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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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어린 시절 유괴를 당하고 난민촌에서 힘겨운 나날을 이어갔지만 잠시 문화원에서 책을 탐닉하는 모습에 그녀의 눈부신 성장기가 드디어 시작되는 줄 알았다. 대체 한 소녀의 눈부신 성장기라는 타이틀이 이 소설과 어울린단 말인가.

소녀는 일곱살에 유괴를 당해 어느 집으로 팔려온다. 게다가 자동차에 치여 왼쪽 청력을 잃어버린 소녀에게 유일하게 의지할 사람은 여주인인 노파다. 다행스럽게도 노파는 소녀에게 친절했다. 반면 노파의 아들 부부는 소녀에게 관대하지 못했다. 그래서 노파의 죽음은 달아나야 할 이유가 된다.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자꾸만 떠나야 했던 소녀. 소녀가 자신의 근원이었던 땅에 이르기까지 나는 굴곡진 패턴에 익숙해져야 했다. 열대야로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새벽, 한 소녀의 성장기라기보다 고난기에 가까워 보인다.

소녀의 이름은 라일라, 물론 그 이름도 팔려온 집에서 새로 얻은 이름이다. 소녀는 부모나 집 그리고 자신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인신매매의 희생자가 된 흑인 소녀에게 세상의 시작은 어둠 그 자체다. 밤이라는 의미를 지닌 그녀의 이름처럼.
여주인인 아스마를 전적으로 의지하던 라일라에게 노파의 죽음보다 더 두려운 건 노파의 아들 부부이다. 집으로부터 달아난 어린 소녀가 갈 곳은 소녀를 반겨준 여인숙의 여인들이었다. 고독이 가장 두려웠던 소녀에게 여성들의 보살핌은 행복 그 이상이다. 그러나 잠깐의 자유로웠던 생활은 아들 부부의 덫에 걸리면서 막이 내리는듯했지만 라일라는 기회를 틈타 달아난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를 그물로 잡으려 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나를 끈끈이에 들러붙게 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감상과 그들 자신의 약점으로 내게 덫을 놓았다. - p.116

그렇게 그녀의 힘겨운 여정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삶은 지나치게 고달팠다. 두려움으로부터, 학대로부터, 성적 유린으로부터 달아났지만 살아 숨 쉬어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신분이 없었기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 한채 떠돈다. 파리를 배회하고 바퀴벌레처럼 숨죽이며 지하로 숨어들며 함께 하던 이들은 그녀의 약점을 이용하려고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시민권과 여권을 얻게 되고 음악적 재능을 피워나갈 때는 또 다른 희망도 기대해보았다. 그러나 라일라는 자신의 부족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고향땅을 향해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비록 그곳이 자신의 안전과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땅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상하게도 소설은 결말에 가까울수록 현실과 몽상이 뒤섞인듯한 모호한 느낌을 주어서일까. 라일라의 여정이 끝난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향한 걱정의 끈은 내려놓기로 했다.

"나는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지금처럼 다른 사람들, 다른 사물들 사이를 누비며 살아가고 싶었다." - p.112

소설 속에서 여성들은 주로 성폭력에 노출되어 찢기고 밟힌다. 게다가 라일라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편견 때문에 태생부터 힘겨운 존재다. 정말 불편하고 화가 나지만 르 클레지오가 단순히 연약한 흑인 소녀를 내세워 독자를 힘들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닐 것이다. 인종차별, 난민, 억압, 자유, 구속 등 많은 이슈들이 곳곳에 스며있다. 그리고 지금도 무수히 많은 이들이 평범한 일상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더 서글프고 답답했다.

르 클레지오의 작품 중에 그나마 쉽게 읽히는 책이라고는 하나 역시 재독을 하니 문장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의 다음 작품으로 손이 옮겨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의 작품이 궁금한 분들에게는 황금 물고기를 권하고 싶다.

"아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신의 눈에는 보석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지." - p.146

더 이상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이제 나는 마침내 내 여행의 끝에 다다랐음을 안다. 어느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다.  말라붙은 소금처럼 새하얀 거리, 부동의 벽들, 까마귀 울음소리. 십오 년 전에, 영겁의 시간 전에, 물 때문에 생긴 분쟁, 우물을 놓고 벌인 싸움, 복수를 위하여 힐랄 부족의 적인 크리우이가 부족의 누군가가 나를 유괴해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바닷물에 손을 담그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어느 강의 물을 만지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사막 먼지에 손을 올려놓으며, 나는 내가 태어난 땅을 만진다. 내 어머니의 손을 만진다. - P. 275~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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