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토템
은모든 지음 / 민음사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컬트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직접 돈을 내고 사주나 신점을 본 적은 없고 그 흔한 타로 카페에도 가본 적 없다. 남몰래 실천하는 의식이나 징크스 같은 것도 없지만, 한국인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체화되어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도 지키는 규칙 내지는 미신 같은 게 몇 가지 있기는 하다. 이를테면 시험 전에는 미역국을 먹지 않는다든지, 밤에 손톱을 안 깎는다든지, 사람 이름을 빨간색으로 안 쓴다든지... 


은모든 작가가 2024년에 발표한 소설집 <꿈과 토템>의 첫 번째 단편 <토템, 토템>은 우연히 손에 넣은 빨간색 펜으로 인해 인생이 바뀐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이야기에서 빨간색 펜은 불운이나 저주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평가나 결정의 기준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빨간색 펜'을 가진다는 건 더 이상 남들에게 평가받는 인생을 살지 않고 스스로 가치를 정하는 인생을 살겠다는 의미, 인생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겠다는 결의랄까. 


인생의 주도권을 되찾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이후에도 이어진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면서 물건을 버린다는 건 욕심을 덜어내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꿈은, 미니멀리즘>,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먹고 놀고 마시는 명절을 보내기로 결심한 여자들의 휴일을 스케치한 <모닝 루틴>, 연락이 없는 친구에게 서운함을 느꼈다가 우연히 하게 된 소개팅을 계기로 좋은 인간관계의 비결을 깨닫는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친구가 되어 드립니다>, 불의에 맞선 것을 계기로 나이 차를 극복하고 친구가 된 두 사람이 나오는 <공범의 반대말> 등이 그렇다. 


장르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501호의 좀비>와 <탄생>에도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인생을 개척하는 여자들이 등장한다. <501호의 좀비>는 좀비떼의 등장이라는 위기를 이용해 여자들이 힘을 합쳐 성폭력 가해자를 처벌하는 이야기이고, <탄생>은 인공 자궁이 개발되어 남성도 임신, 출산을 할 수 있게 된 세계를 그린다.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꼭 실현되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스위트 솔티
황모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편집에 실린 단편이 모두 좋은 경우는 잘 없다. 친하지 않은 장르의 책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닌 경우도 있다는 걸 알게 해주는 책을 만났다. 2024년에 출간된 황모과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스위트 솔티>이다. 한국과학문학상, SF 어워드 등을 수상한 황모과 작가는 한국 SF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 모두 SF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SF의 열렬한 팬이 아닌 나도, 심지어 모든 단편을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내 생각엔 작가가 SF라는 장르를 통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결국에는 인간, 나아가 (나의 관심사인) 사회, 역사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간 중에서도 그 사회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인간에게 관심이 있는 듯 보인다.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일본으로 갔지만 그곳에도 다양한 층위의 차별과 혐오가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 한국인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오메라시로 돌아가는 사람들>, 최신 시술로 완벽한 신체를 얻을 수 있게 된 시대의 음모를 그린 <시대 지체자와 시대 공백>, 부산이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이민의 역사를 톺아보게 하는 <스위트 솔티>,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끌려간 성노예 중에서도 잊힌 존재들을 소환하는 <순애보 준코, 산업위안부 김순자> 등은 모두 사회로부터 밀려나고 역사에서도 배제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약자, 소수자를 새로운 방식으로 착취하고 탄압하는 존재로서 과학을 등장시킨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시대 지체자와 시대 공백>에 나오는 '스마트 보디', <순애보 준코, 산업위안부 김순자>에 나오는 '브레인 서포터' 등의 최신 과학 기술은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똑같은 이익을 주는 게 아니라 특정 계급, 집단에게만 유익하고 그렇지 않은 계급, 집단에게는 불리하다. 과학 기술에 대한 작가의 유보적 시각은 이어지는 작품들에서도 드러난다. 인류의 고효율 성장을 위해 태어난 지 3년 안에 사회에 투입 가능한 인력이 되어야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타고난 시절>, 인간 때문에 멸종 위기에 놓인 벨루가 돌고래와 벨루가를 본떠서 만든 로봇의 우정을 그린 <나의 새로운 바다로>, 로봇이 대신 여행해 주는 시대를 상상한 <여행이 다시 당신을 찾아옵니다> 등이 그렇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인 <브라이덜 하이스쿨>은 (SF가 아닌) 판타지의 설정을 빌린 소설로, 어떤 여자가 일부다처제가 일반적인 사회의 신부 양성 학교 화장실 청소부로 환생(전생)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남자에게 선택받는 것을 인생의 최대 목표로 생각하는 (여)학생들에게 환멸을 느낀 여자는 자신이 아닌 온갖 장르의 로맨스 서사를 총동원해 학생들을 계몽시킨다. 그 결과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여성 혐오적 관습과 가치관을 받아들였던 (여)학생들이 일부다처제, 이성애, 남성애의 망령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인간으로 변화하는 모습이 통쾌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안 읽은 사람 없었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노을 진 산정에서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나토 가나에는 <고백>, <모성>, <속죄> 같은 미스터리 스릴러 계열의 소설로 유명한 작가이지만 감동적인 드라마 풍의 소설도 잘 쓴다는 걸 알게 된 계기가 <여자들의 등산일기>이다. 이 <여자들의 등산일기>의 속편이 <노을 진 산정에서>이다. <노을 진 산정에서>는 <여자들의 등산일기>와 마찬가지로 각자 일상에서 다양한 고민을 안고 있는 여성들이 산에 오르면서 벌어진 일을 담고 있다. 총 네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한 편 한 편이 마치 TV 드라마를 보는 듯했다(실제로 NHK에서 드라마로 제작, 방영되었다고 한다).


첫 번째 이야기 '우시로타테야마 연봉'은 나이 차는 있지만 친구처럼 지내고 있는 65세 여성 '다니자키 아야코'와 42세 '마미야 마미코'가 주인공이다. 아야코는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남편이 운영하던 카페를 이어 받아 10년을 열심히 일해 왔다. 마미코는 남편이 생전에 좋아했던 산에 가보고 싶다는 아야코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이번 산행을 계획했는데 여기서 뜻밖의 인물과 재회한다. 이어지는 두 번째 이야기 '북알프스 오모테긴자'는 공통의 친구 '이와타 유타로'를 추억하기 위해 산행을 결심한 두 여대생 '노가미 유이', '마에다 미사키'의 이야기를 그린다. 두 이야기 모두 로맨스 요소가 있고 약간의 미스터리가 가미되어 있다(무섭지는 않다. 코지 미스터리 정도...).


세 번째 이야기 '다테야마, 쓰루키다케'는 엄마 '지아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 산악부에 들어간 딸 '나쓰키'가 엄마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산행을 계획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네 번째 이야기 '부나가타케, 아다타라 산'은 대학 시절 함께 등산부원으로 활동했지만 졸업 후 약 30년 동안 만나지 않은 두 친구 '무카이 에이코'와 '사쿠라이 구미'의 이야기이다. 세 번째 이야기가 냉전 상태인 두 사람이 '함께' 산에 오르면서 관계를 회복하는 이야기라면, 네 번째 이야기는 냉전을 지나 정전 상태인 두 사람이 '각자' 산에 오른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 받으며 인연을 되찾는 이야기라는 점이 다르다. 비슷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매번 다른 식으로 펼쳐 보이는 작가의 솜씨가 놀랍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아인슈타인의 꿈
앨런 라이트맨 지음, 권루시안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0년 넘게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책이라는 홍보 문구에 혹해 구입한 책이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에는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가 "칼비노(<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작가 이탈로 칼비노)가 공간을 두고 한 일을 저는 시간에 대해 하고 싶었습니다."라고 쓴 문장을 읽고 그제야 이 책의 구성과 목적이 이해가 되었다. (이 책이 어렵게 느껴졌다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야기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중의 한 명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어떤 아침을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1905년 아직 20대 청년인 아인슈타인은 독일 물리학회지에 보낼 시간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담은 원고를 정리하려고 남들보다 일찍 스위스 특허국 사무소에 출근했다. 아인슈타인은 지난 약 2달 간 시간에 관한 꿈을 유난히 많이 꾸었는데 그때마다 그럴듯한 시간의 본질이 하나씩 새로 나타났다. 이를테면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원형으로 흐르는 것이 아닐까. 시간 속에 단 하나의 세계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세계가 공존하는 것은 아닐까. 지구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면 어떨까. 시간이 없다면? 인간이 영원히 산다면?


이런 식으로 꿈에서 파생된 생각들 중에서 '어떤 생각(훗날 상대성 이론으로 알려지게 될 생각)'을 이론으로 정리해 원고로 보낸 아인슈타인은 그 원고가 이후 그의 삶과 과학계와 인류 역사에 어떤 파장을 일으키게 될지 (아직은) 꿈에도 모른다. 모른 채로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를 처리하고,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휴일에 낚시 하자는 약속을 잡는다. 현실의 비밀을 풀 열쇠는 꿈속에 있다는 생각을 이보다 효과적이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 이 책이 30년 넘게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이유를 알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 공감을 넘어선 상상력 '엠퍼시'의 발견
브래디 미카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 실수로 남의 신발을 신어본 적이 있다. 내 신발과 같은 상표, 같은 색상, 같은 크기인데 착화감이 묘하게 달라서 알았다. 공장에서 만든 신발이니 내 신발도 그 신발도 처음엔 똑같았을 텐데, 신는 사람의 발의 형태나 보행 습관, 보관 및 세척 방법 등에 의해 '다른' 신발이 되었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신발도 이런데 사람은 어떨까. 영국에서 살면서 글을 쓰는 일본인 작가 브래디 미카코의 책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는 우리말로 흔히 '공감'으로 번역되는 영단어 '엠퍼시(empathy)'에 관한 생각들을 담고 있다.


저자는 전작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에서 영국의 계층 격차와 다문화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이 단어를 언급했는데, 이 책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엠퍼시 또한 일본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문제는 엠퍼시가 일본에서는 '공감'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엠퍼시와 공감은 전혀 다른 단어라는 것이다. 공감이 '비슷한 의견이나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우정이나 이해'를 의미한다면, 엠퍼시는 '자신과 같지 않은 입장의 사람에 대해서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능력 또는 지적 활동'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엠퍼시는 (공감으로 흔히 번역되지만) 공감을 반드시 수반하지 않으며, 공감하지 않고도 엠퍼시를 가질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의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 박열의 아내로 잘 알려진 '가네코 후미코'이다. 가네코 후미코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시대에 일본인이 조선인 독립운동가와 사랑에 빠지고 조선의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로 저자는 가네코 후미코의 아나키즘 성향을 든다. 가네코 후미코는 어린 시절 가족에게 심한 학대와 방임을 당한 것을 계기로 타인이나 학교, 국가에 의지하지 않는 아나키스트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아나키즘이 엠퍼시로 연결되는가 하면, 아나키즘은 어떤 것에도 간섭받지 않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에 나의 입장(신발)에서 벗어나 타인의 입장(신발)으로 보거나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이 수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이라는 민족적, 사회적 정체성에 구애받지 않고 조선의 독립, 일제에 대한 저항, 피지배자 해방이라는 대의를 위해 살신성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데, '타인의 신발'을 신기 위해서는 먼저 '내 신발'을 벗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발을 벗으려면 우선 내가 어떤 신발을 신고 있는지부터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필요한 도구가 '말(언어)'이다. 저자는 일본 최초로 교도소 내부를 10년간 장기 취재한 사카가미 가오리의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즌 서클>에 나오는 한 장면을 예로 든다. 이 장면에서 재소자들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 감정을 말하는(언어화하는) 훈련을 하는데, 이를 통해 조금씩 피해자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이 지은 죄의 무거움을 인식하게 된다. 저자의 아들은 학교에서 아시안 차별 발언을 한 친구에게 사과를 받은 적이 있는데, 덕분에 자기 안에도 차별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사과를 하지 않을 것이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그만큼 '내 신발'을 벗기가 어려운 것이다.


엠퍼시는 다양한 입장과 취향이 공존하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능력이지만, 부작용도 있다. 가령 엠퍼시가 지나치면 개인이나 조직에 대한 과도한 숭배나 집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사이코패스는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높아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데에서 흥분이나 희열을 느낀다는 분석도 있다. 타인의 욕망이나 동기를 정확히 읽어내는 능력은 알고리즘, 데이터 분석 같은 신기술과 만나서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도 있지만, 프라이버시 침해나 과소비 조장 같은 폐해를 낳을 수도 있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이 필요한 때가 있는 것처럼, 신었다가도 벗는 것, 아예 신지 않는 것이 필요한 때도 있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