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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트 콜렉터
캠론 라이트 지음, 이정민 옮김 / 카멜레온북스 / 2019년 11월
평점 :
문학이란 인간이 되는 기술 안내서 -p.163
이틀 전 2019년 노벨 문학 수상자인 올가 투카르추크의 수상소감에 관한 글을 읽었다. 그녀가 말하는 문학에 대한 정의가 너무나 감명 깊어서 말하고 뱉고 또 말하고 뱉어보았다.
"문학은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엄청난 힘과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문학만이 우리를 타인의 삶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서 그 가치와 정당성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타자의 운명을 더불어 체감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난 그녀의 말이 집세 수금원의 말과 거의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캄보디아 프놈펜 외곽의 쓰레기 매립장, 스퉁 민체이. 이곳은 실제 존재하는 곳이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쓰레기를 줍고 살아가는 이들의 다큐를 어디선가 본 듯도 한데 이 이야기는 이곳이 주요 배경이다. 실제 저자는 그의 아들이 만든 다큐를 기반으로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맨 뒷장에는 소설 속 인물들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상 리는 남편 기 림과 아들 니사이와 함께 이곳 스퉁 민체이에서 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퉁 민체이는 "승리의 강"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어쩌다 이곳이 쓰레기 매립장으로 탈바꿈한건지 이해불가다. 그만큼 캄보디아의 정치나 경제 모든 상황이 엉망이었다는 증거일 테지만.
그들은 하루하루 쓰레기를 주워 생활한다. 고철을 판 돈으로 쌀과 고기를 사고 집세도 낸다. 하지만 이곳이 암담하기만 한 곳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놀이도 찾고 농담도 하고 새 생명도 낳는다. 다만 그들에겐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며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남들이 내다 버린 것들에서 삶을 일구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p.26
쓰레기 더미를 헤집고 돌아다니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마을을 뒤덮고 있는 악취의 강도가 얼마큼인지, 집이라고 하는 공간이 집으로써의 기본적인 역할은 하고 있는 건지 겪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지만 그들의 일상과 생명 따윈 안중에도 없는 정부와 불도저에 더 화가 난다.
그들은 하루 벌어 하루를 겨우 살아내기에 집세 내기도 빠듯하다. 그런 상 리의 집 문을 두드리는 집세 수금원은 그들의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다. 그녀는 늘 술에 절어 있으며 퉁명스럽고 화를 잘 낸다. 그런 성격이 워낙에 유명해서 '암소'라는 별명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쓰레기 더미에서 그림책 한 권을 주워 상 리에게 준다. 글도 모르는 상 리지만 책이라는 물건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찾고자 한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이야기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뜻 모를 이야기들이 늘 가슴속을 맴돌고 있었던 이유도 상 리의 DNA 어딘가 문학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든 사건 사고가 있는 법이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들을 더욱 절망에 빠뜨리는 것들뿐이다. 집세 수금원에게 집세를 내야 하던 날도 남편이 강도를 만나 돈을 뺏기고 만 것이다. 수금원에게 당당하게 집세를 내고팠던 소박한 바람이 또 물거품이 되고 조아리고 또 조아려야 할 일만 남았다. 하지만 그 그림책으로 인해 상황이 달라진다. 집세 수금원이 그 책을 본 순간 거의 울부짖는듯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분명 무언가 엄청난 사연이 있음을 직감한 상 리는 몹시 궁금해진다. 게다가 집세 수금원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예감은 그녀에게는 기회이자 희망으로 다가온다. 상 리는 용기 내어 그녀에게 부탁하기에 이른다.
“제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나요?”
상 리의 아이는 늘 아팠다. 그 모든 아픔의 근원이 끔찍한 환경 때문이라고 여긴 그녀는 아이에게 말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것이 그녀가 유일하게 글을 배우고자 한 이유였다. 지난날 캄보디아는 수많은 지식인들을 숙청했다. 지식인들은 멍청한 권력자들에게 암적인 존재다. 그들은 책을 불태우고 학자나 선생들을 죽이고 노동만이 나라를 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고 삶을 빼앗겼다. 집세 수금원인 소피프 신도 억울한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교육은 언제나 옳아.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게 해줄 때는 더욱 그렇지. -p.163
그녀는 상 리에게서 잃어버렸던 문학의 희망을 보게 된다. 그녀는 한때 그녀가 그렇게 믿었던 글의 힘이 총과 칼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모든 걸 체념했었다. 하지만 선생이었던 그녀는 생의 마지막 학생이 될 상 리에게 다시 글의 힘과 문학의 필요성을 가르치게 된다. 문학을 이해하려면 머리로 읽고 가슴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해. 그리고 두 가지가 동시에 작용해야 해. -p.105
배운 만큼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먼저 배운 것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느끼고 믿어야 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놀라운 세계를 경험할 거야. -p.153
문학을 어디서 찾냐고 상 리가 묻자 이곳 스퉁 민체이에는 문학이 넘쳐 나고 있으며 문학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오는 것이라는 말을 던진다. 이야기를 읽는 모든 이야기의 대상과 주제가 바로 나 자신이지. -p.165 상 리는 내내 문학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촌이 들려준 한 편의 시가 출발점이 되긴 하지만 그녀가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떠나는 여정과 소피프 신의 과거를 만나는 과정에서 진정한 문학의 의미를 찾아간다. 물론 소피프 신도 본연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간다. 쓸모없다고 여겼지만 쓸모있는 사람으로, 화를 품고 있던 사람이 아닌 다정한 사람으로. 토카르추크는 '다정함이란 가장 겸손한 사랑의 유형이다'라고 했다. 정말 그녀의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아이를 향한 상 리의 헌신적 사랑과 남편으로써 최선을 다하고 있는 기 림을 보면 그들이 비록 쓰레기를 줍고 살고 있기는 하나 쓰레기 인생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들은 누구보다 가족과 이웃을 돌보며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했다. 기 림이 상 리가 글을 배우려 할 때 느꼈던 두려움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상 리의 결심을 지지해주고 믿어주어서 다행이었다.
갑과 을이라는 냉랭한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두 여인의 우정. 그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문학작품도 볼만하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시, 우화, 단편들이 또 다른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캄보디아판 신데렐라 이야기부터 모비딕, 로미오와 줄리엣, 소피프 신을 찾는 단서가 되는 노파와 코끼리 이야기까지.
인생이 늘 그렇게 힘들고 잔혹한 것만은 아니란다. 우리의 고난은 순간에 지나지 않아. -p.11
그들의 인생을 보면서 희망과 불행은 한자리에서 공존함을 알게 된다. 매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절망으로 내려앉을 것이다. 무엇보다 상 리를 보며 희망의 문은 스스로 찾지 않으면 절대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디서 사느냐가 아닌 어떻게 사느냐를 비로소 깨달은 것처럼.
무엇보다도 왜 문학이 필요한지, 나는 왜 문학이 좋은지, 문학적 사고를 위해 어떤 사고를 지녀야 할지 등 문학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어 좋았지만 문학의 즐거움을 알게 해 준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