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평점 :
시간을 역류시킬 때 날것의 역사보다 오히려 문학적 상상 속에서 깊은 전율을 느낀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 같은 책을 읽고 나면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에 확신이 선다. 올가 토카르추크 역시 수상소감에서 이 말에 확신감을 더했었다.
2020년 새해 첫 책으로 <태고의 시간들>을 완독했다. 그리고 이번에 재독했다. 20세기 초 폴란드의 뭉그러진 시간을 입체적으로 살려 낸 작가의 구성력과 글 솜씨에 다시 감탄하면서 이번엔 크워스카가 세상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았듯 나 역시 그렇게 그려보았다.
처음 읽었을때와는 달리 그리 무겁진 않았다. 폴란드의 역사와 특정한 사건들보다 그저 개개인의 흘러가는 시간을 들여다보았다. 인생철학이 이 한 권에 가득이다. 해학과 위트도 있다.
'태고'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신화와 종교, 마술적 요소들이 어우러져 실체위에 실제를 보여준다. 작가는 그 공간안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에 시간을 부여한다. 인간과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이 모든것들로부터 철학적 의미와 삶의 영속성을 찾고자 함이었을것이다. 작가에게 더 많은 지면이 할애되었다면 시간을 부여할 수 있는것들은 끝도 없었을것이다. 그렇듯 우리의 삶은 주변의 모든것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작가의 철학적 사유는 그런 시간들속에서 더욱 빛이 난다. 그라인더의 시간, 집의 시간, 과수원의 시간, 보리수의 시간, 랄카의 시간, 버섯균의 시간....
'태고'는 그저 느린 걸음으로도 하루면 산책이 가능한 작은 마을이다. 자연의 질서와 신의 보호 아래 자리 잡은 인간들은 덕분에 평안한 삶을 살아간다. 태고 역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시간을 살 뿐이다. 그렇지만 여느 시절이나 삶의 지표를 흔들고 삶의 기둥이 뽑히는 일은 일어난다. 태고의 경계 밖에서 불어오는 나쁜 기운은 그저 술에 취해 발을 헛디뎌 익사하는 불운이 아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거칠고 끔찍한 전쟁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태고에서 남자들이 하나둘 떠나갈 때만 해도 전쟁은 그저 남자들의 영역이라 여겼다. 점점 마을이 색채를 잃어가도 여인네들은 아이를 낳고 장을 보고 청소를 하고 기도를 했다. 서로의 처지를 돌보는 것은 전적으로 여자들의 영역이었다.
여자는 인류가 은밀히 고여 있는 그룹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p.66
인간이 아무리 지성위에 인류의 삶을 끌어올려놓아도 어리석은 야망은 인간의 야만성을 불러온다. 전쟁은 그런 것이었다. 모든 것들의 시간을 파괴하여 절망을 붙잡아둔다. 그 절망의 시간을 게노베파와 그녀의 딸 미시아 그리고 다시 그녀의 딸 아델카가 지나온다. 그녀들은 대지가 인간의 피를, 공기는 인간의 호흡을, 총성이 비명을 집어삼키는 순간을 본다. 누군가의 삶이 증발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한 게노베파는 다리가 마비되는 것으로 전쟁을 이해한다.
태고 전체를, 이곳에 깃든 모든 고통과 희망을 제 것으로 소화해버린 -p.19 크워스카 역시 소외로부터 스스로 강해졌음에도 전쟁의 날에 베인다.
세상의 풍파에 온몸이 깔린 플로렌틴카는 밤마다 달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는 것으로 분노를 삼킨다. 남자들이 욕정을 채우고 욕설을 퍼부어댈 때 여자들은 욕정을 누르고 기꺼이 용서한다.
"널 용서하마, 이 늙은 멍청이야!" -p.138
세상을 이분법으로 철저히 쪼개놓았던 전쟁은 점점 그 명분이 흐릿해진다. 총알은 적군이 아닌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발사될 뿐이다. 허무한 죽음이 난무한다. 신마저도 인간의 소망을 잘못 이해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렇듯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태고의 남자들에게는 허무주의가 스민다. 인생의 기승전결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종말이라는 결론만 남은듯하다. 미하우에게 주어진 생명은 기적이었지만 전쟁의 트라우마를 안고 돌아왔으며 상속자 포피엘스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허무함을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에 자꾸 빠져든다. 교구신부는 목초지를 노리는 강물에게 분노하는 그런 자신에게 분노하며 파베우는 중요한 사람이 되지 못한 채 인생의 반이 지나버린 현실을 헛되어 한다.
시간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덕분에 사람들의 삶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p.317
태고는 사방에 깃든 위험요소들이 스멀스멀 삶으로 파고든다. 소유하고 소유되고 싶은 욕망이 다시 들끓는다. 미시아는 해가 거듭될수록 가사와 육아에 망가져가고(불임의 열반은 왜 오지 않는 것인지) 파베우는 허세와 야망에 오염돼간다. 루타는 이국의 향기에 취해 태고의 경계 밖으로 사라졌고 불안정한 생을 쥐고 태어난 이지도르만이 제대로 된 깨달음을 실천하고 사는듯하다. '하느님 맙소사'에서 찾은 깨달음의 경지에 작가는 이지도르를 성인聖人으로 변모시켜가는 게 아닌가 했다. 그러나 똑똑해지면 위험해지는 법. 세상에 관심이 많았을 뿐인데 요주의 인물이 되어 감시를 당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상속자 포피엘스키는 우연히 한 랍비로부터 받은 게임판에 온 정신이 팔린다. 작은 태고의 세계에서 그는 신이 되고 싶었을까. 게임의 최종 단계에 이르기 위해 포피엘스키는 자신의 재산이 야금야금 몰수되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게임의 시간에서 본 여덟 단계의 세계는 태고의 모습이자 현재 우리의 모습이다. 인간은 내적으로 강한 존재이지만 그만큼 자신의 꾐에 빠져 파멸의 길을 걷기도 한다. 그럼에도 선을 넘고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 사이에서 안전밸브를 자처하는 자들로 인해 평균을 유지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포피엘스키의 딸은 세상이 나아지고 있지 않냐며 묻지만 미시아는 고개를 젓는다. 세상은 달라져가지만 나아짐의 개인차는 점점 커져만 간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시간에 몸을 맡긴 사람들은 과거의 고통과 보이지 않는 미래의 사이에서 현재를 그저 견딜 뿐이다. 차라리 인간이 털복숭이 개 랄카처럼 현재만을 보고 듣고 느끼는 존재라면 삶에 무한한 애정을 느끼지 않을까.
이지도르 역시 자신의 시간에 틀어박힌다. 다락방에서 은둔할수록 과거의 환영이 그를 괴롭힌다. 그러다 문득 다시 깨닫는다. 일상을 깨어나게 만드는 것들은 낯익은 냄새(엄마냄새, 우유와 스프)와 풍경( 눈 쌓인 겨울 풍경, 초록빛 봄 풍경, 오색찬란한 여름 풍경, 빛바랜 가을 풍경)이라는 것을. 게임판의 최종 단계에서 신은 세상이 절대불변의 질서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이지도르는 넷으로 이루어진 것들의 시간을 발견할 때마다 신과 비슷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러다 다시 과거의 어느 시점(이반 무크타)에서 멈추어 버리지만 차라리 망각을 택함으로써 평온을 찾는다.
어쩌면 우리의 시간에서 절대불변의 진리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숨을 쉴 수 있는 껍데기를 찾아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버텨내는 것 -p.346일뿐이다. 돌봐주는 사람이 있고,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p.348이라면 더 좋고.
파베우처럼 돌아온 아델카에게 "왜 아들을 낳지 않았니?"라며 헛소리를 지껄이면 커피 그라인더만도 못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살아있을 때만 존재했던 그들의 시간이 다시 시간에 의해 흩어져 버리더라도 그 시간 너머에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신도 아니고 꿈꾸는 미지의 세계도 아니다. 미하우가 전리품으로 싸매고 왔던 커피 그라인더는 딸 미시아의 그라인더가 되고 그녀의 딸 아델카의 그라인더가 된다. 그렇듯 커피 그라인더는 삶의 의미와 본질 속에서 영속성을 보여준다. 그라인더는 삼대의 축이자 연결고리가 되어 맛있는 커피 한 잔을 위해 기꺼이 원두를 갈아 낼 것이다.
살아있다는 존재의 즐거움(안전함, 커피, 집의 향기)을 기꺼이 내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