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작가 10주기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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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해가 흘렀다. 작년 9주기를 맞아 들였던 책이 <대범한 밥상>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기념에세이가 출간되어 반가웠다. 국문학을 자꾸만 등한시하면 안되는데 일년동안 <토지>외엔 그렇다하게 읽은 책이 별로 없어 보인다. 이번 10주기 기념 에세이는 산문 660여 편에서 35편을 선별했다고 한다. 늦게 문단에 등단했지만 삶이 곧 쓰기였던 작가. 그 글속에 담긴 삶의 진정성을 알기에 읽고 또 읽게 된다.

 

제목이 입에 잘 붙지 않았다. 모래한 알? 모래한 톨? 모래만 한? ㅋ 모든 원인은 세세히 살피려 들지 않는 나의 허술함때문이겠지만. 이렇듯 살면서 우리는 이런 비슷한 경우를 자주 접한다. 단순히 익숙한 것에서 오는 착각, 보이는 것만 보려는 고집, 아는것으로만 재단하려는 오만. 제목은 진실만을 쓰겠다는 신념에서 따온 것이었다.

 

박완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고운'이다. 그냥 글들이 다 곱다. 물론 세상과 사람을 향한 작가님의 마음씀씀이가 고와서일테지만. 거짓없고 꾸밈없는 소박함으로 물든 곱디 고운 글들이다. 쉽게 읽히지만 이렇게 쓰기가 쉽지 않다. 진심이, 진실이 들어가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문장들. 그런 모래알같은 순간들을 되짚어 보니 보잘것없어보이는 시간도 귀하게 여기게 된다.

 

어떠한 순간 혹은 소소한 사건을 두고 스스로를 돌아본적이 얼마나 될까. 순간의 감정에만 사로잡혀 남탓만 하거나 아니면 심한 자책으로 소심해져서 자꾸만 위축되진 않았던가. 불필요한 감정을 솎아내고 상처받은 기분을 희석시키는 일에 게을리하면 분노만 쌓여간다. 그렇기에 문학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해 준다. 작가가 내어준 마음의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으면 좀 더 겸손해지고 소박해지지 않을까.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 -p.15

 

작가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생각의 결을 닮고 싶어진다. 지하철에서 치맛자락을 깔고 앉은 맷집 좋은 무뚝뚝한 남자를 향한 오해, 폭설이 내린 날도 어김없이 비워져 있는 연탄재를 보며 느끼는 고마움, 연민과 동정사이에서 오가던 영악한 마음, 물질만능주의와 문명앞에 움츠러들던 신세, 분한마음에 내 지른 고음뒤로 진저리처지는 씁쓸함, 외할머니의 쑥떡을 떠올릴때마다 드는 창피함, 잃어버린 가방에 대한 속상함보다 지저분한 속옷따위를 누군가에게 들켜버린듯한 수치심, 자연이 내어주는 소박한 자리를 귀이 여기는 마음.

 

<할머니와 베보자기>에서는 정말 눈시울이 뜨끈해졌고 <달구경>에서 손자가 내 뱉은 한 마디(할머니, 왜 달이 나만 따라다녀?)에 내 맘도 뭉클해졌다. <다 지나간다>를 읽으면서 새벽잔디를 깎기 위해서라도 마당있는 집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새벽의 잔디를 깎고 있으면 기막히게 싱그러운 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건 향기가 아니다. 대기에 인간의 숨결이 섞이기 전, 아니면 미처 미치지 못한 그 오지의 순결한 냄새다. -p.110

 

흐르는 물소리가 '다 지나간다,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 있다'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는 작가. 그러고보니 작가 한지혜 님도 눈 내리는 소리가 '괜찮다, 괜찮다'로 들린다고 했었다. 세상의 소리에 귀를 열고 있으면 그렇게 들리나보다.

 

 

 

 

오래된 사진첩을 들춰 기억을 곱씹을때마다 밀려오는 감정들에 드는 애착들. 그런 잔상들이 나를 보이지 않는 삶의 끝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삶의 유한함에 입 맞추고 모진 시간까지도 끌어 안는다면 행복이란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죽음도 희망이 된다라는 깨달음을 얻기까지 작가는 얼마나 많은 내적 고통을 감당했을까. 쓰고 또 쓰는 일이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 간것임을 알겠다. 습작을 즐겨 했다던 작가의 습관을 닮고 싶어진다.

 

이솝우화에 보면 인간의 양면성을 이야기한 글이 있다. 인간은 한 입으로 따뜻한 바람(호~~)과 차가운 바람(후~~)을 불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좋은 관계를 위해서 호와 후를 적절히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이 무엇이든, 문학이 주는 역할이 무엇이든 그저 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던 작가.

오래 행복하고 오래 너무 수다스럽지 않으며, 너무 과묵하지 않은 이야기꾼이 되고자 했던 작가의 바램덕에 마음의 온도가 조금 상승된 기분이다. 호~~~하고 불어주셨으니.^^

그리고 나도 귀엽게 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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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03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님 신간 산문이라니 너무 반갑네요. 표지부터 삽화 까지 너무 예뻐요. 이책 제 장바구니 속으로~(토지는 9권에 멈춘지 몇년쨰인 1人ㅋㅋ)

건빵과 별사탕 2021-01-03 23:43   좋아요 1 | URL
토지는 진짜 맘 단디 먹고 가야해요.ㅎㅎ 저도 13권에서 다시 출발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