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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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역류시킬 때 날것의 역사보다 오히려 문학적 상상 속에서 깊은 전율을 느낀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 같은 책을 읽고 나면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에 확신이 선다. 올가 토카르추크 역시 수상소감에서 이 말에 확신감을 더했었다.

 

2020년 새해 첫 책으로 <태고의 시간들>을 완독했다. 그리고 이번에 재독했다. 20세기 초 폴란드의 뭉그러진 시간을 입체적으로 살려 낸 작가의 구성력과 글 솜씨에 다시 감탄하면서 이번엔 크워스카가 세상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았듯 나 역시 그렇게 그려보았다.

처음 읽었을때와는 달리 그리 무겁진 않았다. 폴란드의 역사와 특정한 사건들보다 그저 개개인의 흘러가는 시간을 들여다보았다. 인생철학이 이 한 권에 가득이다. 해학과 위트도 있다.

 

'태고'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신화와 종교, 마술적 요소들이 어우러져 실체위에 실제를 보여준다. 작가는 그 공간안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에 시간을 부여한다. 인간과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이 모든것들로부터 철학적 의미와 삶의 영속성을 찾고자 함이었을것이다. 작가에게 더 많은 지면이 할애되었다면 시간을 부여할 수 있는것들은 끝도 없었을것이다. 그렇듯 우리의 삶은 주변의 모든것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작가의 철학적 사유는 그런 시간들속에서 더욱 빛이 난다. 그라인더의 시간, 집의 시간, 과수원의 시간, 보리수의 시간, 랄카의 시간, 버섯균의 시간....

 

'태고'는 그저 느린 걸음으로도 하루면 산책이 가능한 작은 마을이다. 자연의 질서와 신의 보호 아래 자리 잡은 인간들은 덕분에 평안한 삶을 살아간다. 태고 역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시간을 살 뿐이다. 그렇지만 여느 시절이나 삶의 지표를 흔들고 삶의 기둥이 뽑히는 일은 일어난다. 태고의 경계 밖에서 불어오는 나쁜 기운은 그저 술에 취해 발을 헛디뎌 익사하는 불운이 아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거칠고 끔찍한 전쟁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태고에서 남자들이 하나둘 떠나갈 때만 해도 전쟁은 그저 남자들의 영역이라 여겼다. 점점 마을이 색채를 잃어가도 여인네들은 아이를 낳고 장을 보고 청소를 하고 기도를 했다. 서로의 처지를 돌보는 것은 전적으로 여자들의 영역이었다.

여자는 인류가 은밀히 고여 있는 그룹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p.66

 

인간이 아무리 지성위에 인류의 삶을 끌어올려놓아도 어리석은 야망은 인간의 야만성을 불러온다. 전쟁은 그런 것이었다. 모든 것들의 시간을 파괴하여 절망을 붙잡아둔다. 그 절망의 시간을 게노베파와 그녀의 딸 미시아 그리고 다시 그녀의 딸 아델카가 지나온다. 그녀들은 대지가 인간의 피를, 공기는 인간의 호흡을, 총성이 비명을 집어삼키는 순간을 본다. 누군가의 삶이 증발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한 게노베파는 다리가 마비되는 것으로 전쟁을 이해한다.

태고 전체를, 이곳에 깃든 모든 고통과 희망을 제 것으로 소화해버린 -p.19 크워스카 역시 소외로부터 스스로 강해졌음에도 전쟁의 날에 베인다.

세상의 풍파에 온몸이 깔린 플로렌틴카는 밤마다 달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는 것으로 분노를 삼킨다. 남자들이 욕정을 채우고 욕설을 퍼부어댈 때 여자들은 욕정을 누르고 기꺼이 용서한다.

"널 용서하마, 이 늙은 멍청이야!" -p.138

 

세상을 이분법으로 철저히 쪼개놓았던 전쟁은 점점 그 명분이 흐릿해진다. 총알은 적군이 아닌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발사될 뿐이다. 허무한 죽음이 난무한다. 신마저도 인간의 소망을 잘못 이해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렇듯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태고의 남자들에게는 허무주의가 스민다. 인생의 기승전결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종말이라는 결론만 남은듯하다. 미하우에게 주어진 생명은 기적이었지만 전쟁의 트라우마를 안고 돌아왔으며 상속자 포피엘스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허무함을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에 자꾸 빠져든다. 교구신부는 목초지를 노리는 강물에게 분노하는 그런 자신에게 분노하며 파베우는 중요한 사람이 되지 못한 채 인생의 반이 지나버린 현실을 헛되어 한다.

 

시간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덕분에 사람들의 삶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p.317

 

태고는 사방에 깃든 위험요소들이 스멀스멀 삶으로 파고든다. 소유하고 소유되고 싶은 욕망이 다시 들끓는다. 미시아는 해가 거듭될수록 가사와 육아에 망가져가고(불임의 열반은 왜 오지 않는 것인지) 파베우는 허세와 야망에 오염돼간다. 루타는 이국의 향기에 취해 태고의 경계 밖으로 사라졌고 불안정한 생을 쥐고 태어난 이지도르만이 제대로 된 깨달음을 실천하고 사는듯하다. '하느님 맙소사'에서 찾은 깨달음의 경지에 작가는 이지도르를 성인聖人으로 변모시켜가는 게 아닌가 했다. 그러나 똑똑해지면 위험해지는 법. 세상에 관심이 많았을 뿐인데 요주의 인물이 되어 감시를 당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상속자 포피엘스키는 우연히 한 랍비로부터 받은 게임판에 온 정신이 팔린다. 작은 태고의 세계에서 그는 신이 되고 싶었을까. 게임의 최종 단계에 이르기 위해 포피엘스키는 자신의 재산이 야금야금 몰수되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게임의 시간에서 본 여덟 단계의 세계는 태고의 모습이자 현재 우리의 모습이다. 인간은 내적으로 강한 존재이지만 그만큼 자신의 꾐에 빠져 파멸의 길을 걷기도 한다. 그럼에도 선을 넘고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 사이에서 안전밸브를 자처하는 자들로 인해 평균을 유지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포피엘스키의 딸은 세상이 나아지고 있지 않냐며 묻지만 미시아는 고개를 젓는다. 세상은 달라져가지만 나아짐의 개인차는 점점 커져만 간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시간에 몸을 맡긴 사람들은 과거의 고통과 보이지 않는 미래의 사이에서 현재를 그저 견딜 뿐이다. 차라리 인간이 털복숭이 개 랄카처럼 현재만을 보고 듣고 느끼는 존재라면 삶에 무한한 애정을 느끼지 않을까.

 

이지도르 역시 자신의 시간에 틀어박힌다. 다락방에서 은둔할수록 과거의 환영이 그를 괴롭힌다. 그러다 문득 다시 깨닫는다. 일상을 깨어나게 만드는 것들은 낯익은 냄새(엄마냄새, 우유와 스프)와 풍경( 눈 쌓인 겨울 풍경, 초록빛 봄 풍경, 오색찬란한 여름 풍경, 빛바랜 가을 풍경)이라는 것을. 게임판의 최종 단계에서 신은 세상이 절대불변의 질서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이지도르는 넷으로 이루어진 것들의 시간을 발견할 때마다 신과 비슷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러다 다시 과거의 어느 시점(이반 무크타)에서 멈추어 버리지만 차라리 망각을 택함으로써 평온을 찾는다.

어쩌면 우리의 시간에서 절대불변의 진리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숨을 쉴 수 있는 껍데기를 찾아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버텨내는 것 -p.346일뿐이다. 돌봐주는 사람이 있고,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p.348이라면 더 좋고.

파베우처럼 돌아온 아델카에게 "왜 아들을 낳지 않았니?"라며 헛소리를 지껄이면 커피 그라인더만도 못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살아있을 때만 존재했던 그들의 시간이 다시 시간에 의해 흩어져 버리더라도 그 시간 너머에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신도 아니고 꿈꾸는 미지의 세계도 아니다. 미하우가 전리품으로 싸매고 왔던 커피 그라인더는 딸 미시아의 그라인더가 되고 그녀의 딸 아델카의 그라인더가 된다. 그렇듯 커피 그라인더는 삶의 의미와 본질 속에서 영속성을 보여준다. 그라인더는 삼대의 축이자 연결고리가 되어 맛있는 커피 한 잔을 위해 기꺼이 원두를 갈아 낼 것이다.

살아있다는 존재의 즐거움(안전함, 커피, 집의 향기)을 기꺼이 내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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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꾼들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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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작가의 책을 선택할 때는 주로 띠지에 의존하기도 한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라는 타이틀 외에도 30년이나 글을 써온 작가의 단편집이라면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했다. 저자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5월은 제임스 조이스의 이 책을 내내 끼고 있었는데 괜찮은 우연이다. 책에는 열 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의 말대로 특정한 주제로 엮이지는 않았으나 또 그렇다고 그렇게 따로 노는 것 같진 않다. 작가는 작가 특유의 서술 방식과 특색이 있기 때문에 전혀 다른 이야기임에도 비슷한 느낌이 있다.

 

첫 번째 단편 <불평꾼들>속에는 또 다른 책 한 권이 등장한다. 젊은 캐시는 늙은 델라를 위해 책 한 권을 선물한다. 델라의 눈에 그려진 표지의 이미지를 본 순간 어떤 책인지 감이 왔고 너무나 반가웠으며 이 이야기 또한 어떤 뉘앙스일지 감이 왔다.

벨마 웰리스의 <두 늙은 여자>에 등장하는 두 여인은 그야말로 불평꾼들이었다. 인디언 여인 칙디야크와 사는 혹독한 굶주림으로 인해 부족에게 버림받지만 지혜와 끈기로 살아낸다. 늙음은 곧 나약함을 의미하지만 그녀들은 그 늙음을 이용해 자꾸만 대접만 받으려 했다. 부족장에겐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불평만하는 늙은이들을 어느 누가 거두려 하겠는가. 캐시가 델라에게 이 책을 선물했던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어느 날 델라는 "이제 우린 정말 그 두 늙은 여자와 비슷해"라며 캐시에게 말한다. 비록 사냥을 하고 먹을 것을 구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눈이 오던 아침 델라는 결심을 한다.

작가는 어머니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글을 썼다고 한다. 나 역시 <두 늙은 여인>을 읽으며 노년의 삶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단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생각이 많았던 이야기였다. 오래전 그녀들의 삶(책)과 현재 그녀들의 삶이 적절하게 잘 엮여 있어 괜찮은 단편이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나 같은 중생들의 눈엔 참으로 무모해 보일 때가 있다. 가학적인 자기학대를 통해 과연 그들이 얻으려 하는 깨달음 속에서 또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일까. <항공 우편>속 한 남자 역시 여행 중 이질에 걸려 죽어가고 있음에도 도를 닦듯 시간에게 자신을 내맡긴다. 약도 어떠한 처방도 거부한 채 금식에서 해탈의 경지를 꿈꾼다. 그의 여행은 옛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자아로 채워졌다. 마음(영적)으로 몸을 다스리려던 그의 노력은 정말 성공한 것일까. 중요한 건 그가 태평양의 어느 작은 섬에서만큼은 내내 행복감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건 우리는 혼자 와서 혼자 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스위치>의 원작인 <베이스터>는 막판 반전이 돋보였던 단편이었다. 베이스터가 인공수정을 위해 쓰이는 도구인 줄도 처음 알았고. 여자 입장에서 인생이란 참뜻대로 안 되는 것이었지만 남자 입장에서는 만만세였다. 질 좋은 정액을 찾기 위한 그녀의 노력이 헛되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고음악>은 남자들의 성역인가. 이 이야기는 여성들에게 분노를 자아내게 할듯한데.ㅎ 부부는 같은 선상에 있었으나 남자의 몰입(고음악)과 여자의 몰입(쥐인형)이 대상이 달라짐에 화가 난다. 아내가 집안 사무실에서 하는 일은 가짜 일(부업)이고 남자가 시내에 있는 사무실에서 하는 일은 진짜 일(직업)이다. 그럼에도 남자에게 남은 것은 악기 대출금이 전부이고 여자에게는 한 군데의 거래처가 생긴다.

"이 쥐들은 틀림없이 위대해 질 거야. 당신은 이것으로 100만 달러를 벌어들일 거야" -p.186

순간 나는 쥐 인형을 남편의 얼굴에 집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의 뺨에 키스를 한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고음악이다.-p.184 그럼에도 고음악이 부를 가져다주던 시절은 지났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쥐인형)이 너무 볼품없이 차갑다. 예술은 언제나 배가 고프다.

 

인생의 한방을 버리지 못하는 이야기는 <팜베이 리조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곳을 전면적으로 수리할 것이고, 우린 100만 달러를 벌게 될 거야.-p.193

남자들은 왜 이리 헛된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그럼에도 <고음악>의 남편보단 이 남자의 욕망이 더 실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로 100만 달러를 만져본 자니까. 이처럼 부동산 사업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긴다. 남편은 햇빛에 반짝이는 모텔을 위해 중요한 의료 시술도 양보한다. 아내가 꾸는 예언적 꿈이 제발 긍정적이었으면.

 

부부간의 문제를 다룬 <나쁜 사람 찾기>를 읽고 나니 남편을 시험에 들게 한 아내는 과연 잘못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남편에게 베이비시터를 두고 출장을 다니는 건 고양이에게 쥐를 놓아둔 격이 아닌가. 결국 믿음을 저버린 결과로 접근금지 명령을 받은 이 남자. 아내의 나쁜 사람 찾기는 성공했으나 씁쓸하다. 아내는 그린카드(외국인에게 발행하는 영주권)에 대한 고마움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뒤늦게 깨닫는다. 남편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아니었음을. 남편 또한 서로를 잃어버리고 난 뒤에야 서로가 얼마나 서로를 찾고 있었는지. 상대에게서 나쁜 점을 찾는 건 좋은 점을 찾는 것보다 쉽다. 우리는 이 쉬운 일에 빠져들면 안 된다.

 

 

 

 

 

유명한 성과학자가 등장하는 <신탁의 음부>는 별로 하고픈 얘기가 없다. ㅎㅎ 생식의 목적으로만 섹스가 이루어지는 부족. 남성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 희생되는 어린 남자아이들. 음. 이 난해하고 기괴한 설정은 뭘 의미하는 건지. 그들의 문화니 이해하자고? 그의 장편 <미들섹스>에 이 과학자가 등장한다던데 그 책을 읽어봐야 알듯하다.

 

네 남녀의 변화무쌍한 성격을 엿볼 수 있었던 <변화무쌍한 뜰>에서는 잠시 일탈을 꿈꾸던 남녀의 실패한 욕망을 보게 된다. 그것보다 아티초크가 더 궁금했다. 아티초크로 인해 세상과 주변이 아름답고 눈부셔지지 않았던가. 허나 아티초크 요리법을 찾아보면 그리 식욕이 당기진 않는다. 그렇게 식욕은 채워졌으나 배부름이 꺼져가던 자리에서 꿈틀대던 욕망은 이성의 교집합으로 까진 이어지지 못한다.

"우리 두 사람은 뗄 수 없는 사이예요." -p.302

"우린 서로 뗄 수 없는 사이였어요." -p.330 를 이길 수 없었다. 각자의 사연은 각자의 사연일 뿐. 숀의 이루어지지 못한 욕망은 아쉽지만 볼품없는 뜰에서 변화무쌍함을 발견한 맬컴에게 박수를.

 

인간은 수시로 양심의 시험대에 놓인다. 서슬 퍼런 자본주의의 바닥에서 포슬포슬하게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기엔 인생은 시적이지도 달콤하지도 않다. 당장에 의료보험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직장이라면 제아무리 성실하게 열정을 바쳐도 미래는 불투명하니까. 그런 자에게 누군가 한탕을 제의해 온다면 과연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위대한 실험'이라는 출판사의 편집자로 성실히 일하던 켄들. 그는 회계사 피아세키에게 은밀한 제안을 받게 된다. 마치 불장난의 맛을 알아가는 어린아이처럼 횡령의 환상에 빠진다. 그렇지만 그의 <위대한 실험>은 곧 실패로 끝날 것이다. 미국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역설하고 인간의 거친 욕망과 내면을 비꼰 괜찮은 단편이었다. 차라리 지켜지지 못할 약속을 기대하며 사는 게 희망일까.

 

'고소가 취하되었다.'로 시작하는 <신속한 고소>는 화가 난다. 호감도를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함과 동시에 상대의 인생을 망쳐놓는 짓거리는 남녀를 불문하고 너무나 화가 나는 일이다. 인도 소녀는 자신의 나라의 잘못된 제도와 관습을 벗어나기 위해 작당한 짓거리가 한참 '비열'(성폭행) 했다. 그럼에도 고소를 당한 교수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의 인생은 '주홍 글씨'나 다름없어졌다. 주홍 글씨의 결말이 어찌 되었더라. 이 소녀는 주홍 글씨 에세이를 어떻게 쓴 것일까. 그런 것들은 없어지지 않아요.-p.480 그의 상처가 잘 아물기를.

 

나는 장편보다 단편에서 강한 여운을 느낀다. 옮긴이의 말처럼 나 역시 작가의 군더더기 없는 글솜씨에 매료되었다. 작가의 장편이 궁금해서 그의 첫 장편 <처녀들, 자살하다>를 주문했다. 99년도 영화 <처녀 자살 소동>도 볼 예정이다. 제목이 바뀐 이유는 시대상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왜 그가 미국 문단의 주류 작가인지 짐작이 간다. 다양한 소재로 다양한 고민을 해 볼 수 있었던 재미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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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스무 번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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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의 단편은 참으로 틈이 많다. 작가는 비밀스럽게 구멍을 뚫어 놓는다. 친절하게 짜여지지 않은 인생이 '어쩌면' 우리의 진짜 인생일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온전한 결말을 바라고 이해할 수 있는 인과관계를 원한다. '어쩌면'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차갑고 스산하다. 살인사건이 없어도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돌기도 하고 때론 삶의 냉정함과 비정함에 답답하다. 무엇이 그토록 우리를 불안감으로 떠미는 걸까. 단편 속 여러 인물들은 여러 방향과 여러 방식으로 발생되는 죄의식이나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자의든 타의든 모든 상황에서 각자가 그 감정을 대하는 방식에 주목하다 보면 어떤 상황은 너무 지나치고 또 어떤 상황은 안타까운 비극이고 어떤 상황은 오히려 홀가분하기도 하다.

 

작가의 인터뷰를 보니 표제작 '어쩌면 스무 번'은 어떤 소설의 인용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삶의 유한성, 계속될 것 같지만 사실은 일순간에 불과하다는 걸 뜻하는 횟수였다는 기사를 보고 나니 소설 전반의 분위기를 알듯도 하다.

 

인간은 불안을 떨치기 위해 신을 찾고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열쇠를 더 단단히 채운다. 그럼에도 불안의 존재들은 외부가 아닌 가족에서 온다. 외부에서 넘어오는 공포에 쉽게 터지던 소리가 내부에서 나를 옥죄기 시작할 때는 그 소리를 삼켜야만 한다. <어쩌면 스무 번>을 읽는 내내 치미는 짜증과 무력감이 그들만의 감정일까. 아내의 목소리가 커지고 장인의 발작이 시작되면 남편은 옥수수밭에 몸을 숨기고 보름달을 바라본다. 외부가 차단된 옥수수밭이, 아니면 자신만을 환히 비추고 있는 보름달이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건지 모호하지만 어쩌면 힘들고 너저분한 순간이 아닌 그런 찰나의 순간들로 인해 버티는 게 생이 아닐까 한다. 아버지의 목숨이 부부를 잠시나마 사는 것처럼 만들기도 하고, 수면제의 양이 아내의 지친 한숨을 쉬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비난할 수 있을까. 소리를 내지를 수 없기에 조용히 은밀히 그렇게라도 나를 지킬 수밖에 없는 게 가족이라 마음이 무겁다.

사나운 개는 결국 뭐든 물어요. 강도를 물면 다행이지만 아마 식구부터 물 겁니다. 그때 소리를 지르세요. -p.33

 

'아무도 없는' 이라는 노래 가사가 들렸다 말다 하는 순간 운오는 살았고 사촌 형은 죽었다. 그때부터 운오의 삶은 온전히 운오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다. 여름이라도 스스럼없이 한기가 찾아왔고 살아남은 자의 도리를 따지는 자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나는 형의 이름으로 운오를 부른다던 큰어머니에게 경멸감이 들었다. <호텔 창문>에서 큰어머니는 '네가 누구 덕에 살았는지 알아야 한다'라며 운오에게 죄의식을 강요한다. 생과 사가 한순간에 교차된 운명,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에서 운오는 벗어날 수 없다. 불이 난 호텔 오층 창문에서 얼핏 보았던 것이 사람이었는지 아닌지, 사람이었다면 그를 살리기 위해 뛰어든 소방관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운오는 다시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뜻하지 않았지만 타오르는 불처럼 우리는 무언가에 집어삼켜지기도 한다. 벗어날 수 있을까. <홀리데이 홈>에서처럼 산행길에 죽은 친구 때문에 매주 예배를 보고 봉사를 하는 걸로 충분히 죄의식이 덜어질 일이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운오처럼 끝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답답해져온다.

 

어떤 때는 일으켜 세우기만 해도 자기가 넘어진 곳의 깊이를 알 수 있다.-p.72고는 하지만 <홀리데이 홈>의 이진수처럼 끝내 알지 못하는 이도 있다. 눈앞에 차로 인해 죄다 깔아뭉개진 내 상추와 채소들은 보일지언정 오래전 자신이 깔아뭉갠 이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진수. 눈 가리고 아웅하다 두 눈 번뜩이는 부하의 눈빛에 죄책감을 느꼈을까. 그저 그는 눈 가리고 문을 닫아버린다.

 

함께 죽음에서 빠져나온 수오와 무영은 한동안 살아났다는 죄의식에 어떤 말은 감추며 산다. 무영은 일부로 다친 척 연기라도 하며 죽은 친구에 대한 미안함을 덜어낸 반면 수오는 씩씩하게 주어진 시간을 산다. 시간이 지나갈 곳 없던 무영에게 자신의 공간의 일부를 나눠주던 수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완전히 공간을 내어주며 사라진다. 납치 자작극까지 벌이며 친구 무영에게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수오는 구조되기 전 붕괴된 잔해 속에서 친구와 끝말잇기를 했다. 리코더 다음의 단어 대신 이름을 불렀더라면 하는 후회가 수오의 생을 짓눌러왔다. 살면서 또다시 엄습하는 오해들과 죄책감은 그가 사라진 뒤에도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참으로 '더'러운 세상이고 '더'럽게 재수 없다.

 

여보. 나는 돈 새는 깨진 항아리가 되었어요. 열심히 살았는데 기껏 깨진 항아리라니. -p.133

가족을 위해 아등바등 산 결과가 치매와 빚뿐이라면 사라져 버리고 싶지 않을까. 이처럼 한 가장의 죄책감에 아내 미조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고작 낯선 전화를 남편의 목소리(플리즈 콜 미)로 착각하며 술로 지새우는 나날들이 절망스럽다. 딸의 사정 또한 좋지 않다. 사정이 나빠지는 동안 미조는 남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울 방법이 없으니 괜찮겠거니 생각해버린다. -p.138 그렇듯 가족 구성원은 침묵할 뿐이다. 어떤 말은 내내 품고 있지만 결코 소리 내어 말할 수 없게 된다-p.113던 무영의 말처럼 이 가족들 또한 그렇게 지냈다.

 

<좋은 날이 되었네>​속 모자의 모습 역시 <플리즈 콜 미>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살아보려던 엄마는 잘못된 선택으로 범죄자가 되었고 빚만 남는다. 아들의 기억 속 엄마는 현재의 엄마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모습이다. 아들에게만큼은 삶을 미화했고 어떤 말들은 감추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엄마에 대한 기억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과거와 현재의 온도차가 너무나 달라 그는 두렵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그는 양면의 기억 중 따스한 쪽의 기억을 끄집어 낸다. 그것이 그를 조금은 죄책감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녀가 웃으며 흘러가는 건 다 좋은 거라고, 좋은 건 다 흘러간다는 말에 내 마음도 시큰해진다.

 

'부끄러운 짓을 당해봐야 인간이 되는구먼' -p.145이라는 소리를 내뱉으면서도 정작 정호인은 본인이 어떤 인간인지 모른다. 유일한 가족인 딸이 어떤 인생을 지나왔는지조차 모른다. 정소명은 아버지의 후광과 그늘을 골고루 맛보며 외롭게 자랐다. 동창생 중 누군가 그녀의 신분을 도용해서 아이를 입양 보냈고 이 아이가 친모를 찾는다는 소식에 정호인은 그마저도 선전용으로 이용하려 한다. 딸은 그저 자신의 권위를 빛낼 상장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딸은 아버지에게 따져 묻지 않기로 한다. 어차피 그 불리한 전장 속에 자신이 묵인했던 순간이 있었다. 아버지의 자랑거리였던 상장들을 내다 버림으로써 그녀가 조금은 가벼워지길 바란다.

 

마지막 단편 <미래의 끝>은 작가의 어린 시절 꿈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어릴 적 작가의 눈에 가득 들어찬 존재는 동방생명 아줌마였다. 나 역시도 어린 시절에 부모는 늘 바깥에 있는 존재였다. '나'는 외로움을 해소하려다 죄책감을 끼얹게 되지만 잠시나마 보험 아줌마가 내밀어 준 손길과 부서진 미래를 달래주던 아줌마의 마음 씀씀이를 기억한다. 그럼에도 보험이 미래를 구원하기에 시련이란 장벽이 너무 높다. 정말 시련이 닥쳤을 때 '아무도 없는' 걸까. 미래와 끝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참 오묘하다.

 

어쩌면 스무 번은 그 벌어진 틈을 계속 생각해 보게 만든다. 내게 있어 그 방향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을 생각하다 어차피를 떠올리고 비로소라는 결론까지에 이르기에는 어려운 상황들 투성이다. 언제나 희망은 부재중이고 절망에 절망하는 삶이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흘러가는 게 삶이다. 좋은 것이든 나쁜 건 이든. 너무 힘이들땐 수오처럼 잠시 숨어버리는것도 방법일런지 모르겠다. 다만 우리는 방관자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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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마르크 로제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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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수레국화 노인요양원. 수레국화의 꽃말에 따르면 행복한 요양원 정도의 의미겠지만 어디 요양원이란 곳이 행복이란 단어와 나란히 하기 쉬운가. 인생의 종착역이자 삶을 정리해야 하는 곳에서 몸은 망가져가고 정신마저 붙잡고 있기가 힘들다.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도 노인들을 케어하는 이도 극한의 순간들이 즐비한다. 그렇기에 어쩌면 행복보다 안도감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곳이 아닐까.

 

28호실 앞 '내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문장이 적힌 문을 열면 피키에 씨가 있다. 얼마나 상실감이 컸으면 저런 문구를 붙여 놓았을까.

전직 책방지기였던 그는 병으로 인한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맛본다. 그 많던 책을 처분할 수밖에 없는 이의 심정을 헤아리다가 문득 내 책장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더 살아도 사십 년인데 그 사십 년의 만족을 위해 꾸역꾸역 소장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는 말짱한 정신에 몸이 불편한 파킨슨 환자다. 게다가 녹내장까지 덮쳐 그의 세상에 드리운 어둠이 점점 짙어져만 가고 있다. 그는 문밖출입을 거부한 채 식사를 따로 받는다.

 

그의 식사를 들고 문을 두드리고 있는 열여덟 살의 소년 그레구아르는 이 허드렛일이 자신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지 아직은 모른다. 겨우 이 요양원의 주방보조와 잡다한 일거리에 땀을 흘리고 있을 뿐이다. 각자의 삶에 책이 찾아오는 방식은 다양하다. 운이 따르지 않으면 평생 책과는 담을 쌓은 채 지내기도 하고 늦게라도 운을 잡은 이들은 책의 즐거움을 더 오래 만끽하지 못함을 아쉬워한다. 그레구아르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책의 맛을 알게 된다. 피키에 씨의 작전에 말려든 건지, 책 표지가 그를 잡아 끈 건 지 순서를 매길 수는 없지만 피키에 씨를 위해 발을 들인 낭독의 세계 덕에 숨겨진 재능을 발견한다.

 

전혀 교차지점이 없어 보이는 세대가 만나 접점을 찾는 매개체는 책이었다. 학창 시절의 트라우마 따윈 첫날부터 날려버린다. 소리 내어 읽은 문장들에 말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의 마음이 열린다. 타인의 삶에 그토록 젖어들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그레구아르는 전혀 알지 못했다. 점차 요양원 식구들 또한 28호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관심을 두게 되고 그레구아르의 낭독 소리는 요양원 곳곳을 지나 전체를 울리기에 이른다.

 

피키에 씨는 좋은 선생님처럼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책을 선별했고 그레구아르의 낭독 지도까지 더한다. 대중 낭독가로 활동해 온 작가의 경험과 노하우가 돋보인다. 세계 곳곳. 그로 인해 책의 맛에 빠져든 이가 얼마나 많을까. 낭독하는 책들이 대부분 낯설긴 하지만 찰스 부코스키가 등장할 땐 와우~~ 했었다. 그의 어떤 책이 그리 화끈했던 걸까.ㅋ

 

그레구아르는 책으로 인해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얻었다.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뿐 아니라 멋진 여자친구도 생긴다. 행복한 일들이 그의 주위를 맴돈다. 하지만 피키에 씨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은 그레구아르에게는 아픔이다. 갈 시간은 다가오고 피키에 씨는 그걸 핑계 삼아 그레구아르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긴다.

 

피키에 씨는 생의 마지막을 아주 훌륭하게 끝맺음했다. 책방지기로서 책과 연이 없던 청년에게 낭독의 즐거움과 책의 맛을 전하고 떠났으니까.

그레구아르 또한 다시 걸어 나갈 것이다. 문학의 모험 속으로. 그리고 얻게 될 자신만의 삶 속으로.

 

최근 나도 오디오북을 즐겨 듣고 있다. 산책할 때 들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아마 눈이 침침해질 나이가 되면 더욱 즐겨듣고 있지 않을까. 그렇담 청력은 좋아야 할 터인데.ㅋ

책은 이렇듯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그것이 문학의 힘이라고 했던가. 내가 죽은 뒤에도 책은 인간의 삶에 남아 인간성을 회복하는데 애쓰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왜 굳이 피키에 씨를 게이로 설정한 걸까. 험한 세상을 견뎌온 자의 내공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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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6
제임스 조이스 지음, 진선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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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대표 작가 제임스 조이스. 그는 젊은 시절 스티븐 디덜러스라는 필명을 짓는다. 신화와 종교를 바탕으로 한 이름에는 나름의 의지와 포부가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라는 실명 대신 필명으로 발표한 단편들이 빛을 보지 못하자 소설 속 주인공 이름으로까지 삼으며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 간다. 1장의 문은 그의 빛바랜 유년시절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이야기, 어머니의 냄새, 그때 들었던 노래들이 그리움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생의 고민을 암시하는 듯한 문장이 시적으로 녹아있다.

 

조이스의 문장은 유독 촉감이 살아있다. 시력을 잃어가는 그의 현재때문이었으리라. 유심히 읽다 보면 반복되는 문장도 더러 보인다. 그렇기에 시간을 건너뛰는 유년시절의 기억이 좀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아버지의 높은 학구열덕(?)에 클롱고우스 학교에 남겨진 스티븐은 그때부터 세상의 오물과 차가운 공기에 몸서리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의 이름을 이상하게 보는 이부터 짓궂은 아이들, 게다가 부당하고 잔인한 체벌까지. 지리 교과서 귀퉁이에 적힌 그의 세계는 우주까지 펼쳐져 있었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장난스럽게 가볍고 선생님들의 목소리는 크고 무겁다.

 

방학일만을 기다리던 스티븐은 집안의 가세가 기운 덕(?)에 클롱고우스에서 벗어나 벨비디어 칼리지로 편입하지만 그때부터 그는 방황의 조짐을 보인다. 집안은 급속도로 기울고 아버지의 허영에 신물이 난다.

그의 소신이 담긴 글은 이단으로 취급받고 그가 추구하려던 삶에 한 발자국도 다가서지 못하자 증오심만 커져간다. 반항의 불꽃은 일렁이고 거리를 배회하는 횟수는 늘어간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책 속 여인의 이미지가 육욕으로 꿈틀거리자 그는 사창가로 향한다. 실제 그는 아버지의 음주와 폭언과 폭력 그로 인한 어머니의 지나친 신앙심으로 방황의 골이 깊었고 열네 살 때 사창가를 드나들었다고 한다.

 

3장과 4장부터는 종교적 색채가 짙어진다. 천국과 지옥의 형상이 등장한다. 스티븐은 양심을 잊은 채 욕망을 절제하지 못함을 질타하며 자책하고 괴로워한다. 죄에 대한 두려움은 지옥의 형상이 구체화되어 그를 괴롭히고 악에 굴복했다는 사실에 혐오감을 느낀다.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다 못해 고해성사를 한 스티븐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으로 신앙에 지나치게 몰입한다. 그런 이유로 성직자가 되기를 권유받지만 책임감을 감당할 만큼 신앙이 깊지 않음을 깨닫는다. 스티븐의 내면은 자유를 향한 날개가 돋아나고 있었고 예술가의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즈음 스티븐은 자신의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과거 어느 때와 달리, 이제 그의 이상한 이름은 하나의 예언처럼 느껴졌다. -p.227

<파이 이야기>의 파텔과 <시간은 밤>의 안나 또한 이름과 운명을 동일시했었다. 어쩌면 그런 인물들 중에 스티븐은 최고이지 않을까.ㅎ 그 깨달음 이후 그는 인생의 진입로를 찾는다. 결정적으로 바닷가에서 본 한 소녀의 모습에서 생의 에피파니를 경험하며 천국의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름에 집착하고 무언가 찌릿한 순간을 경험하는 과정을 계속 그려보았다. 종교나 도덕적 성찰이 아닌 예술적 성찰이라 그런지 여전히 와닿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탄생하기만 하면 당장 그물을 씌워 날아오르지 못하게 해. 네가 지금 나한테 말한 민족이니 언어니 종교니 하는 그물. 나는 그런 그물을 뚫고 날아오르려고 노력할 거야. -p.337

 

5장에서는 예술가의 고민과 정치와 종교에 대한 폭넓은 고민들이 펼쳐진다. 예술이란 무엇인지,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또 무엇인지, 예술가의 자질과 예술과 욕망의 관계, 연민과 공포의 정의에서 출발한 심미적 관계, 신의 존재와 종교의 본질, 국가의 정체성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고민과 확신을 보여준다. 삶의 소음을 잊고 자연에서 영혼의 고통을 씻으려 했으며 공상과 침묵 또다시 소음 속을 거닐며 정체성을 찾아간다. 그는 종교를 버린다. 그의 눈에 비친 신부의 모습은 그저 노인의 손에 들린 지팡이 같은 존재일 뿐이다. 사상 따위는 자체의 법에 지배를 받으며 영혼 또한 언어의 그늘에 갇힌다.

그럼에도 논쟁은 끊임없다. 그의 소신은 더욱 굳어지고 영혼의 떨림은 예술적 시구로 꿈틀댄다. 이젠 정말 떠날 때가 된 것임을 깨닫는다.

 

조이스의 실제 삶을 보면 그는 떠났으나 끝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더블린이라는 글자가 짓누르던 삶을 글로 옮겨 놓았을 뿐인데 그에게 가해진 벌은 잔인했다. 그의 삶이 이토록 아이러니해진 이유가 그의 지나친 예술가적 기질 때문이었을까.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제임스 조이스는 날아올랐다.

 

그는 4월 5일 자 일기에 이런 문장을 끄적여 놓았다. '사나운 봄, 질주하는 구름들. 아, 인생이여!'

그의 고뇌는 사납고 그의 영혼은 질주한다. 그의 인생은 그렇게 나아가리라.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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