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스무 번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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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의 단편은 참으로 틈이 많다. 작가는 비밀스럽게 구멍을 뚫어 놓는다. 친절하게 짜여지지 않은 인생이 '어쩌면' 우리의 진짜 인생일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온전한 결말을 바라고 이해할 수 있는 인과관계를 원한다. '어쩌면'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차갑고 스산하다. 살인사건이 없어도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돌기도 하고 때론 삶의 냉정함과 비정함에 답답하다. 무엇이 그토록 우리를 불안감으로 떠미는 걸까. 단편 속 여러 인물들은 여러 방향과 여러 방식으로 발생되는 죄의식이나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자의든 타의든 모든 상황에서 각자가 그 감정을 대하는 방식에 주목하다 보면 어떤 상황은 너무 지나치고 또 어떤 상황은 안타까운 비극이고 어떤 상황은 오히려 홀가분하기도 하다.

 

작가의 인터뷰를 보니 표제작 '어쩌면 스무 번'은 어떤 소설의 인용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삶의 유한성, 계속될 것 같지만 사실은 일순간에 불과하다는 걸 뜻하는 횟수였다는 기사를 보고 나니 소설 전반의 분위기를 알듯도 하다.

 

인간은 불안을 떨치기 위해 신을 찾고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열쇠를 더 단단히 채운다. 그럼에도 불안의 존재들은 외부가 아닌 가족에서 온다. 외부에서 넘어오는 공포에 쉽게 터지던 소리가 내부에서 나를 옥죄기 시작할 때는 그 소리를 삼켜야만 한다. <어쩌면 스무 번>을 읽는 내내 치미는 짜증과 무력감이 그들만의 감정일까. 아내의 목소리가 커지고 장인의 발작이 시작되면 남편은 옥수수밭에 몸을 숨기고 보름달을 바라본다. 외부가 차단된 옥수수밭이, 아니면 자신만을 환히 비추고 있는 보름달이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건지 모호하지만 어쩌면 힘들고 너저분한 순간이 아닌 그런 찰나의 순간들로 인해 버티는 게 생이 아닐까 한다. 아버지의 목숨이 부부를 잠시나마 사는 것처럼 만들기도 하고, 수면제의 양이 아내의 지친 한숨을 쉬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비난할 수 있을까. 소리를 내지를 수 없기에 조용히 은밀히 그렇게라도 나를 지킬 수밖에 없는 게 가족이라 마음이 무겁다.

사나운 개는 결국 뭐든 물어요. 강도를 물면 다행이지만 아마 식구부터 물 겁니다. 그때 소리를 지르세요. -p.33

 

'아무도 없는' 이라는 노래 가사가 들렸다 말다 하는 순간 운오는 살았고 사촌 형은 죽었다. 그때부터 운오의 삶은 온전히 운오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다. 여름이라도 스스럼없이 한기가 찾아왔고 살아남은 자의 도리를 따지는 자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나는 형의 이름으로 운오를 부른다던 큰어머니에게 경멸감이 들었다. <호텔 창문>에서 큰어머니는 '네가 누구 덕에 살았는지 알아야 한다'라며 운오에게 죄의식을 강요한다. 생과 사가 한순간에 교차된 운명,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에서 운오는 벗어날 수 없다. 불이 난 호텔 오층 창문에서 얼핏 보았던 것이 사람이었는지 아닌지, 사람이었다면 그를 살리기 위해 뛰어든 소방관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운오는 다시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뜻하지 않았지만 타오르는 불처럼 우리는 무언가에 집어삼켜지기도 한다. 벗어날 수 있을까. <홀리데이 홈>에서처럼 산행길에 죽은 친구 때문에 매주 예배를 보고 봉사를 하는 걸로 충분히 죄의식이 덜어질 일이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운오처럼 끝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답답해져온다.

 

어떤 때는 일으켜 세우기만 해도 자기가 넘어진 곳의 깊이를 알 수 있다.-p.72고는 하지만 <홀리데이 홈>의 이진수처럼 끝내 알지 못하는 이도 있다. 눈앞에 차로 인해 죄다 깔아뭉개진 내 상추와 채소들은 보일지언정 오래전 자신이 깔아뭉갠 이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진수. 눈 가리고 아웅하다 두 눈 번뜩이는 부하의 눈빛에 죄책감을 느꼈을까. 그저 그는 눈 가리고 문을 닫아버린다.

 

함께 죽음에서 빠져나온 수오와 무영은 한동안 살아났다는 죄의식에 어떤 말은 감추며 산다. 무영은 일부로 다친 척 연기라도 하며 죽은 친구에 대한 미안함을 덜어낸 반면 수오는 씩씩하게 주어진 시간을 산다. 시간이 지나갈 곳 없던 무영에게 자신의 공간의 일부를 나눠주던 수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완전히 공간을 내어주며 사라진다. 납치 자작극까지 벌이며 친구 무영에게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수오는 구조되기 전 붕괴된 잔해 속에서 친구와 끝말잇기를 했다. 리코더 다음의 단어 대신 이름을 불렀더라면 하는 후회가 수오의 생을 짓눌러왔다. 살면서 또다시 엄습하는 오해들과 죄책감은 그가 사라진 뒤에도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참으로 '더'러운 세상이고 '더'럽게 재수 없다.

 

여보. 나는 돈 새는 깨진 항아리가 되었어요. 열심히 살았는데 기껏 깨진 항아리라니. -p.133

가족을 위해 아등바등 산 결과가 치매와 빚뿐이라면 사라져 버리고 싶지 않을까. 이처럼 한 가장의 죄책감에 아내 미조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고작 낯선 전화를 남편의 목소리(플리즈 콜 미)로 착각하며 술로 지새우는 나날들이 절망스럽다. 딸의 사정 또한 좋지 않다. 사정이 나빠지는 동안 미조는 남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울 방법이 없으니 괜찮겠거니 생각해버린다. -p.138 그렇듯 가족 구성원은 침묵할 뿐이다. 어떤 말은 내내 품고 있지만 결코 소리 내어 말할 수 없게 된다-p.113던 무영의 말처럼 이 가족들 또한 그렇게 지냈다.

 

<좋은 날이 되었네>​속 모자의 모습 역시 <플리즈 콜 미>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살아보려던 엄마는 잘못된 선택으로 범죄자가 되었고 빚만 남는다. 아들의 기억 속 엄마는 현재의 엄마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모습이다. 아들에게만큼은 삶을 미화했고 어떤 말들은 감추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엄마에 대한 기억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과거와 현재의 온도차가 너무나 달라 그는 두렵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그는 양면의 기억 중 따스한 쪽의 기억을 끄집어 낸다. 그것이 그를 조금은 죄책감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녀가 웃으며 흘러가는 건 다 좋은 거라고, 좋은 건 다 흘러간다는 말에 내 마음도 시큰해진다.

 

'부끄러운 짓을 당해봐야 인간이 되는구먼' -p.145이라는 소리를 내뱉으면서도 정작 정호인은 본인이 어떤 인간인지 모른다. 유일한 가족인 딸이 어떤 인생을 지나왔는지조차 모른다. 정소명은 아버지의 후광과 그늘을 골고루 맛보며 외롭게 자랐다. 동창생 중 누군가 그녀의 신분을 도용해서 아이를 입양 보냈고 이 아이가 친모를 찾는다는 소식에 정호인은 그마저도 선전용으로 이용하려 한다. 딸은 그저 자신의 권위를 빛낼 상장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딸은 아버지에게 따져 묻지 않기로 한다. 어차피 그 불리한 전장 속에 자신이 묵인했던 순간이 있었다. 아버지의 자랑거리였던 상장들을 내다 버림으로써 그녀가 조금은 가벼워지길 바란다.

 

마지막 단편 <미래의 끝>은 작가의 어린 시절 꿈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어릴 적 작가의 눈에 가득 들어찬 존재는 동방생명 아줌마였다. 나 역시도 어린 시절에 부모는 늘 바깥에 있는 존재였다. '나'는 외로움을 해소하려다 죄책감을 끼얹게 되지만 잠시나마 보험 아줌마가 내밀어 준 손길과 부서진 미래를 달래주던 아줌마의 마음 씀씀이를 기억한다. 그럼에도 보험이 미래를 구원하기에 시련이란 장벽이 너무 높다. 정말 시련이 닥쳤을 때 '아무도 없는' 걸까. 미래와 끝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참 오묘하다.

 

어쩌면 스무 번은 그 벌어진 틈을 계속 생각해 보게 만든다. 내게 있어 그 방향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을 생각하다 어차피를 떠올리고 비로소라는 결론까지에 이르기에는 어려운 상황들 투성이다. 언제나 희망은 부재중이고 절망에 절망하는 삶이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흘러가는 게 삶이다. 좋은 것이든 나쁜 건 이든. 너무 힘이들땐 수오처럼 잠시 숨어버리는것도 방법일런지 모르겠다. 다만 우리는 방관자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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