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임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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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은 공동체 생활을 통해 거듭난다.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나라는 존재는 구분 지어지고 분류된다. 소속감, 연대감을 기반으로 내 나라와 내 집 그리고 내 이름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주어지지 못한 이들이 있다. 이민자들, 해외 입양아들, 이주 노동자들, 난민들, 탈북자들. 어디 그들뿐인가. 내 나라 내 공간 안에서도 자아정체성을 잃은 이들은 존재의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이 땅에서 나고 자라 그러한 이들의 아픔을 진지하게 들여다본 적은 없지만 작가의 경험이 녹아있는 문장들을 흡수하니 다양한 아픔의 무게에 마음이 눅눅해진다. 그래서일까 결국 산다는 건 어딘가에 혹은 무언가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써야만 하는 과정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곳이 어디든, 그 자리가 어디든, 우리는 내가 되고자 한다.

<어딘가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라는 표제는 그러한 이미지가 가장 강하다. 미국에서 살다 혼자 한국으로 돌아간 엄마를 만나러 온 남자는 4박 5일 일정이 지나고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급하게 구한 스탠바이 티켓에 발이 묶이고 만다. 계획에 없던 낯선 시간 속에서 미국과 한국이라는 어색한 경계를 떠올리며 불충분했던 시간의 답을 얻고자 한다. 비록 한국에서 겪은 이미지는 불쾌함 투성이였지만 엄마가 다시 찾은 한국을 이해하려 한다. 한국 유학생의 말끝에 걸린 '네가 한국 사람이 아니라 몰라서 그래'라는 말에 그나마 항변할 수 있는 건 한국담배 맛이다.

이렇듯 소개된 9편의 단편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기 위해 떠나고 떠나오고, 다시 돌아오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한국인이지만 미국인으로 살고 있는 폴, 미국 국적을 지닌 채 한국에서 체류 중인 동희,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 된 압시드처럼 공간적 근원에서 방황하는 이들뿐 아니라 동국처럼 자아정체성을 찾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특정한 기억과 냄새를 품고 자신의 근원을 그리워하거나 멈추지 않는 불행의 시간들로 인해 평범한 일상조차 꿈꾸지 못한다.

왜 불행은 끊임없이 한 사람을 따라다닐까. <동국>편에서 자신의 이름 없이 화자의 작은엄마로 누군가의 엄마로만 살던 여인은 불행의 고리를 거두고 자신의 이름을 찾으려 한다. 남자 이름 같아 싫었다던 이름 석자 최. 동. 국. 의 삶을 살겠다고 말하는 그녀를 떠올리니 한때 처녀 동국의 환한 미소가 겹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라스트 북 스토어>에서는 이민자들의 외로운 삶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동생네 부부를 찾은 누나는 헌책방 구경에 들뜬 기분이지만 올케의 우울증 앞에서 눈물을 떨군다. 한때 한 시절 추억을 공유한 그녀가 이민이라는 장벽 앞에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동생네 부부에게 과연 그곳이 마지막 선택지였을까. 다름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 그 낯선 곳에서 헌책방에서 만난 한국적인 것에 마음을 쓸어내리는 것만으로 위안이 될까.

<압시드>는 이름에 얽힌 독특한 사연으로 우픈(우습지만 슬픈) 감정을 던져주지만 정체성에 가장 큰 의문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입양아들의 외로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를 잡았던 생부의 손이 놓아진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글자 ABCD.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것은 그의 이름이 되어 그에게 평생 정체성을 부여하려 했지만 그 무게감은 컸다. 그를 지켜준 미자의 삶도 그녀가 따로 쓰던 냉장고만큼이나 외딴 섬이었다. 압시드가 미자만은 꼭 기억해달라던 말이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분홍에 대하여>에서는 이혼의 아픔 후 낯선 언어 속에서 숨어 사는 여인이 있다. 조화를 만들어 파는 일이 전부인 그녀에게 세상의 다름을 일깨워 준 것도, 남편의 아픔을 이해한 곳도 이 낯선 미국 땅이다. 비록 희미한 경계지점에 서 있지만 핑크와 분홍의 언어적 차이만은 확실히 짚어낸다.

핑크가 절정을 치닫던 어느 순간들의 화려함이라면
분홍은 붉은빛의 모든 열기가 다 빠지며 남긴 지울 수 없는 흔적이었다. -p.168

<히어 앤 데어>에서 동희와 <천천히 초록>에서의 나도 낯선 상처에 데인 채 한국 땅을 밟는다. 돌아왔지만 고향땅이라고 선뜻 안온감을 내주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느껴보려 한다. 동희는 지우지 못하는 번호처럼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늘려가는 것으로, 나는 전쟁의 상흔처럼 뻥 뚫린 삶의 구멍을 태어난 곳을 돌아보는 것으로 메우려 한다.

<로사의 연못>에서 부부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바람대로 그림 같은 집을 짓는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행복한 집이 허상이라는 걸 알았을 땐 남편의 욕망도 검은 물처럼 흘러넘치고 있었다. 왜 이질감에 몸을 떨던 순간을 계속 외면해 온 것일까.
<로드>에서처럼 자신이 살아온 여정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면 집착하는 삶을 놓았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삶은 따스한 엄마의 품속을 찾듯 안정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삼 남매는 엄마의 부탁대로 집으로 가는 여정 동안 무언가를 얻는다.

어쩌면 엄마가 그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집이 아니라 집으로 가는 긴 여정을 생각하는 시간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문득 자신들도 길 위에서 쉬지 않고 달려왔음을 떠올렸다. -p.236

이도 저도 머물지 못하는 이들은 각자의 사연대로 무게를 견뎌낸다. 국가나 인종의 동질성을 지니고도 그 속에서 또 무수히 이질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외로움이 영원하다고 한다면 아무리 애도를 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라스트 북 스토어>에서 올케는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 같다고 절망한다. 그 말을 듣는 나는 더 절망감을 느꼈다. <천천히 초록>에서 '사는 게 다 그래'라는 말에 반감을 가지던 그에 반응에 나도 움찔했다. 어쩔 수 없이 살아야 되는 삶은 없다. 어쩌지 못하는 삶도 없다고 믿고 싶다. 책은 그냥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라고 말하고 있지만 안온감을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것들을 찾고 싶다. <어딘가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의 말미를 데워준 택시 기사의 음성메시지 같은 것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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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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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의 힘이란 더 많은 경험과 생각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세상은 너무나 넓고 우리는 아주 작은 부분만 공유하다 사라지기에 좀 더 가깝게 단편과 마주할 수 있다. 내가 쳐놓은 커튼 뒤의 세상을 바라보는 일. 그것은 일상을 신선하게도 하지만 힘겹고 답답한 인생사에 함께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 그리고 덧없다고 여기는 일에 짧은 한숨과 미소도 지어보게 되는 것이다. 뜯어보면 내 삶의 부분부분이 투영되기도 하고 겪지 않아도 될 일에 대한 안도와 살아보지 않은 날에 대한 기대도 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단편을 그리 즐겨보는 편은 아니다. 늙는다는 것에 단점이라면 잘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짤막한 이야기들은 어느새 흩어지거나 때론 짜깁기가 될 때도 있다. 결국 남는 건 제목으로 드러난 한가지 이야기뿐이다. 오직 두 사람은 김영하라는 작가의 유명세에 구매한 소설이다. 작가도 김영하라는 작가가 궁금하다면 오직 두 사람을 추천한다고 했고 방송에서 본 그의 입담에 조금 매료된 점도 작용했다. 하지만 단편집인 줄은 몰랐다. 그래서일까, 징하게 무거웠다가 살짝 어이없다가 마지막은 아주 답답하게 끝나버려서인지 재미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일곱 편의 이야기는 상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어떤 이야기는 사회적 이슈와 함께 하기도 했고 어떤 이야기는 비유가 강해 모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즉 잘 삼켜지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오직 두 사람]편에서는 두 사람으로 인해 가족이란 공동체의 허와 실을 보았고 [아이를 찾습니다]편에서는 바닥으로 끝도 없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슈트] 편에선 무늬만 아버지인 사람의 유골과 슈트 앞에서 정직한 민낯을 보게 된다. [인생의 원점]편에서는 과거의 환상이 현실에게 한방 걷어 차일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최은지와 박인수]편에서는 거짓은 원래 진실보다 더 강하고 큰 존재임을 보았다. [옥수수와 나]편에서는 자아를 잃어가는 인간들의 모습에 씁쓸함이 밀려왔고[신의 장난]편은 인생의 고난 앞에 신은 대체 무엇을 하는 건지 되묻던 일들이 떠올랐다. 각각의 이야기를 넓게 보니 상실이 보인다. 상실마저 떠안고 사는 이들과 상실의 밑바닥에 주저앉은 이들처럼 인생을 강타당하는 순간에 우리는 어떻게 견뎌야 할지 고민하고 더 나아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을 공감할 그릇을 키워나가야 한다.

깊은 상실감 속에서도 애써 밝은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세상에 많을 것이다. 팩트 따윈 모르겠다.
그냥 그들을 느낀다. 그들이 내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다. - p.271

딸바보와 아버지의 그물망에 갇힌 바보 딸이 있다. 아버지의 편애와 아버지의 부적절한 행실은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한다. 그렇게 남겨진 오직 두 사람, 아버지와 현주의 특별한 관계는 이미 정상궤도를 이탈했다. 빛나 보이던 아버지의 그늘에서 빛을 잃어가는 현주는 그녀와 처지가 비슷한 이의 고백에 놀라 도망치기도 한다. 인생이 아버지로 가득했던 현주에게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이 인생의 변곡점이 될 수 있을까.
둘만의 언어로 얘기하다 혼자가 되었을 때 그녀가 소통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언어를 배우는 수밖에 없다. 문장 바꿔치기의 달인인 그녀의 오빠의 말을 위안 삼으면 살아질 것이다.
현주야,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 있지? 이 말은 영 뒤집을 수가 없네. 뒤집어도 똑같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가 돼.” -p.40

[오직 두 사람], 가장 진실될 수도 있지만 가장 증오하는 사이가 될 수도 있는 사이. 연인, 아빠와 딸, 부부, 친구, 직장 선후배 등의 관계를 들여다보며 둘만의 언어로만 소통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돌아보아야 한다.

세 살 때 유괴된 아이를 찾게 된 남편은 대신 아내를 잃어버린다. [아이를 찾습니다]에서는 상실의 부재를 회복하고도 아무것도 회복된 것이 없다. 집안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전단지 더미 아래에 실종된 아들과 함께 멎어버린 시간이 숨어버렸다. 회복 불능한 상태가 되었더라도 삶은 지속된다. 그러나 과연 아들이 남기고 간 아이가 희망이 될까.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지나고 보니 어찌어찌 견뎌냈다.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은 바로 지금인 것 같았다. -p.65

떠도는 사람은 돌아갈 곳을 그리워하게 된다. 서진에게 있어 [인생의 원점]은 첫사랑과의 추억 속이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 첫사랑을 만나게 된다.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는 유부녀란 사실에 격분하고 그녀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돕지 않는다. 일어나지 않은 자신의 미래가 더 걱정스러웠고 오히려 자신의 안전에 행복감마저 느낀다. 그러나 나는 그를 비겁하다고 비난하지는 못하겠다.
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큰 차이가 있어. 대부분의 사람이 그래. 지금은 날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말이야. 물론 그 마음이 진심이란 것 알아. 하지만 진심이라고 해서 그게 꼭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법은 없어. -p.92

자신을 옥수수로 여기고 있는 남자는 의사의 조언대로 사람이라고 인정하지만 닭들은 모를 거라고 결론 내린다. 즉 자아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현대인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는데 대중과 밀접하게 이어진 작가들의 현실을 보며 조금은 느슨한 문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더 이상 쓸 거리를 상실한 작가가 특정 자극 후 미친 듯이 쓴다. 블랙 코미디를 보는 듯 성욕과 타이핑의 상관관계에 웃다 보니 서글퍼지기도 한다. 누군가의 판단에 흔들리지 않는 이가 누가 있겠냐마는 좀 더 강단 있는 자신만의 판단이 필요하겠다. 그나저나 왜 옥수수였을까.

사람들은 진실을 이야기해도 백 프로 믿지 못하는 귀를 가지게 된다. 오히려 거짓은 뚱뚱하게 몸집이 불어난다. [최은지와 박인수]는 사장과 여직원이라는 수직관계다. 최은지는 미혼으로 아이를 갖기 위해 철저히 계획을 세우고 사장 박인수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극적인 시나리오에 더 열을 올리게 마련이다. 그들은 최은지의 아이가 박인수라고 기정사실화한다. 오해가 이해로 풀리더라도 의심의 눈초리를 완전히 걷어내기도 힘들어 보인다. 나조차도 그런 소문의 조각에 동참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신을 집사와 비교하며 섬뜩한 상황을 묘사한 [신의 장난]은 두어 번 읽어도 모호하다. 두쌍의 남녀가 한방에 갇히고 누군가 그들을 지켜본다.  발버둥쳐도 제자리는 커녕 상황은 더 나빠지고 조여드는 공포감이 극에 달하자 죽는 연기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탈출하지 못하고 계속 갇혀 있게 된다. 신의 존재를 비웃은 것인지, 아둔한 인간을 비웃은 것인지, 아니면 더 나은 미래는 없으니 현실에 만족을 하라는 것인지 난해하다. 폐소공포증이 있는 내게 엄청난 압박감을 주며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이 단편을 읽고 나면 방 탈출 게임은 더 이상 하기 어렵지 않을까.

잃을 것을 두려워만 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은 행복한 순간에도 불행을 걱정하는 존재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은 그 이후의 삶을 정지시킬 수도 있다. 그러한 이들의 주위에는 희망을 열어 줄 통로가 이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는 험한 얼굴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언제든 나도 그와 같이 고통받을 수 있다는 공통된 윤리조차 잃어버린듯하다. [인생의 원점]의 서진처럼 나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오직 두 사람]의 현주처럼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거나  [신의 장난]처럼 누군가를 압박으로 몰아넣는다면 상실의 우울감에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결국 혼자 떠나겠지만 손을 잡고 살아야 하는 존재다. 그리고 그 손에 온기가 가득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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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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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그들에게도 비밀은 있다. - p.394

 

자신의 실수는 관대하지만 타인의 실수는 용납 못하는 사회, 누구에게나 비밀은 존재하지만 타인의 비밀이 드러나면 위선자로 몰아세우는 사회. 물론 사건의 본질에 따라 대중의 판단은 달라지겠지만 공정해야 할 언론도 제 역할을 못할 뿐 아니라 대중의 그릇된 판단과 일방적 비난은 참으로 안타깝다.

바바, 제인은 정치 불륜 스캔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국내외를 떠들썩하게 한 여러 유사 사건들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그리고 내가 루이스(레이첼이 온라인 미팅 사이트에서 만난 세 번째 남자로 아비바에 대해 마구 떠들어댄다.)와 칠십 대 노부부(제인을 보고 아비바를 닮았다며 과거 스캔들을 끄집어 낸다)처럼 내 멋대로 판단하고 결론지은 건 아닌지 부끄럽기도 했다.

이십 대 여성인턴사원과 사십 대 남성하원의원의 스캔들이라면 꽤 오랫동안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도 남는다. 만약 의원이 정치적으로 신뢰를 받고 있는 입장이라면 도덕성에 흠집은 나겠지만 어쨌든 살아남을 수 있다. 게다가 옆에서 묵묵히 남편을 지지하는 아내가 있다면 더더욱.

시작은 아비바였다. 의욕은 넘쳤고 사랑에 대한 믿음도 과했다. 사랑도 일처럼 잘하면 되는 줄 알았다. 두려움보다는 두근거림이 좋았다. 다행히도 아비바는 엄마의 적극적 방해로 죄책감을 느끼며 조용히 끝내려 한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함께 탄 차량을 다른 차가 들이박으면서 요란하게 드러나고 만다.

유부남에게 먼저 들이댄 점만 본다면 아비바는 충분히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다. 누가 먼저 들이댔건 둘은 똑같이 비난을 받고 수치심을 느껴야 했으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모든 비난은 아비바에게로 꽂힌다. 그녀의 실체는 그녀가 익명으로 작성한 블로그 덕에 파헤쳐 질 대로 파헤쳐 진다. 그녀는 더 이상 아비바로 살아갈 수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집안에 숨어 있는 것뿐이다.

소설은 사건의 당사자와 가족 그리고 불륜남의 아내의 심경을 그리고 있다. 레이첼이 먼저 말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하여 삼십 대 아비바인 제인, 그녀의 딸 루비, 불륜남의 아내인 엠베스, 그리고 이십 대의 아비바, 이 다섯 이름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노부부의 대화에서도 잠시 언급되지만 가장 불쌍하다는 당사자의 부모와 불륜남 옆을 지켰단 이유로 냉혈한 소리를 듣는 아내의 심경은 과연 어떨지 생각한 적이 있기에 그녀들의 이야기는 흥미롭게 다가왔다.

레이첼은 필립 로스를 좋아하며 자기 관리에 최선을 다하는 교육자로 남편의 정부와도 차를 마시는 쿨한 여자다.
외동딸을 위해 불륜남의 아내 앞에서 자빠지는 쪽팔림에도 사실을 알려 막으려 했고, 해리 포터에 빠져 수영장 물 위를 둥둥 떠다니던 딸을 엎어끌어내린다.

그렇게 아비바는 집을 떠났고 제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혼자서 딸을 낳고 사업도 시작한다. 이미 대중에게 지친 제인은 수치스러워하기를 거부하며 가던 길을 가기로 한다. 대중에게 이해를 바라는 건 그 뒤다. 열심히 진심을 다해 사는 것만이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그런 진심이 모건 부인 같은 지지자를 옆에 둘 수 있었다. 엄마의 과거와 아빠의 정체가 궁금했던 루비의 일탈에 조금 짜증이 일기도 했지만 십 대 사춘기의 반항이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된다.

정치인의 아내라는 자리는 사랑보다 지켜야 할 것들이 더 많기 마련이다. 엠베스는 가짜 사랑을 사랑이라고 믿었으며 자신의 위치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허울뿐인 관계를 유지한다. 에밀리가 허상으로 만들어낸 앵무새는 그녀의 외로움을 대변한다. 다짜고짜 찾아온 루비를 밀어내지 않은 점도 그녀가 떠안은 외로움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정보의 홍수 속에 갇힌 개개인의 정보로 인해 주홍 글씨는 더 깊게 새겨진다. 잊힐 권리는 신기술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여기서 되새길 점이 한가지 더 있다. 내가 남긴 댓글이 누군가에게 주홍 글씨가 될 수도, 그리고 나에게 주홍 글씨로 되돌아올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비난에도 좀 더 신중해 지지 않을까 한다. 대중이 좀 더 현명해지고 너그러워진다면 제인 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 줄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의 아비바와 같은 여성이 조금 더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길 바라본다.
그나저나 루비의 출생이 너무 화끈한 것 아닌가.^^

 

특별한 건, 인생에서 행복의 열쇠는
언제 입을 다물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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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아델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이현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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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유약함을 알고 거기에 저항 없이 빠져 들어간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섹스를 먹고사는 여자. 밥은 굶어도 섹스는 끊을 수 없다. 피를 갈구하는 뱀파이어처럼 그녀에게 삶의 전부는 섹스다. 욕정을 참기 위해 그녀도 애를 써보았다. 달리고 또 달리는 것으로 일주일씩이나 참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끓어넘치는 욕정 앞에 또 무너진다.
하고 싶어진다는 것, 그건 이미 졌다는 말이다. - p.14
님포매니악이란 단어가 생소하고 색정증이라는 증상을 잘 모른다면 이 소설은 상당히 불쾌하게 다가올 수 있다. [달콤한 노래]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사실도 놀랍지만 소재가 상당히 파격적이긴 하다. 그래서 님포매니악에 대한 궁금증은 아델의 삶으로 답할 수 있겠다.

이런 비슷한 증상으로 배회하는 삶을 그린 영화 두어 편 본 적이 있다. 영화 [셰임]과 [님포매니악 볼륨 1], 이 두 편의 영화는 인간의 욕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님포매니악은 끝까지 보지 못했다. 영상매체가 색정증을 알리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이해시키는 데는 실패한듯하다. 화면은 너무나 자극적이었고 지저분했다. 오히려 나에게는 역효과를 낳은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내게 있어 소설은 그녀의 삶을 이해하기에 조금 더 나은 장르였다. 색정증 환자가 포르노 여주인공이나 창녀와 동일시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것은 우리의 뇌중 전두엽이 문제를 일으켜 생긴 병이라고 인식하면 좀 더 나은 시각으로 소설을 읽어 내려갈 수 있다. 문란한 관계를 놓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더 나은 모습이고 싶었다. 의사 남편과 아들 하나를 두고 기자라는 직함을 가진 삶, 타인의 부러움을 충분히 살 만큼 완벽해 보이지만 그녀의 삶은 철저히 계산된 연기일 뿐이다. 그녀의 연기[演技]는 그녀의 죄책감을 연기[煙氣]처럼 날려보낼 만큼 완벽해 보인다.
아델은 타인들의 시선을 받고 싶다는 욕망 외에 그 어떤 욕구도 가져본 적이 없다. -p.20

그런 기질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아델에게 심각한 건 자신도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단 사실이다. 이미 이성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나 자신보다 더 힘센 어떤 게 날 움직여. - p.207
점점 자극적이고 변태적인 성행위에 이끌려 상대와 장소, 상황을 가리지 않는다. 그녀에게 있어 사랑도 모성본능도 불필요한 감정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결혼이란 제도 속에 들어오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로 인해 남편의 꿈과 이상은 산산조각 났다.

 

만족을 모르는 인간은 주위의 모든 사람을 파괴하는 법이야. -p.276

 

그녀의 모든 정황이 다 드러나고 남편은 경악하고 치를 떤다. 하지만 예상을 엎고 남편은 그녀를 아내의 자리에 둔다. 그림자처럼. 의심과 감시가 일상이 되자 이젠 남편도 정상이 아닌듯하다. 곡기를 끊으면 죽을 수밖에 없듯이 그녀도 서서히 죽어간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건 남자가 아니라 고독이다.
누가 됐든, 누군가의 시선을 더 이상 받지 못한다는 것, 무심한 익명이 된다는 것, 군중 속의 하찮은 돌멩이가 된다는 것이 두렵다. - p.264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라는 문장을 곱씹으며 무엇이 사랑 이야기란 말 인가라며 의문에 휩싸였다. 그냥 추잡한 자신의 욕정을 사랑한 이기적인 여자로만 여겨질 뿐이다. 정상과 정상이 아닌 범주에 성적 쾌락보다는 타인과의 관계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성적 욕구가 넘친다고 죄가 될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욕망으로 타인의 삶을 망친 건 죄다. 그녀는 욕정보다 자신을 아끼는데 애써야 했다. 이기적인 결혼 따윈 걷어치워야 했다.

그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공감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영화나 소설을 통해 그러한 기질을 떠안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즉 기질의 다양성을 인정해야겠지만 솔직히 내 인생의 테두리 안으로는 들이고 싶지 않다. 그녀의 인생이 극단적 선택으로 끝나버릴 것만 같아 안타깝고 그런 그녀를 놓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도 가련하다. 용서해달라고 빌었지만, 그가 다시 시작하려는 삶에 아델이 응하게 될까.

아버지의 장례식으로 다시 세상으로 나온 아델은 욕정에 이끌려 바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만난 남자와 춤을 추는 그녀. 그녀가 좋아한다는 마이클 부블레의 ‘You don't know me’ 를 찾아 듣고 있자니 아델의 지나온 인생 때문에 괜스레 눈물이 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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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은 이야기다. 어쩌면 그냥 흘러가는 이야기다. 수십억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그냥 지나쳐가는 과정이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사랑 이야기는 대체로 그것이 새롭든 진부하든 작가가 말한 대로 중고의 표현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인류가 만들어 놓은 도덕적 잣대와 테두리를 벗어난 이야기는 조금 더 할 말이 많아질 뿐이다.

그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기억에 의존한다. 마치 기억에 관한 논문을 보는 것처럼 심오하고 디테일하다. 기억을 재구성하며 과거의 시간을 재정비하다 보면 이야기보다 관점에 치우치게 된다. 하나의 관점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니 좀 더 중립적 자세를 취하게 된다.

솔직히 재미는 없었다. 다만 흥미로움만 있을 뿐이었다. 연애라는 단어에 솔깃한 이라면 진도가 더디 나갈 수 있다. 이야기는 화자인 폴이 그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열아홉과 마흔여덟 유부녀의 불륜 스캔들 같지만 그가 이야기하고 관찰자가 이야기를 하자 19와 48이라는 숫자가 무의미해진다. 열린 사고(사랑에 조건 따윈 없다.)를 더 열어젖히자 비난과 경멸은 내려놓게 된다. 오히려 관조적인 자세로 바뀌게 되어 듣지 못한 수전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그러나 수전은 기억을 술로 지워버렸으니 들을 방도는 없을 듯하다.

소재는 분명 핫하다. 공통분모라면 그도 그녀도 두 번째 사랑이라는 것뿐 구구절절한 로맨스는 없어 보인다. 세상을 향한 오만함이 있던 열아홉의 어린아이와 섹스리스 부부로 살고 있는 중년 부인의 만남이 세상의 시선을 뒤엎고 아름다운 결말로 이어지기에는 세상은 세속적이고 거칠다. 행복을 위해 내달린 사랑의 도피는 결국 수전의 도덕적 질병(알코올중독) 앞에 무너진다. 그녀가 왜 그랬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억은 없다. 그가 한 최선은 수전의 도덕적 질병을 도덕적 의무로 누르며 그녀를 내려놓지 않은 것이다.

반면 그의 자랑은 달랐다. 나의 관계가 너희의 관계보다 얼마나 더 위반적인지 봐라. 그리고 또,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 또 나에 대한 그녀의 감정의 강도를 봐라. 그게 중요한 것이었다, 당연히 감정의 강도가 행복의 수준을 지배한다. 그렇지 않은가? -p.327

그는 자신의 기질에 삶을 갖다 놓았다. 반면 그녀는 삶에 자신의 기질을 갖다 놓았다. - p.295

영국 사교계의 예의와 허울 때문일까. 그들의 불륜도 제법 점잖아 보인다. 단지 섹스만을 위한 만남도 아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진지하고 행복하게 관계를 이어온 것도 아니다. 툭 던져진 말 한마디에 애정을 곱씹으며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관계라는데 의미가 더해졌을 뿐이다.
그는 그녀를 향한 애정에 정성을 더하고 싶었기에 그녀의 남편과의 일도 눈 감는다. 그래야 어른다워진다고 여겼으리라. 사랑하는 이들이 그렇듯 둘만의 공간을 원해서 도피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수전은 그들만의 사랑에서 비껴난다. 단지 그녀에 대한건 폴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메마른 삶에 폴의 등장은 신선한 자극이다. 섹스횟수를 셀 정도로 소중하게 여기는 듯 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딜레마에 빠진다. 가지고 싶지만 그를 놓아주는 듯하면서도 또 그를 원한다. 그녀가 언제부터 공황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는지, 그녀가 스스로 자신을 낡은 세대 안에 가둔 것인지, 그의 엄마가 찾아와 비난과 조롱을 뒤집어 씌웠는지, 남편의 폭력 앞에 무너졌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알 수 있는 건 슬프게도 그녀의 자신감이 시간을 따라 늙어가고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그가 믿었던 사랑과 진실도 함께.

그녀로 인해 채워진 삶이었다. 하지만 수전이 무너지자 제멋대로인 삶을 구원하겠다는 의지에 수전을 잠시 밀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첫사랑의 스파크는 그만큼 강렬했고 그녀를 다시 찾는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위한 것인지, 그녀를 위한 것인지 애매모호해진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의 조각 중 정말 덜어낸 것은 수치심이었을까, 죄책감이었을까. 결국 그에게 남아있던 연민의 감정이 분노와 실망으로 뒤엉킨 뒤 그녀를 떠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노랫말보다 아팠던 만큼 그에겐 삶의 명암이 분명해진다.

섹스에는 두 사람이 필요했다. 두 사람, 일인칭과 이인칭, 너와 나, 나와 너, 그러나 요즘, 그의 내부 일인칭의 시끌벅적함은 잠잠해졌다.
삼인칭으로 자신의 삶을 보고, 또 사는 것 같았다. 그것이 삶을 더 정확하게 평가하게 해주었다, 고 그는 믿었다. p.292

한번 어떤 것들을 겪으면, 안으로 들어온 그들의 존재는 정말이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p.327

한편의 허구가 주는 이점이라면 인생에 대해 관대해진다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 누가 누굴 더 많이 사랑했는지, 누가 누굴 더 잊지 못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 끝의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도 무의미한 것 같다. 성공한 이야기보다 버려지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의 삶에 더 감동을 받는 이유도 현실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나름대로 그녀의 좋은 모습만을 기억하는 해피엔딩의 삶을 택했다고 본다. 단지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수전이 스스로 자신을 사라지게 방치했다는 것뿐이다.

그게 나의 일이 된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를 잠깐 고심하다 보니 삶의 장벽을 올려다보게 된다. 이와 비슷한 상황으로 비난받는 이들의 사랑도 한낱 이야기일 뿐이라고, 사람이 살아가는 모양새는 천차만별일 뿐이라고 여기며 긍정의 담대함을 되뇐다. 일흔의 작가가 사랑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사랑도 삶도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나와 너를 이해하고 타인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철이 들어 네 말도 맞고 내 말도 맞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중립적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사랑에서는 모든 것이 진실인 동시에 거짓이다.
사랑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한 가지 주제다.

 

며칠 전 들었던 유행가 가사가 언뜻 스친다.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라는 노랫말에 폴을 떠올리니 쓸쓸함이 밀려온다. 비록 그들이 오래 웃을 수는 없었지만 폴에게 있어 인생의 황금기를 함께 한 그녀는 기억보다 더 진한 흔적을 남겼다. 사랑이 파국으로 치달았더라도, 비록 끝까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지는 못했더라도,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는 한 장의 사진처럼 그때를 저장해두는 게 낫지 않을까.

수전은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것이 대실패로 끝났다 해도, 흐지부지되었다 해도, 아예 시작도 못했다 해도, 처음부터 모두 마음속에만 있었다 해도, 그렇다고 해서 그게 진짜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단 하나의 이야기였다. -p.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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