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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무들은 - 최승자의 아이오와 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2월
평점 :

책은 책을 부른다. 이 책도 어떤 책의 영향으로 내게로 왔다. 그 책은 몇 달 전에 읽은 문보영 시인의 산문집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이다.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은 문보영 시인이 2023년 가을부터 3개월 간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국제 창작 프로그램(IWP)에 참가해 경험한 일들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그 책에서 문보영 시인이 일종의 가이드북 내지는 바이블처럼 모시는 책이 있는데, 문보영 시인보다 29년 먼저 IWP에 참가해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최승자 시인의 책 <어떤 나무들은>이다.
최승자와 문보영 모두 한국의 여성 시인이고, 같은 아이오와에서 같은 프로그램에 참가했기 때문에 비슷한 경험, 비슷한 감상이 이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은 않았다. 1994년의 시인과 2023년의 시인 모두 낯선 외국에서 모르는 외국인들과 부대끼며 영어 때문에 고생한 건 같지만, 1994년의 시인에게는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없었다. 외국인과 대화하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고,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미국 뉴스의 단신에서 보고 겨우 알 수 있었던 시절. 국제선 비행기를 김포공항에서 타고, 컴퓨터에 '한글'을 설치하는 것이 기본이었던 시절. 그 시절이 그렇게 옛날이 아닌데 왜 이렇게 옛날처럼 느껴질까.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러버렸을까.
당시 마흔세 살이었던 저자가 생애 첫 해외 체류를 통해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는 대목들도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미국인들이 보이는 개방성이나 자유로움이 무례하고 부담스럽다고 느끼면서도, 미국인들에 비해 훨씬 경직되고 보수적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배울 점도 있다고 여긴다. 가령 저자는 자신이 언제나 불행하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고 무엇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미국에 와보니 그런 생각은 한국의 역사, 전통, 계급, 통념, 상식, 권력, 학교가 그렇게 보도록 프로그램화시킨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인들에게 저자의 나이나 학력이나 계급은 아무 상관이 없고, 오로지 저자가 하는 말과 저자가 쓴 시만 중요했다.
나는 현재가 감옥이라고 생각했고, 미래도 닫힌, 출구 없는 감옥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시간이 감옥이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내가 무의식적, 집단적으로 프로그램화된, 그렇게 보도록 짜여진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중략) 이제 나는 그 프로그램을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나는 더이상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내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내가 나를 불행하다고 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내게 강요되었던 가치관의 정체를 내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런 가치관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370쪽)
한국 문학을 어떻게 세계에 알릴지에 대한 통찰도 대단하다. 저자가 보기에 그때까지 한국 문학이 전 세계적으로 저평가 되어 있던 이유는 문학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번역되어 소개된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잘 번역되어 홍보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민주화 운동처럼 한국의 특수성을 반영한 작품도, 젠더, 섹슈얼리티 등 동시대 미국인들이 관심 있는 주제를 다룬 작품도 충분히 승산 있고, 무엇보다 한인 2,3세대 문인들의 활약을 기대해 볼 만하다고. 이 대목을 읽고 한강, 박상영, 이민진 같은 이름을 떠올린 건 나뿐일까. 저자의 예측(예언?)이 실현된 시대를 살고 있어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