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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칠십육세의 노모는 딸의 두 번째 사위에게 선인장이 꽃을 피울 것 같아 초대에 응할 수 없다고 한다. 길거리를 배회하는 고양이와 부랑자들, 임신한 하녀들에게 대문을 열어주던, 자연의 경이로움을 알고 생명의 고귀함을 알았던 여인.
그런 여인의 딸 콜레트.
<여명>은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문학이 그녀의 삶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나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았는데 영화를 먼저 보는 편이 책을 흡수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녀의 인생의 롤 모델은 어머니(시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머니와의 편지는 그녀가 글을 쓰고 진취적인 여성으로 거침없이 나갈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순수한 어머니의 삶과는 달리 그녀가 새벽의 문턱에서 품었던 것이 선인장 꽃이 아님을 고백하지만 열정과 수치스러움의 혼란에서 갈등하던 그녀에게 어머니는 언제나 딸의 사랑을 응원하는 것으로 화답한다.
그녀는 자신의 굴곡진 삶에 어머니를 삶을 대입시킨다. 시작을 소유하기 위해 시간의 사닥다리를 오르던 어머니. 아무도 눈뜨지 않은 시간 속에서 갖는 자신만의 세계를 탐닉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평판이 좋지 못했던 자신의 삶이지만 나름의 헌신을 다했음을 변명한다. 하지만 넘나들 수 없는 어머니의 세계에 비해 자신은 어딘가 늘 부족해 보인다. 삶의 연륜을 어찌 따라잡을 수 있을까. "데어봐야 뜨거움을 안다"던 명언과 기다림이란 우아한 예절과 사양할 줄 아는 최고의 멋임을 알려준것도 어머니였다. 그녀가 맞이한 여명의 순간순간 앞에서.
언제나 너의 삶을 살라던 어머니의 조언이 있었음에도 삶에 비치는 불안감은 그녀의 생각 곳곳에서 묻어난다. 이곳이 나의 마지막 집일까? 나는 단지 혼자가 될 뿐이지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녀를 떠나버린 많은 남자들 덕에 우정의 증거를 보여주었던 친구들이 더는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까지도. 그리고 나도 붙잡아주기를····· 이라는 끝맺음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랑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녀의 삶은 온통 사랑이었다. 낭만이었고 열정이었고 쾌락이었다. 평온과 불안이 뒤섞인 혼돈 속에서 그녀는 사랑으로 매번 새로이 태어났다. 그녀가 얼마나 매력있는 여성이었으면 황혼의 나이에도 젊은 사랑이 찾아올까. 영화를 보고 나니 이 문장의 의미와 그녀의 매력을 더 알것만 같다.
정말 그랬다. 여자들은 행복한 사랑을 해본 횟수만큼 많은 고향을 가지며,
사랑의 고통이 치유되는 하늘 아래서 매번 새로 태어난다. -p.19
그녀는 이제 사랑 때문에 이는 마음의 동요와 그녀를 둘러싼 관계들에 신중해야 한다. 어머니의 연민이란 스스로가 편하기 위한 이기심이었음을 깨닫자 그녀는 이제 진정한 나의 삶을 살아갈 준비를 한다. 삶과 이상이 언제나 같지 않아도 됨을 그녀의 선택에서 보았다. 여명이 밝아오기 전에 그녀는 그녀를 위하고, 엘렌을 위하고, 마지막으로 비알을 위한 선택을 한다. 사랑하지만 보낼 수밖에 없는. 그 이해 못 할 유행가 가사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심적 고뇌가 너무나 솔직해서 맘이 아프기보다는 그저 응원하게 된다.
날이 샘과 동시에 느꼈을 그 새로운 기분은 사랑으로 충만해질 순간들이 아니라 생을 향한 그저 그런 끄덕임을 다시 한번 새기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아름다운 계절을 오직 자신만을 위해 헌신하고자 한다. 이웃들과의 즉석 만찬에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와 수확을 앞둔 포도송이에서 느끼는 삶의 충만감. 해가 다시 떠올랐을 때 자신이 해야 하는 일 또한 포도를 수확하는 일상적인 과정임을 깨닫기까지 그녀의 삶은 수만 가지 형용사가 가득한 삶이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첫 작품에 대해 지나치게 형용사가 많다는 이유로 출판을 거절을 한다. 남자들의 단순함이란... ㅋ
"가을에만 수확을 하리니·····"
이 말처럼 사랑의 유통기한을 확실히 표현한 문장이 있을까.
무엇보다 그녀에게 더 끌렸던 이유도 자연과 동물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인간의 탐욕과 위선에 지쳐갈수록, 거친 인생에 맘이 쓸려갈수록 시골 풍경을 동경하고 동물들의 작은 몸짓에도 맘을 기울인다. 그녀의 문장에는 이토록 자연과 동물에 관한 은유가 돋보인다. 어떤 문장에서는 그녀 스스로의 고통을 엿볼 수 있고 어떤 문장에서는 남녀의 관점의 차이를 재미나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동물들은 사랑의 배신으로 고통스러워할 때의 나를 가장 싫어했다는 것을. 그들은 내에서 절대적 패배와 그로 인한 고통의 냄새를 맡았다. -p.28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식물들은 피곤해지나 보다. 꽃 전시장의 화초들은 매일 저녁 사람들의 지나친 찬사에 죽어간다.-p.54
물구덩이 곁에서, 암고양이는 음푹한 작은 발로 물방울을 움켜잡고는 그 물방울이 넘쳐흐르는 모양을 바라본다. 아마도 여자애들은 목걸이를 가지고 저렇게 놀리라····· 그러나 비가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린 수고양이는, 아직까지도 비가 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놈은 현관에 앉아 한참 동안 비를 바라보다가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었다. - p.159
특히 그녀의 각별한 고양이 사랑 때문에 그녀가 더 좋아진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끌림이다.
동물들은 얼마나 감탄스런 존재인가? 이 고양이는 특별하다. 마치 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친구처럼, 나무랄 데 없는 애인처럼. -p.55
자, 이제 개와 고양이와 함께 바다로부터 올라오는 동쪽의 어슴푸레한 보랏빛을 만나러 가자. -p.63
자연이 화가 단단히 났나 보다. 한파 때문에 몸도 마음도 힘들다. 프로방스의 여름 때문에 여름빛이 그리운 지금이다. 이 책을 새벽녘에 펼치면 또 어떤 느낌일까. 아침잠이 많은 내가 감당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새벽녘에 눈이 떠지는 날이 온다면 반드시 여명을 펼쳐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