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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평점 :

소설은 자서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이 중에 작가가 직접 경험한 일은 무엇일지 생각한다(일단 나는 그렇다).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이언 매큐언의 장편소설 <레슨>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일단 이언 매큐언과 주인공 롤런드 베인스의 공통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둘 다 1948년생이고,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직업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해외 복무지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이른 나이에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무엇보다 비슷한 건, 소설 속에서 롤런드의 형이 아기 때 비밀리에 입양된 것처럼 이언 매큐언의 형도 아기 때 비밀리에 입양되었고 육십이 넘어서야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롤랜드는 이언 매큐언과 달리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작가의 길을 걷지도 않았지만, 롤랜드의 첫 번째 아내 앨리사가 (이언 매큐언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된다는 점에서 작가로서의 그의 삶이 (앨리사를 통해) 이 소설에 어느 정도 반영이 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소설의 내용도, 작가가 이제까지 발표한 작품들의 총집합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시감이 드는 것이 많다. 일단 롤런드가 소년 시절에 자신보다 한참 연상인 피아노 선생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칠드런 액트>에서 중년의 여성 판사 피오나와 그의 판결을 기다리는 소년 애덤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첫 번째 아내 앨리사가 집을 나간 후 가족이 붕괴되고 집이 엉망이 되는 모습은 <차일드 인 타임>에서 딸이 실종된 후에 부부 관계가 무너지고 일상이 파괴되는 장면들을 연상시켰다. 롤런드가 통일 이전의 독일을 드나들며 정치적 모험을 하는 장면은 <스위트 투스>를 연상시켰다. 두 번째 아내 대프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 대프니의 첫 번째 남편과 경쟁 아닌 경쟁을 펼치는 대목은, 마찬가지로 두 남자의 경쟁과 몰락(?)을 그린 소설 <암스테르담>을 떠올리게 했다. 후반으로 갈수록 영국과 유럽 정치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오는데 이 점은 <바퀴벌레>와 비슷하다. 전체적으로 사랑과 인생, 문학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속죄>와도 연결되어 있다.
롤런드의 인생을 가장 크게 좌우한 사건으로는 소년 시절 피아노 선생과 육체적, 정신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을 들 수 있고, 실제로 롤런드는 그 사건 이후에 큰 충격을 받아서 피아니스트로서의 커리어도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특정한 직업을 가지지 않은 채 죽기 전까지 '되는대로' 살아간다. 하지만 정말 그가 '되는대로' 살았는지, 나로서는 의문이 든다. 비정규직에 수입이 적기는 했어도 그는 테니스 코치, 카드 문구 제작, 피아노 연주자 등등의 일을 끊임없이 하면서 사회와 연결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결혼도 두 번 했고, 친구는 늘 많았고, 아내가 버리고 간 아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키워냈다(가장 중요하다). 가족을 버린 앨리사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앨리사의 소설을 읽고 그의 문학적, 예술적 재능을 인정한 이후에는 서로의 갈 길을 받아들이고 앨리사를 방해하지 않았다. 피아노 선생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는데, 그때에도 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용서를 택한다. 용서라니. 세상에서 제일 하기 어려운 일 아닌가(나는 그렇다).
롤런드가 스스로 한 일에 비해 풍족하고 유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백인 중산층 계급 출신의 남성이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났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산 형과 누나를 보면, 그가 (몰랐다는 이유로, 어렸다는 변명으로) 얼마나 큰 혜택을 입고 보호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무렵에 태어나, (상대적으로) 세계가 단순했던 냉전 시기에 유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고, 세계가 복잡해진 때에는 이미 노년에 이른 것도 그의 복이라면 복이다. 이제부터 삶을 살아야 하는, 그의 손녀 또래의 사람들에게는 그가 삶을 통해 배운 것들이 전혀 쓸모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는 동안 내내 자신은 잘못된 선택을 수없이 했고 그러므로 자신의 삶은 실패라고 여겼던 그가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은 그만하면 괜찮았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좋았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