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단편의 힘이란 더 많은 경험과 생각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세상은 너무나 넓고 우리는 아주 작은 부분만 공유하다 사라지기에 좀 더 가깝게 단편과 마주할 수 있다. 내가 쳐놓은 커튼 뒤의 세상을 바라보는 일. 그것은 일상을 신선하게도 하지만 힘겹고 답답한 인생사에 함께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 그리고 덧없다고 여기는 일에 짧은 한숨과 미소도 지어보게 되는 것이다. 뜯어보면 내 삶의 부분부분이 투영되기도 하고 겪지 않아도 될 일에 대한 안도와 살아보지 않은 날에 대한 기대도 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단편을 그리 즐겨보는 편은 아니다. 늙는다는 것에 단점이라면 잘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짤막한 이야기들은 어느새 흩어지거나 때론 짜깁기가 될 때도 있다. 결국 남는 건 제목으로 드러난 한가지 이야기뿐이다. 오직 두 사람은 김영하라는 작가의 유명세에 구매한 소설이다. 작가도 김영하라는 작가가 궁금하다면 오직 두 사람을 추천한다고 했고 방송에서 본 그의 입담에 조금 매료된 점도 작용했다. 하지만 단편집인 줄은 몰랐다. 그래서일까, 징하게 무거웠다가 살짝 어이없다가 마지막은 아주 답답하게 끝나버려서인지 재미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일곱 편의 이야기는 상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어떤 이야기는 사회적 이슈와 함께 하기도 했고 어떤 이야기는 비유가 강해 모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즉 잘 삼켜지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오직 두 사람]편에서는 두 사람으로 인해 가족이란 공동체의 허와 실을 보았고 [아이를 찾습니다]편에서는 바닥으로 끝도 없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슈트] 편에선 무늬만 아버지인 사람의 유골과 슈트 앞에서 정직한 민낯을 보게 된다. [인생의 원점]편에서는 과거의 환상이 현실에게 한방 걷어 차일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최은지와 박인수]편에서는 거짓은 원래 진실보다 더 강하고 큰 존재임을 보았다. [옥수수와 나]편에서는 자아를 잃어가는 인간들의 모습에 씁쓸함이 밀려왔고[신의 장난]편은 인생의 고난 앞에 신은 대체 무엇을 하는 건지 되묻던 일들이 떠올랐다. 각각의 이야기를 넓게 보니 상실이 보인다. 상실마저 떠안고 사는 이들과 상실의 밑바닥에 주저앉은 이들처럼 인생을 강타당하는 순간에 우리는 어떻게 견뎌야 할지 고민하고 더 나아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을 공감할 그릇을 키워나가야 한다.

깊은 상실감 속에서도 애써 밝은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세상에 많을 것이다. 팩트 따윈 모르겠다.
그냥 그들을 느낀다. 그들이 내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다. - p.271

딸바보와 아버지의 그물망에 갇힌 바보 딸이 있다. 아버지의 편애와 아버지의 부적절한 행실은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한다. 그렇게 남겨진 오직 두 사람, 아버지와 현주의 특별한 관계는 이미 정상궤도를 이탈했다. 빛나 보이던 아버지의 그늘에서 빛을 잃어가는 현주는 그녀와 처지가 비슷한 이의 고백에 놀라 도망치기도 한다. 인생이 아버지로 가득했던 현주에게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이 인생의 변곡점이 될 수 있을까.
둘만의 언어로 얘기하다 혼자가 되었을 때 그녀가 소통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언어를 배우는 수밖에 없다. 문장 바꿔치기의 달인인 그녀의 오빠의 말을 위안 삼으면 살아질 것이다.
현주야,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 있지? 이 말은 영 뒤집을 수가 없네. 뒤집어도 똑같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가 돼.” -p.40

[오직 두 사람], 가장 진실될 수도 있지만 가장 증오하는 사이가 될 수도 있는 사이. 연인, 아빠와 딸, 부부, 친구, 직장 선후배 등의 관계를 들여다보며 둘만의 언어로만 소통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돌아보아야 한다.

세 살 때 유괴된 아이를 찾게 된 남편은 대신 아내를 잃어버린다. [아이를 찾습니다]에서는 상실의 부재를 회복하고도 아무것도 회복된 것이 없다. 집안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전단지 더미 아래에 실종된 아들과 함께 멎어버린 시간이 숨어버렸다. 회복 불능한 상태가 되었더라도 삶은 지속된다. 그러나 과연 아들이 남기고 간 아이가 희망이 될까.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지나고 보니 어찌어찌 견뎌냈다.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은 바로 지금인 것 같았다. -p.65

떠도는 사람은 돌아갈 곳을 그리워하게 된다. 서진에게 있어 [인생의 원점]은 첫사랑과의 추억 속이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 첫사랑을 만나게 된다.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는 유부녀란 사실에 격분하고 그녀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돕지 않는다. 일어나지 않은 자신의 미래가 더 걱정스러웠고 오히려 자신의 안전에 행복감마저 느낀다. 그러나 나는 그를 비겁하다고 비난하지는 못하겠다.
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큰 차이가 있어. 대부분의 사람이 그래. 지금은 날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말이야. 물론 그 마음이 진심이란 것 알아. 하지만 진심이라고 해서 그게 꼭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법은 없어. -p.92

자신을 옥수수로 여기고 있는 남자는 의사의 조언대로 사람이라고 인정하지만 닭들은 모를 거라고 결론 내린다. 즉 자아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현대인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는데 대중과 밀접하게 이어진 작가들의 현실을 보며 조금은 느슨한 문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더 이상 쓸 거리를 상실한 작가가 특정 자극 후 미친 듯이 쓴다. 블랙 코미디를 보는 듯 성욕과 타이핑의 상관관계에 웃다 보니 서글퍼지기도 한다. 누군가의 판단에 흔들리지 않는 이가 누가 있겠냐마는 좀 더 강단 있는 자신만의 판단이 필요하겠다. 그나저나 왜 옥수수였을까.

사람들은 진실을 이야기해도 백 프로 믿지 못하는 귀를 가지게 된다. 오히려 거짓은 뚱뚱하게 몸집이 불어난다. [최은지와 박인수]는 사장과 여직원이라는 수직관계다. 최은지는 미혼으로 아이를 갖기 위해 철저히 계획을 세우고 사장 박인수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극적인 시나리오에 더 열을 올리게 마련이다. 그들은 최은지의 아이가 박인수라고 기정사실화한다. 오해가 이해로 풀리더라도 의심의 눈초리를 완전히 걷어내기도 힘들어 보인다. 나조차도 그런 소문의 조각에 동참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신을 집사와 비교하며 섬뜩한 상황을 묘사한 [신의 장난]은 두어 번 읽어도 모호하다. 두쌍의 남녀가 한방에 갇히고 누군가 그들을 지켜본다.  발버둥쳐도 제자리는 커녕 상황은 더 나빠지고 조여드는 공포감이 극에 달하자 죽는 연기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탈출하지 못하고 계속 갇혀 있게 된다. 신의 존재를 비웃은 것인지, 아둔한 인간을 비웃은 것인지, 아니면 더 나은 미래는 없으니 현실에 만족을 하라는 것인지 난해하다. 폐소공포증이 있는 내게 엄청난 압박감을 주며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이 단편을 읽고 나면 방 탈출 게임은 더 이상 하기 어렵지 않을까.

잃을 것을 두려워만 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은 행복한 순간에도 불행을 걱정하는 존재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은 그 이후의 삶을 정지시킬 수도 있다. 그러한 이들의 주위에는 희망을 열어 줄 통로가 이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는 험한 얼굴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언제든 나도 그와 같이 고통받을 수 있다는 공통된 윤리조차 잃어버린듯하다. [인생의 원점]의 서진처럼 나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오직 두 사람]의 현주처럼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거나  [신의 장난]처럼 누군가를 압박으로 몰아넣는다면 상실의 우울감에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결국 혼자 떠나겠지만 손을 잡고 살아야 하는 존재다. 그리고 그 손에 온기가 가득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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