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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너머 한 시간
헤르만 헤세 지음, 신동화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평점 :

연말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올 한 해도 어떻게든 살아냈다는 뿌듯함과 한 일도 없이 시간만 흐른 것 같다는 아쉬움을 동시에 느낀다. 더 늦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한다는 초조함과 현상 유지도 버겁다는 부담감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즈음, 이 책을 만났다. 독일이 배출한 세계적인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첫 산문집 <자정 너머 한 시간>이다.
헤르만 헤세는 1877년 독일 남부 도시 칼프에서 목사인 아버지와 신학자 가문 출신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났다. 보수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엄숙한 생활을 했던 헤세는 문학을 만난 이후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시계 공장과 서점 등에서 일하며 글쓰기를 병행해 1899년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와 첫 산문집 <자정 너머 한 시간>을 발표했다. <자정 너머 한 시간> 출간 당시 헤세는 이제 겨우 이십 대 초반인 무명의 작가였다. 출판사는 육백 부를 찍자고 제안했고, 출간 첫해에 쉰세 부가 팔렸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04년 <페터 카멘친트>가 큰 주목을 받으며 유명 작가가 된 후에야 1쇄를 소진했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이 책을 읽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이는 저자인 헤르만 헤세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1941년 재간에 부쳐 쓴 서문에 따르면, 저자가 보기에 이 책에 실린 산문들은 지나치게 유미주의적인 면이 없지 않다. 나중에 그것을 깨닫고 중쇄 제작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책을 출간하고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영향력 있는 인물들에게 서평을 받으면서 자신의 글에서 부족한 점, 고쳐야 할 점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자신의 출세작인 <페터 카멘친트>와 <수레바퀴 아래서>, <크눌프>, <데미안> 등의 대표작들을 쓸 수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에는 작가 서문과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서문에서 저자는 "<자정 너머 한 시간>의 산문 습작들에서 나는 자신을 위해 예술가의 꿈나라를, 미(美)의 섬을 창조했고, 그 시적 특징은 낮 세계의 풍파와 저속함에서 밤과 꿈과 아름다운 고독으로 물러나는 것이었다."라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대로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요즘 독자들이 산문 또는 에세이 하면 떠올리는 신변잡기적인 글이 아니라, 소설이 되지 못한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단상들이나 은유적이고 암시적인 산문시에 가깝다. <데미안> 같은 성장소설이나 <싯다르타> 같은 구도소설을 기대한 독자라면 이 책을 읽고 조금 당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이 현실에 좌절하고 미래를 비관하는 어둡고 무거운 정서를 품고 있으면서도 현실과는 다른 세계가 세상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지금과는 다른 미래가 언젠가는 펼쳐질 거라고 긍정하는 이유를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토록 꿈을 소중히 여기고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사람이 무한한 비관에 빠져들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기다리는 시점에 이 책을 만난 것이 다행이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나는 새사람이 되었고, 나 자신에게는 또 기적이 되었다. 쉬는 동시에 활동하고, 받으면서 베푸는, 나는 재산의 주인이 되었는데, 그중 가장 값진 것을 나는 어쩌면 아직 알지 못한다. (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