 많다.
특히 아이들의 시선과 어른들의 시선은 분명 차이점이 있지만

하나둘 늘어나는 비밀과 거짓은 어른들의 교묘함에 뒤섞이는 듯하다.
그리고 영악하고 치밀하다.
누군가의 거짓이 큰 오점을 남기기도 하고 때로는 범죄로 이어진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사건은 아주 사소한 데서 시작한다.

예단하지 말 것.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p.375

 

초크맨의 정체를 찾기 위해 쉼 없이 추리해 나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진정한 추리의 대가라면 범인의 윤곽을 잡는데 어려움이 없겠지만 역시 마지막까지 가 보아야 알겠다.
스릴러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독자라면 스릴감은 좀 떨어지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지만
나처럼 공포물과 일도도 친하지 않다면 꽤나 무섭게 읽힐 것이다.
영상화된다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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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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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어린 시절 유괴를 당하고 난민촌에서 힘겨운 나날을 이어갔지만 잠시 문화원에서 책을 탐닉하는 모습에 그녀의 눈부신 성장기가 드디어 시작되는 줄 알았다. 대체 한 소녀의 눈부신 성장기라는 타이틀이 이 소설과 어울린단 말인가.

소녀는 일곱살에 유괴를 당해 어느 집으로 팔려온다. 게다가 자동차에 치여 왼쪽 청력을 잃어버린 소녀에게 유일하게 의지할 사람은 여주인인 노파다. 다행스럽게도 노파는 소녀에게 친절했다. 반면 노파의 아들 부부는 소녀에게 관대하지 못했다. 그래서 노파의 죽음은 달아나야 할 이유가 된다.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자꾸만 떠나야 했던 소녀. 소녀가 자신의 근원이었던 땅에 이르기까지 나는 굴곡진 패턴에 익숙해져야 했다. 열대야로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새벽, 한 소녀의 성장기라기보다 고난기에 가까워 보인다.

소녀의 이름은 라일라, 물론 그 이름도 팔려온 집에서 새로 얻은 이름이다. 소녀는 부모나 집 그리고 자신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인신매매의 희생자가 된 흑인 소녀에게 세상의 시작은 어둠 그 자체다. 밤이라는 의미를 지닌 그녀의 이름처럼.
여주인인 아스마를 전적으로 의지하던 라일라에게 노파의 죽음보다 더 두려운 건 노파의 아들 부부이다. 집으로부터 달아난 어린 소녀가 갈 곳은 소녀를 반겨준 여인숙의 여인들이었다. 고독이 가장 두려웠던 소녀에게 여성들의 보살핌은 행복 그 이상이다. 그러나 잠깐의 자유로웠던 생활은 아들 부부의 덫에 걸리면서 막이 내리는듯했지만 라일라는 기회를 틈타 달아난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를 그물로 잡으려 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나를 끈끈이에 들러붙게 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감상과 그들 자신의 약점으로 내게 덫을 놓았다. - p.116

그렇게 그녀의 힘겨운 여정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삶은 지나치게 고달팠다. 두려움으로부터, 학대로부터, 성적 유린으로부터 달아났지만 살아 숨 쉬어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신분이 없었기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 한채 떠돈다. 파리를 배회하고 바퀴벌레처럼 숨죽이며 지하로 숨어들며 함께 하던 이들은 그녀의 약점을 이용하려고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시민권과 여권을 얻게 되고 음악적 재능을 피워나갈 때는 또 다른 희망도 기대해보았다. 그러나 라일라는 자신의 부족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고향땅을 향해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비록 그곳이 자신의 안전과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땅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상하게도 소설은 결말에 가까울수록 현실과 몽상이 뒤섞인듯한 모호한 느낌을 주어서일까. 라일라의 여정이 끝난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향한 걱정의 끈은 내려놓기로 했다.

"나는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지금처럼 다른 사람들, 다른 사물들 사이를 누비며 살아가고 싶었다." - p.112

소설 속에서 여성들은 주로 성폭력에 노출되어 찢기고 밟힌다. 게다가 라일라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편견 때문에 태생부터 힘겨운 존재다. 정말 불편하고 화가 나지만 르 클레지오가 단순히 연약한 흑인 소녀를 내세워 독자를 힘들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닐 것이다. 인종차별, 난민, 억압, 자유, 구속 등 많은 이슈들이 곳곳에 스며있다. 그리고 지금도 무수히 많은 이들이 평범한 일상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더 서글프고 답답했다.

르 클레지오의 작품 중에 그나마 쉽게 읽히는 책이라고는 하나 역시 재독을 하니 문장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의 다음 작품으로 손이 옮겨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의 작품이 궁금한 분들에게는 황금 물고기를 권하고 싶다.

"아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신의 눈에는 보석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지." - p.146

더 이상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이제 나는 마침내 내 여행의 끝에 다다랐음을 안다. 어느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다.  말라붙은 소금처럼 새하얀 거리, 부동의 벽들, 까마귀 울음소리. 십오 년 전에, 영겁의 시간 전에, 물 때문에 생긴 분쟁, 우물을 놓고 벌인 싸움, 복수를 위하여 힐랄 부족의 적인 크리우이가 부족의 누군가가 나를 유괴해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바닷물에 손을 담그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어느 강의 물을 만지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사막 먼지에 손을 올려놓으며, 나는 내가 태어난 땅을 만진다. 내 어머니의 손을 만진다. - P. 275~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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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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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개정판으로 재출간된 데는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어서인가 보다. 영화와 원작 소설을 즐겨보는 내가 당연히 이 소설을 놓칠 이유가 없었고 게다가 티저 영상마저 본 뒤라 흥분감이 배가 되었다. 그래서 이 한 권의 책 때문에 퇴근을 서두르는 내 모습도, 더위 따위는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도 마냥 행복했다.

 

건지 섬은 영국해협에 있는 여러 개 섬의 집합체인 채널 제도에 속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5년간(1940. 7~1945. 5) 독일군에 의해 점령당하기도 하였으며 점령전에 많은 섬주민들이 잉글랜드로 피신했다. 또한 영국 점령의 교두보로 이용되면서 아픈 역사가 많은 지역이다. 소설의 배경도 나치 점령 시절 건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도 우연찮게 발길이 닿았던 이 섬에서 소재를 얻었고 그렇게 써 내려간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조카가 마무리를 지은 독특한 이력이 눈에 띈다.

줄리엣은 이제 막 출간한 책으로 연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작가다. 그러던 어느 날 건지 섬에 사는 도시로부터 한 장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녀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책을 소장하고 있던 도시는 그 책의 저자인 찰스 램에 대한 정보를 더 얻고자 연락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도시의 첫 편지에서 언급된 건지 감자껍질파이의 북클럽에 대한 줄리엣의 호기심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제 책이 어쩌다 건지 섬까지 갔을까요?
 아마도 책들은 저마다 일종의 은밀한 귀소본능이 있어서 자기한테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가는 모양이에요.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요.' - P.20


이처럼 소설은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고 가는 편지 내용만으로도 사람들이 보인다. 궁금증과 기다림에서 느껴지는 설렘에 읽기가 즐거웠다. 게다가 줄리엣은 점점 건지섬 주민들과 더 많은 편지를 주고받게 된다.  도시의 글에서 느껴지는 진솔함과 선한 이미지에 나마저도 매력을 느낄 정도니 편지가 주는 몰입도가 괜찮았다.

줄리엣은 단순히 북클럽에 대한 호기심으로 출발했지만 다음 소설로 구상하게 될 만큼 건지 섬에 끌리게 된다. 회원들의 손끝을 통해 건너온 전쟁 당시의 이야기는 당연히  흥분되는 소재감이다. 그러나 줄리엣은 점점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고 섬을 찾아간다. 따뜻한 이들의 환대에 마치 고향에 온듯한 감수성에 젖어들며 그들과 일상을 메꾸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북클럽 탄생의 일등공신이었던 엘리자베스의 생사를 알기 위해 그녀의 흔적을 쫓는다. 그녀를 알아갈수록 그녀는 마치 천사 같다. 그래서 그녀는 소설의 또 다른 중심축을 이루는 인물이다.

이렇듯 소설은 북클럽과 엘리자베스라는 여인의 생사를 확인하는 내용으로 전개되지만 처참한 전쟁의 민낯도 드러난다. 잊고 싶은 기억을 기억해내야만 하는 이들에게 영원한 치유는 없다. 다만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져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길 바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을 버틸 수 있게 해준 북클럽의 이야기도 얹히길 바랐다. 책이라곤 펼쳐본 적 없던 이들이 단 한 권의 책만으로도 삶을 새롭게 정의 내리기 시작한 모습을 소개하고 싶었던건 아닐까. 여기서 독자들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책들에 주목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와 제인 오스틴, 에밀리 브론테, 오스카 와일드 등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언급되니 반갑고 또 기꺼이 공감하고 감동받는다.

섬이 고립될수록 힘든 건 적군이나 주민이나 매한가지였다. 굶주림의 고통만큼이나 고립된 공간이 가져다주는 외로움과 향수는 적군의 사기를 무너뜨린다. 전쟁 아래 숨죽인 채 떨리고 있던 증오는 연민이 되고 사랑이 되기도 한다. 전쟁이 끝나면 섬에서 살고 싶다던 독일군의 바램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또 독일군에 대해 잘한 일은 예우를 해주어야 한다며 한 일화를 들려주는데 그들이 적십자 구호품을 오로지 섬 주민들에게만 할당했다던 사실도 징하게 다가왔다.

고통과 슬픔도 유머로 승화시키려는 줄리엣의 긍정적인 면모(‘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내는 최선의 방법은 유머’ -p.56) 덕에 소설은 점점 밝은 빛을 띄게 된다. 그러나 수용소에서 겨우 얕은 숨을 붙잡고 살아남은 래미의 한마디에 비수가 꽂혔다.
"만약 운명이 예정된 것이라면, 신은 악마입니다."

티저 영상을 보니 원작에 크게 비껴가지 않는 듯하다가 로맨스에서는 조금 극적인 장면을 추가한듯하다. 총성에 묻힌 고통의 비명과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들을 생각하면 한없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지만 가슴이 따뜻한 이들로 인해 더없이 기분이 좋아졌던 소설이었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 왜 감자 껍질파이라는 이름의 북클럽이 탄생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전쟁의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지 공감하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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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지 - 18~19세기 서울 양반의 취향
진경환 지음 / 소소의책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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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건은 잠시 놓아두고 잡학다식한 문화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전문서적이 나와서 반가웠다. 이 책은 소 타이틀처럼 주로 서울 양반들의 일상적인 모든 것이 실려있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이 책을 출판하기까지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었는데 저자가 준비한 방대한 자료를 추려내는 일도 만만찮았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중성과 전문성을 적절히 겸비하고 있는 만큼 저자의 자신감도 느껴졌다.
그 시대를 반영하듯 용어가 낯설고 한자 표기도 많다. 다소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흥미롭게 읽히는 부분도 있어서 생각보다 잘 읽힌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주로 18~19세기 조선시대의 서울 양반들의 생활상이다. 이때는 조선의 생활이 안정기에 접어든 때라서 서민들의 삶도 나아지고 있었기에 서민 문화도 발달한 시기이다. 이 책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상류층 잡지 같은 느낌이랄까. 양반들의 기본 의식주 외에 취미생활 및 놀이문화 등을 다루고 있다. 유득공의 [경도잡지]를 참고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충 설명하고 잘못 알려진 부분들은 바로 잡아가면서 한층 다양하고 흥미롭게 엮어놓았다.

어느 시대나 상류사회는 사치스럽고 허례허식이 만연하다. 예를 따지고 절차를 중시하던 유교사회였던 만큼 양반들의 전반적인 생활상이 그러하다. 예법에 따른 옷의 형태나 이름도 달랐지만 의외로 엄격함보다는 개인의 취향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고 한다. 여성들이 지니고 다니던 은장도는 매우 사치스러운 폐물 중 하나로 호신용보다는 노리개 쪽이 더 가까웠다고 하며 패션에 민감한 여성들에게 장옷이나 머리 위에 올리던 가체만 하더라도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웠지만 유행 때문에 오래 이어졌다고 한다.

양반들의 이동 수단인 말에서는 견마 잡이가 눈에 띈다. 지금 시대와 견주어보면 개인기사라고 하면 이해가 되겠다. 양반 체면에 견마 잡이 정도는 있어줘야 모양새가 잡혔었나 보다. 심지어 양쪽에 둘을 데리고 다닌 양반들도 있다 하니 요즘 말로 허세작렬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양반 중에 유생들이 나귀를 즐겨탔다는 점이 새로웠는데 참고 그림을 보자니 그 모양새가 영 불편해 보이고 엉거주춤해 보인다.

양반들의 혼례문화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결혼이란 단어에 담긴 숨은 의미를 짚어보니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이란 단어에는 신랑이 장가 간다는 뜻만 담겨 있어 혼인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 표현임을 말하고 있다. 혼인이라는 단어가 낯설긴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고쳐나가야 함을 강조한다.
양반들의 문화에도 신고식이 존재했고 율곡 이이가 폐습을 개혁하자고 요청할 정도였다니 어딜 가나 인간들의 줄 세우고 대접받으려는 관습은 절대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양반들의 문방사우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참으로 세련되고 고 급지다. 흥미로운 건 처음 보던 소설들의 표지였는데 꽤나 디자인이 정교하고 세련돼 보였고 먹물을 담아두던 통도 예쁜 팬시용품을 떠올리게 한다. 요즘은 가정에서 각가지 동식물을 키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조선시대 서울 양반들이 비둘기를 키우며 경쟁하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서로가 더 좋은 것을 소유하고 비교하는 행위로 인한 만족감을 어찌 포기할 수 있을까.

기호식품은 그 유행의 속도가 빠른 편이지만 담배의 유행은 놀라울 정도다. 위아래부터 부녀자까지 담배를 즐기기 않은 이가 없었으며 담뱃대를 비롯하여 각가지 담배용품을 보니 그 인기를 짐작하고도 남겠다. 
그 외 양반들이 즐겼던 시,  노래, 글, 그림 등을 살펴보며 그들의 재능과 예술적 기질을 살펴볼 수 있었다. 빼어난 시구와 화려한 병풍 등을 보며 그 당시 감각을 느껴볼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먹고살 만하면 예술이 꽃을 피우고 문화가 번성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그리고 그들만의 소비문화가 시대를 선도하고 많은 이들이 상류층 문화를 동경하기도 한다. 반면 과거의 모습 속에서 더 나은 미래를 계획하듯이 지나친 관례나 허례허식은 지양해야 함을 배울 수 있다.
참 유익한 시간이었다. 아이들에게도 좋은 참고서가 될 책으로 책장 한편에 두고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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