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진 산정에서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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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가나에는 <고백>, <모성>, <속죄> 같은 미스터리 스릴러 계열의 소설로 유명한 작가이지만 감동적인 드라마 풍의 소설도 잘 쓴다는 걸 알게 된 계기가 <여자들의 등산일기>이다. 이 <여자들의 등산일기>의 속편이 <노을 진 산정에서>이다. <노을 진 산정에서>는 <여자들의 등산일기>와 마찬가지로 각자 일상에서 다양한 고민을 안고 있는 여성들이 산에 오르면서 벌어진 일을 담고 있다. 총 네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한 편 한 편이 마치 TV 드라마를 보는 듯했다(실제로 NHK에서 드라마로 제작, 방영되었다고 한다).


첫 번째 이야기 '우시로타테야마 연봉'은 나이 차는 있지만 친구처럼 지내고 있는 65세 여성 '다니자키 아야코'와 42세 '마미야 마미코'가 주인공이다. 아야코는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남편이 운영하던 카페를 이어 받아 10년을 열심히 일해 왔다. 마미코는 남편이 생전에 좋아했던 산에 가보고 싶다는 아야코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이번 산행을 계획했는데 여기서 뜻밖의 인물과 재회한다. 이어지는 두 번째 이야기 '북알프스 오모테긴자'는 공통의 친구 '이와타 유타로'를 추억하기 위해 산행을 결심한 두 여대생 '노가미 유이', '마에다 미사키'의 이야기를 그린다. 두 이야기 모두 로맨스 요소가 있고 약간의 미스터리가 가미되어 있다(무섭지는 않다. 코지 미스터리 정도...).


세 번째 이야기 '다테야마, 쓰루키다케'는 엄마 '지아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 산악부에 들어간 딸 '나쓰키'가 엄마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산행을 계획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네 번째 이야기 '부나가타케, 아다타라 산'은 대학 시절 함께 등산부원으로 활동했지만 졸업 후 약 30년 동안 만나지 않은 두 친구 '무카이 에이코'와 '사쿠라이 구미'의 이야기이다. 세 번째 이야기가 냉전 상태인 두 사람이 '함께' 산에 오르면서 관계를 회복하는 이야기라면, 네 번째 이야기는 냉전을 지나 정전 상태인 두 사람이 '각자' 산에 오른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 받으며 인연을 되찾는 이야기라는 점이 다르다. 비슷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매번 다른 식으로 펼쳐 보이는 작가의 솜씨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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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꿈
앨런 라이트맨 지음, 권루시안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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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게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책이라는 홍보 문구에 혹해 구입한 책이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에는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가 "칼비노(<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작가 이탈로 칼비노)가 공간을 두고 한 일을 저는 시간에 대해 하고 싶었습니다."라고 쓴 문장을 읽고 그제야 이 책의 구성과 목적이 이해가 되었다. (이 책이 어렵게 느껴졌다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야기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중의 한 명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어떤 아침을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1905년 아직 20대 청년인 아인슈타인은 독일 물리학회지에 보낼 시간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담은 원고를 정리하려고 남들보다 일찍 스위스 특허국 사무소에 출근했다. 아인슈타인은 지난 약 2달 간 시간에 관한 꿈을 유난히 많이 꾸었는데 그때마다 그럴듯한 시간의 본질이 하나씩 새로 나타났다. 이를테면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원형으로 흐르는 것이 아닐까. 시간 속에 단 하나의 세계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세계가 공존하는 것은 아닐까. 지구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면 어떨까. 시간이 없다면? 인간이 영원히 산다면?


이런 식으로 꿈에서 파생된 생각들 중에서 '어떤 생각(훗날 상대성 이론으로 알려지게 될 생각)'을 이론으로 정리해 원고로 보낸 아인슈타인은 그 원고가 이후 그의 삶과 과학계와 인류 역사에 어떤 파장을 일으키게 될지 (아직은) 꿈에도 모른다. 모른 채로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를 처리하고,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휴일에 낚시 하자는 약속을 잡는다. 현실의 비밀을 풀 열쇠는 꿈속에 있다는 생각을 이보다 효과적이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 이 책이 30년 넘게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이유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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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 공감을 넘어선 상상력 '엠퍼시'의 발견
브래디 미카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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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실수로 남의 신발을 신어본 적이 있다. 내 신발과 같은 상표, 같은 색상, 같은 크기인데 착화감이 묘하게 달라서 알았다. 공장에서 만든 신발이니 내 신발도 그 신발도 처음엔 똑같았을 텐데, 신는 사람의 발의 형태나 보행 습관, 보관 및 세척 방법 등에 의해 '다른' 신발이 되었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신발도 이런데 사람은 어떨까. 영국에서 살면서 글을 쓰는 일본인 작가 브래디 미카코의 책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는 우리말로 흔히 '공감'으로 번역되는 영단어 '엠퍼시(empathy)'에 관한 생각들을 담고 있다.


저자는 전작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에서 영국의 계층 격차와 다문화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이 단어를 언급했는데, 이 책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엠퍼시 또한 일본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문제는 엠퍼시가 일본에서는 '공감'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엠퍼시와 공감은 전혀 다른 단어라는 것이다. 공감이 '비슷한 의견이나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우정이나 이해'를 의미한다면, 엠퍼시는 '자신과 같지 않은 입장의 사람에 대해서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능력 또는 지적 활동'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엠퍼시는 (공감으로 흔히 번역되지만) 공감을 반드시 수반하지 않으며, 공감하지 않고도 엠퍼시를 가질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의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 박열의 아내로 잘 알려진 '가네코 후미코'이다. 가네코 후미코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시대에 일본인이 조선인 독립운동가와 사랑에 빠지고 조선의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로 저자는 가네코 후미코의 아나키즘 성향을 든다. 가네코 후미코는 어린 시절 가족에게 심한 학대와 방임을 당한 것을 계기로 타인이나 학교, 국가에 의지하지 않는 아나키스트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아나키즘이 엠퍼시로 연결되는가 하면, 아나키즘은 어떤 것에도 간섭받지 않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에 나의 입장(신발)에서 벗어나 타인의 입장(신발)으로 보거나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이 수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이라는 민족적, 사회적 정체성에 구애받지 않고 조선의 독립, 일제에 대한 저항, 피지배자 해방이라는 대의를 위해 살신성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데, '타인의 신발'을 신기 위해서는 먼저 '내 신발'을 벗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발을 벗으려면 우선 내가 어떤 신발을 신고 있는지부터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필요한 도구가 '말(언어)'이다. 저자는 일본 최초로 교도소 내부를 10년간 장기 취재한 사카가미 가오리의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즌 서클>에 나오는 한 장면을 예로 든다. 이 장면에서 재소자들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 감정을 말하는(언어화하는) 훈련을 하는데, 이를 통해 조금씩 피해자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이 지은 죄의 무거움을 인식하게 된다. 저자의 아들은 학교에서 아시안 차별 발언을 한 친구에게 사과를 받은 적이 있는데, 덕분에 자기 안에도 차별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사과를 하지 않을 것이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그만큼 '내 신발'을 벗기가 어려운 것이다.


엠퍼시는 다양한 입장과 취향이 공존하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능력이지만, 부작용도 있다. 가령 엠퍼시가 지나치면 개인이나 조직에 대한 과도한 숭배나 집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사이코패스는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높아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데에서 흥분이나 희열을 느낀다는 분석도 있다. 타인의 욕망이나 동기를 정확히 읽어내는 능력은 알고리즘, 데이터 분석 같은 신기술과 만나서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도 있지만, 프라이버시 침해나 과소비 조장 같은 폐해를 낳을 수도 있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이 필요한 때가 있는 것처럼, 신었다가도 벗는 것, 아예 신지 않는 것이 필요한 때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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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타쿠 삶 ㅣ 청소년에세이 해마 6
정해나 지음 / 낮은산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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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어떤 작품에 미쳐본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작품에 미쳐본 사람만이 보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독자들을 '미치게 만든' 만화 <요나단의 목소리>의 작가 정해나를 '미치게 만든' 작품은 무엇일까. 그의 '덕질' 이력을 담은 책 <나의 오타쿠 삶>에 그 답이 자세히 나온다.


학교 선생님을 좋아해도 그냥 좋아하지 못하고 팬아트까지 그려가며 열렬히 좋아했던 저자는 인생 만화 <유리가면>과의 만남을 계기로 만화와 연극이라는 두 개의 세계에 풍덩 빠져버렸다. 이후 만화는 직접 만화가가 됨으로써 '덕업일치'를 실현했고, 연극은 팬으로 남았지만 보통의 팬은 경험해본 적 없을 수많은 '성덕 모먼트'를 경험했다. 이를테면 좋아하는 작품의 감독, 배우들과 같은 차에 타기, 원작자에게 엽서 받기, 좋아하는 배우와 SNS 친구 되기 등등. 물론 저자가 가만히 앉아 있다가 성덕이 된 건 아니다. 같은 공연을 수십(어쩌면 수백?) 번씩 보고, 지방 공연 원정도 불사하고, 작품에 나온 장소가 궁금하면 외국으로도 '성지순례'를 떠나는 열정을 보였기에 이런 '기적'이 가능했다.


이 책의 '부작용'으로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50년 넘게 '미완결' 상태인) <유리가면>을 보고 싶어진다는 것이고, 둘째는 외국에서는 연극으로 만들어질 만큼 유명한 작품인데도 한국에서는 번역된 적 없는 소설 <히스토리 보이즈>를 읽고 싶어진다는 것(제발 어느 출판사라도...!), 셋째는 뮤지컬 <러브레터>,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 뮤지컬 <펀홈>처럼 종료된 공연을 보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나중에 재상연되어 보게 되더라도 그 공연은 저자가 본 공연과는 '다른' 공연이기 때문에 '같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 공연의 속성... 그래서 공연은 기회가 있을 때 무조건 보는 것이 좋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오타쿠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설명(변명?)이 이해가 된다. (체력과 재력이 허락한다면 나라도 올공 뛸 것 같다. 허락 안?해서 다행인지도... ㅋㅋ)


남이 뭔가를 열심히 좋아하면 나도 괜히 기분 좋은 이유는 뭘까. 덩달아 나도 뭔가를 좋아하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책장이 술술 넘어가지만 마지막 장을 덮기가 아쉬운 책, 웃기지만 끝에는 눈물도 살짝 나는 책, 얇지만 아주 깊은 세계를 담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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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 - 평범을 비범으로 바꾼 건축가의 기록법
백희성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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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쓰는 사람'은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글씨를 잘 쓰는 친구가 부러웠고, 학년이 높아지면서는 필기를 잘하는 친구들의 노트를 열심히 들춰봤다. 백일장에 낼 논설문이든 친구한테 쓰는 편지든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늘 부러웠는데, 이제는 잘 쓰든 못 쓰든 간에 계속 쓰는 사람, 꾸준히 쓰는 사람이 더 부럽다. 이를테면 매일 일기를 쓴다거나, 해마다 쓴 다이어리가 한 박스라거나, 글감을 모은 노트가 수십, 수백 권이라거나... <쓰는 사람>의 저자 백희성은 자칭 타칭 '기록광'이다. 저자는 2002년부터 기록을 시작해 20여 년 간 80여 권의 노트를 썼다. 방법은 단순하다. 마음에 드는 노트나 수첩에 인상 깊게 본 글귀와 그림,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은 생각이나 의문들을 그냥 적는다. 


적지 않으면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답을 찾을 가능성도 낮아지지만, 적으면 기억하게 되고 답을 찾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령 어느 비 오는 날 저자는 노트에 '빗소리가 싫다'고 적었다. 써놓고 보니 왜 싫은지 궁금해졌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빗소리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좋아한다면(안 좋아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봤다. 그 결과 저자는 빗소리가 사람들에게 연상시키는 다양한 이미지나 생각, 감정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를 활용해 '빗방울 실로폰'이라는 발명품을 만들어 공모전에 입상했다. '싫음'을 '좋음'으로 바꾸고 커리어에도 플러스가 된 일거양득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이런 식으로 저자가 평범한 기록을 실질적인 결과로 만들어 낸 과정 및 케이스가 다양하게 나온다.


기록은 저자가 건축가이면서 소설가, 디자이너로도 활동하게 된 계기도 만들었다. 저자는 파리 유학 시절 센 강변에 있는 시테 섬의 한 고택에서 나오는 노신사를 보고 문득 그 집의 역사가 궁금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궁금해한 다음 금방 잊어버렸을 텐데 저자는 평소에 하던 대로 노트에 기록해 두었고, 의문을 풀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가(책에 과정이 자세히 나온다) 첫 번째 장편소설 <빛이 이끄는 곳으로>를 완성하게 되었다. 디자이너가 된 건 저자가 운영하는 건축사 사무소에 자꾸만 엉뚱한 의뢰를 해오는 의뢰인 때문이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의 의뢰를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기록 덕분이었다. 이 부분도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재미있다. 이 책 내용 전체를 드라마로 만들어도 괜찮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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