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볼루셔너리 로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6
리처드 예이츠 지음, 이삼출 옮김 / 민음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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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예이츠의 소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2008년 개봉한 케이트 윈즐릿,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 동명 영화의 원작이다. 영상화가 된 소설을 읽을 때 좋은 점 중 하나는 등장인물을 연기한 배우들의 이미지로 각각의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는 건데, 이 소설도 그렇게 읽었다. 게다가 케이트 윈즐릿,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타이타닉>에서 이미 커플 연기를 한 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각 소설의 내용도 연결되는 면이 없지 않다. 중산층 진입에 성공한 듯 보이지만 내면에는 권태와 허무가 가득한 <레볼루셔너리 로드> 속 부부의 모습은, 각각 이민과 결혼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는 <타이타닉>의 주인공 잭과 로즈의 미래 같기도 하다. 


이야기의 배경은 1960년대 미국 뉴욕 외곽에 새로 생긴 중산층 거주 지역 '레볼루셔너리 로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으나 현재는 뉴욕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회사의 부품으로 살고 있는 '프랭크'와 한때는 배우를 꿈꿨으나 프랭크와 결혼 후 전업주부가 된 '에이프릴'이 이곳에 집을 사서 들어온다. 남편은 잘생기고 좋은 대학 나오고 유명한 회사 다니고, 아내는 예쁘고 조신하고 살림 잘하고, 젊은 나이에 벌써 집도 있고 딸도 있고 아들도 있는 이들은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대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작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매일이 지루하고 앞날이 기대되지 않는다. 에이프릴은 동네 사람들과 극단을 꾸려 연극을 해보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프랭크는 직장에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젊은 여자 직원과 노닥거리다 끝내는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하디흔한 결혼 이야기 아닌가 싶은데, 작가가 여기서 변주를 준다. 열심히 준비한 연극이 실패해 크게 상심한 듯했던 에이프릴이 돌연 프랭크에게 파리로 떠나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것도 잠깐 여행으로 가는 게 아니라 아주 살러 가자고. 처음에 프랭크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동안 회사 다니기 싫다는 말을 주야장천 한 터라 파리에선 에이프릴이 일하겠다는 말에 반대하지 못한다. 파리에서 에이프릴이 일하는 동안 프랭크는 공부를 하든 책을 읽든 글을 쓰든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니 그로서는 달콤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일단 프랭크는 에이프릴에게 파리에 간다고 한다. 파리에 갈 준비는 에이프릴이 다 한다고 하니 지켜보기로 한다. 


그런데 막상 떠난다는 선택지가 생기고 보니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회사가 그렇게 싫었는데, 어차피 그만둘 거라는 생각으로 업무에 임하자 생각 외로 일이 너무 잘 풀렸다. 잠깐 한눈팔 생각으로 만났던 여자 직원과는 점점 관계가 깊어졌다. 그런 프랭크의 속내를 모르는 에이프릴은 조만간 파리로 뜬다는 꿈에 부풀어 전보다 더 열심히 현모양처 역할을 해낸다. 그런 아내가 사랑스러워 부부관계를 맺었다가 에이프릴의 몸에 셋째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에이프릴은 계획이 틀어져서 미칠 것 같은데, 프랭크는 계획이 틀어진 게 오히려 기쁘고 반갑다. 그렇게 두 사람의 입장 차이가 점점 더 커지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결국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생각이 많이 났다. 프랭크는 최고의 남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최악의 남편도 아니다. 경제적으로 능력 있고 1960년대 남성 치고는 가정적인 편이다. 아내가 연극하는 걸 말리지도 않았고, 아이들에게 잘못한 적도 없다. 하지만 에이프릴은 프랭크의 아내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다. 아마도 문제는 프랭크가 아니라 '아내'라는 역할이었을 것이다. 에이프릴처럼 한때는 배우를 꿈꾸기도 했던 아름답고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여자가 고작 '집안의 천사'로 늙어 죽는다니. 어떤 남자가 이런 삶을 살까. 이런 삶을 꿈꿀까. 셋째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에이프릴이 전에 없이 절망한 건, 파리에 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결혼의 족쇄가 더욱 강력해졌기 때문일 것이다(전래 동화 '선녀와 나무꾼'이 생각나는...). 


이 소설은 주인공인 프랭크와 에이프릴의 캐릭터도 흥미롭지만, 주변 인물로 등장하는 이웃들 - 캠벨 부부, 기빙스 부인과 아들 존 기빙스 - 의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특히 존 기빙스는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프랭크, 에이프릴과 비슷한 연배임에도 불구하고 직장도 없고 배우자와 자식도 없지만, 누구보다 빠르고 예리하고 이들 부부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각자의 속마음을 알아챈다. 프랭크, 에이프릴과 친하게 지내는 캠벨 부부는, 겉보기에는 프랭크와 에이프릴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 보이고 실제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면도 있지만, 결코 그들이 자신들보다 잘 살기를 바라지는 않고 그들의 불행을 보면서 자신들을 위안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인간성의 이면 또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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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8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민음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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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S. 버로스의 소설 <퀴어>는 2022년 개봉한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 루카 구아디나노 감독 동명 영화의 원작이다.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소설을 읽었는데, 예전 퀴어 소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내용이 어둡고 우울하다. 서사가 있지만 서사 자체보다는 (약물, 알콜, 섹스 등 온갖 것들에 중독된 인물인) 주인공 '윌리엄 리'의 정신 세계를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몰입해서 읽기가 쉽지 않다. 작가가 상상으로 빚어낸 허구의 이야기가 아닌 자전 소설이라고 하니 안타깝다. 


배경은 1950년대 초 멕시코. 미국인 남성 '윌리엄 리'는 실수로 아내에게 총을 쏘아 죽게 한 혐의를 피하기 위해 미국을 떠나 멕시코시티로 온다. 사실상 돌아갈 곳이 없는 도망자 신세이지만, 리는 이곳에서 더없는 자유와 행복을 느낀다. 미국에 비해 물가도 저렴하고 자연도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남자들과 밤마다 만나고 술 마시고 연애하고 하룻밤을 보내기에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장악한 범죄와 부패, 가난과 타락 등은 금지된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정신이 멀쩡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리에게 오히려 축복이다. 


그러나 그런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리의 연애는 생각대로 잘 흘러가지 않는다. 리가 좋아하는 젊은 남자 '앨러턴'은 리에게 별 관심이 없다(리가 가진 돈에는 관심이 있다). 리에게는 리가 좋아하지 않는 남자들만 들러붙는다(그나마도 많지 않다). 아내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 돌아갈 곳이 없다는 불안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도 상당하다. 결국 리는 낮에는 사람들 앞에서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광대짓을 하다가 조롱 당하고, 밤에는 성관계를 맺을 대상을 찾아다니다 허무감 또는 불면에 시달린다. 


리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상당히 불안한 사람이다. 불안 때문에 앨러턴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매달리고, 남들이 보기에는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해서라도 앨러턴을 자기 곁에 두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애정을 갈구하고 계속해서 자기를 봐주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을 작가는 (소수자성으로 인한) 자기 이미지 분열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소수자를 비롯한 많은 소수자들이) 소수자성을 감추고 다수자인 척 연기하며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연기 자체가 하나의 정체성이 되고, 자기 인식을 (스스로 못하고) 자신의 연기를 봐주는 관중으로 하여금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내 생각에는 성 소수자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말하기를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남들 앞에 자기를 내보이고 싶어 하는 리의 모습은, 하루 종일 SNS를 통해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고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사진 또는 영상을 공개하는 걸 개의치 않는 요즘 사람들의 성향과 비슷하지 않은가. 어쩌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고 그래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 그래서 몰입하기 힘든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나와 가장 가까운 이야기, 몰입해서 읽어볼 가치가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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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 이야기 - 모든 미스터리는 그녀로부터 시작되었다
루시 워즐리 지음, 홍한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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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위인전을 많이 읽었고 어른이 된 후에는 평전이나 자서전을 종종 읽었는데, 이제까지 내가 가장 많은 평전이나 자서전을 읽은 인물이 애거사 크리스티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애거사 크리스티의 삶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영국의 역사학자 루시 워즐리가 쓴 애거사 크리스티 평전 <범죄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 이야기>를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된, 또는 생각하게 된 사실이 아주 많다. 전에 읽은 애거사 크리스티 평전이나 자서전에 비해 작가가 취재, 분석한 내용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존에 알려진 내용을 작가가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하는 대목도 많아서인 것 같다. 


일단 잘 알려딘 대로 애거사 크리스티는 1890년 영국 상류층 가문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 시대 여성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정식으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고 이 사실을 애거사 크리스티 본인도 아쉬워했던 건 알았는데, 11살 위의 언니는 대학 교육을 받았고 그 결과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큰딸을 못마땅하게 여긴 어머니의 결정으로 애거사는 학교 교육을 받는 대신 어려서부터 신부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았다는 사실은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그래도 (독서가에 글 잘 쓰는) 언니의 영향으로 애거사도 어릴 때부터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했고 그 결과 작가가 되었으니 역시 될 사람은 되는 건지도. 물론 애거사 크리스티는 스스로 작가라고 명명한 적이 없고, 할 수만 있었다면 전통적인 여성의 삶(현모양처)을 살고 싶어 했다지만(이게 애거사 크리스티의 본심, 진의였는지에 대해서도 저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1926년 실종 사건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다룬다. 작가는 남아 있는 당시의 기록과 자료들을 바탕으로 그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추측하는 한편으로, 그때 경찰이 어떤 식으로 잘못된 대응을 했고 언론은 얼마나 악의적인 보도를 했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대중의 오해와 편견이 그 후에도 얼마나 오랫동안 애거사 크리스티를 괴롭혔는지에 대해서도 서술한다. 이 사건으로 일종의 마녀화가 된 애거사 크리스티는 철저히 자기 자신을 감추거나 다른 이미지를 덧씌우는 방식으로 작가 활동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고, 이는 그가 작품성과 대중성을 다 잡은 몇 안 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평가절하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그러나 아무리 저평가 되는 작가라도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이 지금도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는 건 사실이고, 이것이 가능했던 건 단순한 우연이나 운의 작용이 아니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상류층 출신이지만 십 대 후반에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그 시절 여성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며 살 수도 있었지만, 첫 번째 남편과는 이혼하고 (한참 연하인) 두 번째 남편은 경제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평생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고, 부양 가족이 늘면서 점점 더 많은 돈을 벌 필요가 있었다. 잘 팔리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잘 써야 했고, 잘 쓰기 위해서는 계속 쓰고 많이 쓰는 수밖에 없었다. 계속 쓰고 많이 쓰려면 글감이 필요한데, 세상은 마침 전쟁 중이었고 애거사 크리스티 자신에게도 (출산, 실종, 이혼, 병원 근무, 약제사 공부 등) 많은 일이 일어났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이 그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소설 곳곳에 그의 직간접적인 경험이 들어 있다. 실제로 애거사 크리스티는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일종의 자전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들을 비롯해, 애거사 크리스티의 어떤 경험이 어떤 작품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어 있는지도 이 책에 나온다. 시대별로 대표작은 무엇이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 분석한 대목들도 좋았다. 작가의 나이가 일흔, 여든을 넘기면서 작품성이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인다고 쓴 대목은 안타까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연세에도 계속해서 글을 쓰며 작가이기를 그만두지 않았다는 것이니 존경스럽다.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을 더욱 깊이 읽고 싶은 독자에게 유용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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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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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자서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이 중에 작가가 직접 경험한 일은 무엇일지 생각한다(일단 나는 그렇다).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이언 매큐언의 장편소설 <레슨>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일단 이언 매큐언과 주인공 롤런드 베인스의 공통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둘 다 1948년생이고,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직업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해외 복무지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이른 나이에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무엇보다 비슷한 건, 소설 속에서 롤런드의 형이 아기 때 비밀리에 입양된 것처럼 이언 매큐언의 형도 아기 때 비밀리에 입양되었고 육십이 넘어서야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롤랜드는 이언 매큐언과 달리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작가의 길을 걷지도 않았지만, 롤랜드의 첫 번째 아내 앨리사가 (이언 매큐언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된다는 점에서 작가로서의 그의 삶이 (앨리사를 통해) 이 소설에 어느 정도 반영이 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소설의 내용도, 작가가 이제까지 발표한 작품들의 총집합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시감이 드는 것이 많다. 일단 롤런드가 소년 시절에 자신보다 한참 연상인 피아노 선생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칠드런 액트>에서 중년의 여성 판사 피오나와 그의 판결을 기다리는 소년 애덤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첫 번째 아내 앨리사가 집을 나간 후 가족이 붕괴되고 집이 엉망이 되는 모습은 <차일드 인 타임>에서 딸이 실종된 후에 부부 관계가 무너지고 일상이 파괴되는 장면들을 연상시켰다. 롤런드가 통일 이전의 독일을 드나들며 정치적 모험을 하는 장면은 <스위트 투스>를 연상시켰다. 두 번째 아내 대프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 대프니의 첫 번째 남편과 경쟁 아닌 경쟁을 펼치는 대목은, 마찬가지로 두 남자의 경쟁과 몰락(?)을 그린 소설 <암스테르담>을 떠올리게 했다. 후반으로 갈수록 영국과 유럽 정치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오는데 이 점은 <바퀴벌레>와 비슷하다. 전체적으로 사랑과 인생, 문학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속죄>와도 연결되어 있다. 


롤런드의 인생을 가장 크게 좌우한 사건으로는 소년 시절 피아노 선생과 육체적, 정신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을 들 수 있고, 실제로 롤런드는 그 사건 이후에 큰 충격을 받아서 피아니스트로서의 커리어도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특정한 직업을 가지지 않은 채 죽기 전까지 '되는대로' 살아간다. 하지만 정말 그가 '되는대로' 살았는지, 나로서는 의문이 든다. 비정규직에 수입이 적기는 했어도 그는 테니스 코치, 카드 문구 제작, 피아노 연주자 등등의 일을 끊임없이 하면서 사회와 연결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결혼도 두 번 했고, 친구는 늘 많았고, 아내가 버리고 간 아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키워냈다(가장 중요하다). 가족을 버린 앨리사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앨리사의 소설을 읽고 그의 문학적, 예술적 재능을 인정한 이후에는 서로의 갈 길을 받아들이고 앨리사를 방해하지 않았다. 피아노 선생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는데, 그때에도 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용서를 택한다. 용서라니. 세상에서 제일 하기 어려운 일 아닌가(나는 그렇다). 


롤런드가 스스로 한 일에 비해 풍족하고 유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백인 중산층 계급 출신의 남성이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났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산 형과 누나를 보면, 그가 (몰랐다는 이유로, 어렸다는 변명으로) 얼마나 큰 혜택을 입고 보호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무렵에 태어나, (상대적으로) 세계가 단순했던 냉전 시기에 유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고, 세계가 복잡해진 때에는 이미 노년에 이른 것도 그의 복이라면 복이다. 이제부터 삶을 살아야 하는, 그의 손녀 또래의 사람들에게는 그가 삶을 통해 배운 것들이 전혀 쓸모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는 동안 내내 자신은 잘못된 선택을 수없이 했고 그러므로 자신의 삶은 실패라고 여겼던 그가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은 그만하면 괜찮았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좋았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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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속의 여인 ㅣ 캐드펠 수사 시리즈 6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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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자기 전에 추리소설 읽는 게 고정된 습관이었는데, 요새는 잘 준비 하고 나서 <로앤오더 : 성범죄전담반> 에피소드를 한두 편씩 보는 게 습관이 되어 예전만큼 추리소설을 안 읽는다. 그래도 잠이 안 오는 밤에는 비상시를 위해 준비해둔 추리소설을 꺼내 읽는데, 최근에 마친 책이 엘리스 피터스의 '캐드펠 수사 시리즈' 제6권 <얼음 속의 여인>이다. 캐드펠 시리즈는 소설가 정세랑이 고등학교 때 읽고 역사 추리소설을 쓰고 싶다는 꿈을 가진 계기가 된 책으로도 유명하다. 나는 이 시리즈를 2024년 북하우스에서 개정판을 출간했을 때 1권부터 5권까지 읽고 최근에 6권부터 읽기 시작했다. 21권까지 있다는데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일단 10권까지 샀음).


이야기의 배경은 12세기 중세 웨일스. 젊은 시절에는 십자군 전쟁에 참전해 세계를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현재는 슈루즈베리 수도원에서 수도자로 지내며 약초를 키우는 캐드펠 수사가 주인공이다. 스티븐 왕과 모드 황후 사이에 벌어진 왕권 계승 전쟁이 한창인 겨울의 어느 날. 캐드펠 수사는 귀족 가문의 남매 이브와 에르미나, 그리고 이들을 돕는 힐라리아 수녀가 환난을 피해 수도원으로 오던 중에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일행 중 가장 어린 남동생 이브를 가장 먼저 찾지만, 이브를 데리고 수도원으로 오는 길에 캐드펠 수사는 얼어붙은 강 속에서 살해당한 여인의 시체를 발견한다. 대체 이 여인은 누구이며(누나일까 수녀일까 혹은 다른 여자...?) 왜 죽었을까.


이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정치가 '하지 않는' 일을 종교가 어떤 식으로 '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서 웨일스는 스티븐 왕과 모드 황후 사이의 내란이 한창인 상황이며, 캐드펠 수사가 속한 슈루즈베리 수도원은 스티븐 왕의 영역 안에 있다. 실종된 남매와 수녀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정쟁에 가담한 바는 없지만, 남매의 보호자인 외숙(로랑스 당제)은 모드 황후쪽 사람이다. 실종자들을 구하겠다고 나섰다가 자칫하면 수도원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고, 그래서 처음에 실종자들을 구할지 말지를 두고 약간의 설전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캐드펠과 수도자들은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사람을 구하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이것이 진정한 종교의 역할이 아닌지.


소설 후반의 전개도 흥미로웠다. 중간에 이브가 도적떼에 납치되어 그들의 소굴에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이 펼쳐지는데, 사라진 이브를 찾으러 길을 나선 캐드펠 수사가 추리 실력을 발휘해 도적떼의 소굴에 이르는 동안 또 다른 남자가 이브를 구하러 온다. 이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밝혀지는데, (소설 초반에 00을 얻은) 휴 베링어의 사연과 겹쳐지면서 놀람과 감동이 배가 되었다. 앞으로 이 남자가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느낌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이 시리즈를 읽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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