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꾼들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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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작가의 책을 선택할 때는 주로 띠지에 의존하기도 한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라는 타이틀 외에도 30년이나 글을 써온 작가의 단편집이라면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했다. 저자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5월은 제임스 조이스의 이 책을 내내 끼고 있었는데 괜찮은 우연이다. 책에는 열 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의 말대로 특정한 주제로 엮이지는 않았으나 또 그렇다고 그렇게 따로 노는 것 같진 않다. 작가는 작가 특유의 서술 방식과 특색이 있기 때문에 전혀 다른 이야기임에도 비슷한 느낌이 있다.

 

첫 번째 단편 <불평꾼들>속에는 또 다른 책 한 권이 등장한다. 젊은 캐시는 늙은 델라를 위해 책 한 권을 선물한다. 델라의 눈에 그려진 표지의 이미지를 본 순간 어떤 책인지 감이 왔고 너무나 반가웠으며 이 이야기 또한 어떤 뉘앙스일지 감이 왔다.

벨마 웰리스의 <두 늙은 여자>에 등장하는 두 여인은 그야말로 불평꾼들이었다. 인디언 여인 칙디야크와 사는 혹독한 굶주림으로 인해 부족에게 버림받지만 지혜와 끈기로 살아낸다. 늙음은 곧 나약함을 의미하지만 그녀들은 그 늙음을 이용해 자꾸만 대접만 받으려 했다. 부족장에겐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불평만하는 늙은이들을 어느 누가 거두려 하겠는가. 캐시가 델라에게 이 책을 선물했던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어느 날 델라는 "이제 우린 정말 그 두 늙은 여자와 비슷해"라며 캐시에게 말한다. 비록 사냥을 하고 먹을 것을 구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눈이 오던 아침 델라는 결심을 한다.

작가는 어머니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글을 썼다고 한다. 나 역시 <두 늙은 여인>을 읽으며 노년의 삶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단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생각이 많았던 이야기였다. 오래전 그녀들의 삶(책)과 현재 그녀들의 삶이 적절하게 잘 엮여 있어 괜찮은 단편이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나 같은 중생들의 눈엔 참으로 무모해 보일 때가 있다. 가학적인 자기학대를 통해 과연 그들이 얻으려 하는 깨달음 속에서 또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일까. <항공 우편>속 한 남자 역시 여행 중 이질에 걸려 죽어가고 있음에도 도를 닦듯 시간에게 자신을 내맡긴다. 약도 어떠한 처방도 거부한 채 금식에서 해탈의 경지를 꿈꾼다. 그의 여행은 옛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자아로 채워졌다. 마음(영적)으로 몸을 다스리려던 그의 노력은 정말 성공한 것일까. 중요한 건 그가 태평양의 어느 작은 섬에서만큼은 내내 행복감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건 우리는 혼자 와서 혼자 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스위치>의 원작인 <베이스터>는 막판 반전이 돋보였던 단편이었다. 베이스터가 인공수정을 위해 쓰이는 도구인 줄도 처음 알았고. 여자 입장에서 인생이란 참뜻대로 안 되는 것이었지만 남자 입장에서는 만만세였다. 질 좋은 정액을 찾기 위한 그녀의 노력이 헛되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고음악>은 남자들의 성역인가. 이 이야기는 여성들에게 분노를 자아내게 할듯한데.ㅎ 부부는 같은 선상에 있었으나 남자의 몰입(고음악)과 여자의 몰입(쥐인형)이 대상이 달라짐에 화가 난다. 아내가 집안 사무실에서 하는 일은 가짜 일(부업)이고 남자가 시내에 있는 사무실에서 하는 일은 진짜 일(직업)이다. 그럼에도 남자에게 남은 것은 악기 대출금이 전부이고 여자에게는 한 군데의 거래처가 생긴다.

"이 쥐들은 틀림없이 위대해 질 거야. 당신은 이것으로 100만 달러를 벌어들일 거야" -p.186

순간 나는 쥐 인형을 남편의 얼굴에 집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의 뺨에 키스를 한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고음악이다.-p.184 그럼에도 고음악이 부를 가져다주던 시절은 지났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쥐인형)이 너무 볼품없이 차갑다. 예술은 언제나 배가 고프다.

 

인생의 한방을 버리지 못하는 이야기는 <팜베이 리조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곳을 전면적으로 수리할 것이고, 우린 100만 달러를 벌게 될 거야.-p.193

남자들은 왜 이리 헛된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그럼에도 <고음악>의 남편보단 이 남자의 욕망이 더 실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로 100만 달러를 만져본 자니까. 이처럼 부동산 사업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긴다. 남편은 햇빛에 반짝이는 모텔을 위해 중요한 의료 시술도 양보한다. 아내가 꾸는 예언적 꿈이 제발 긍정적이었으면.

 

부부간의 문제를 다룬 <나쁜 사람 찾기>를 읽고 나니 남편을 시험에 들게 한 아내는 과연 잘못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남편에게 베이비시터를 두고 출장을 다니는 건 고양이에게 쥐를 놓아둔 격이 아닌가. 결국 믿음을 저버린 결과로 접근금지 명령을 받은 이 남자. 아내의 나쁜 사람 찾기는 성공했으나 씁쓸하다. 아내는 그린카드(외국인에게 발행하는 영주권)에 대한 고마움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뒤늦게 깨닫는다. 남편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아니었음을. 남편 또한 서로를 잃어버리고 난 뒤에야 서로가 얼마나 서로를 찾고 있었는지. 상대에게서 나쁜 점을 찾는 건 좋은 점을 찾는 것보다 쉽다. 우리는 이 쉬운 일에 빠져들면 안 된다.

 

 

 

 

 

유명한 성과학자가 등장하는 <신탁의 음부>는 별로 하고픈 얘기가 없다. ㅎㅎ 생식의 목적으로만 섹스가 이루어지는 부족. 남성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 희생되는 어린 남자아이들. 음. 이 난해하고 기괴한 설정은 뭘 의미하는 건지. 그들의 문화니 이해하자고? 그의 장편 <미들섹스>에 이 과학자가 등장한다던데 그 책을 읽어봐야 알듯하다.

 

네 남녀의 변화무쌍한 성격을 엿볼 수 있었던 <변화무쌍한 뜰>에서는 잠시 일탈을 꿈꾸던 남녀의 실패한 욕망을 보게 된다. 그것보다 아티초크가 더 궁금했다. 아티초크로 인해 세상과 주변이 아름답고 눈부셔지지 않았던가. 허나 아티초크 요리법을 찾아보면 그리 식욕이 당기진 않는다. 그렇게 식욕은 채워졌으나 배부름이 꺼져가던 자리에서 꿈틀대던 욕망은 이성의 교집합으로 까진 이어지지 못한다.

"우리 두 사람은 뗄 수 없는 사이예요." -p.302

"우린 서로 뗄 수 없는 사이였어요." -p.330 를 이길 수 없었다. 각자의 사연은 각자의 사연일 뿐. 숀의 이루어지지 못한 욕망은 아쉽지만 볼품없는 뜰에서 변화무쌍함을 발견한 맬컴에게 박수를.

 

인간은 수시로 양심의 시험대에 놓인다. 서슬 퍼런 자본주의의 바닥에서 포슬포슬하게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기엔 인생은 시적이지도 달콤하지도 않다. 당장에 의료보험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직장이라면 제아무리 성실하게 열정을 바쳐도 미래는 불투명하니까. 그런 자에게 누군가 한탕을 제의해 온다면 과연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위대한 실험'이라는 출판사의 편집자로 성실히 일하던 켄들. 그는 회계사 피아세키에게 은밀한 제안을 받게 된다. 마치 불장난의 맛을 알아가는 어린아이처럼 횡령의 환상에 빠진다. 그렇지만 그의 <위대한 실험>은 곧 실패로 끝날 것이다. 미국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역설하고 인간의 거친 욕망과 내면을 비꼰 괜찮은 단편이었다. 차라리 지켜지지 못할 약속을 기대하며 사는 게 희망일까.

 

'고소가 취하되었다.'로 시작하는 <신속한 고소>는 화가 난다. 호감도를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함과 동시에 상대의 인생을 망쳐놓는 짓거리는 남녀를 불문하고 너무나 화가 나는 일이다. 인도 소녀는 자신의 나라의 잘못된 제도와 관습을 벗어나기 위해 작당한 짓거리가 한참 '비열'(성폭행) 했다. 그럼에도 고소를 당한 교수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의 인생은 '주홍 글씨'나 다름없어졌다. 주홍 글씨의 결말이 어찌 되었더라. 이 소녀는 주홍 글씨 에세이를 어떻게 쓴 것일까. 그런 것들은 없어지지 않아요.-p.480 그의 상처가 잘 아물기를.

 

나는 장편보다 단편에서 강한 여운을 느낀다. 옮긴이의 말처럼 나 역시 작가의 군더더기 없는 글솜씨에 매료되었다. 작가의 장편이 궁금해서 그의 첫 장편 <처녀들, 자살하다>를 주문했다. 99년도 영화 <처녀 자살 소동>도 볼 예정이다. 제목이 바뀐 이유는 시대상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왜 그가 미국 문단의 주류 작가인지 짐작이 간다. 다양한 소재로 다양한 고민을 해 볼 수 있었던 재미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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