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을 입고 - 오은의 5월 시의적절 5
오은 지음 / 난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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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을 좋아하는가. 사실 나는 5월을 좋아하지 않는다. 학창 시절에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같은 온갖 기념일 행사 때문에 부담스러웠고, 어른이 된 이후로는 온갖 기념일 행사 + 결혼식 때문에 지출이 많아서 힘들다. 좋아하지 않는 5월을 좋아할 이유가 생겼다. 바로 이 책 <초록을 입고> 덕분이다. 이 책을 쓴 오은 시인님은 내게 (지금은 종료된) 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의 진행자로 더욱 친숙하다. 출판사 난다에서 한 달에 한 권씩 시인의 책을 출간하는 '시의적절' 시리즈를 런칭하며 그중 첫 번째 5월은 오은 시인이 맡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찌나 반가웠던지. 5월 특유의 싱그러우면서도 다정다감한 분위기가 오은 시인님과 꼭 닮았다. 


오 씨인 데다가 5월 생이기도 해서 5월을 특별히 여긴다는 저자는 이 책에서 시, 동시, 일기, 산문, 인터뷰 등으로 5월 하면 떠오르는 온갖 정서들을 환기시킨다. 매일 매일의 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오발단(오늘 발견한 단어)'이라는 읽을거리까지 곁들인 점이 저자의 후한 인심을 보여주는 듯하다. 오은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관한 글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왜 나만 돌림자 이름이 아니냐고 항의하는 어린 아들에게 '오금은 저리고 오동은 나무라서' 오은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며 킥킥대다 곧이어 등장한 오은이라는 이름의 진짜 의미를 읽고 너무 좋아서 (오은 시인님이 잘 쓰시는 표현을 빌려) 무릎을 쳤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만큼이나 뭉클하고 감동적이었다.


허수경 시인님과의 인터뷰도 인상적이었다. 나이가 들고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누군가의 탄생이나 기쁜 일뿐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이나 슬픈 일로 기억되는 날들이 늘어난다. 그걸 생각하면 어린이든 어버이든 스승이든 누구든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 자체를 기뻐할 수 있는 지금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분히 즐겨야 한다. 그러니 행사가 많아서 지출이 늘어나서 5월이 싫다는 배부른 소리, 철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주변의 한 사람이라도 더 챙겨야지. 5월이면 더욱 생각나는 사람, 애틋하게 느껴지는 사람에게 이 책을 선물하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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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20만 부 에디션, 양장)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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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출신인 저자는 대학 졸업 후 <뉴요커>에 입사했다. 모두가 선망하는 직장에 들어갔으므로 이대로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친형 톰이 폐암에 걸렸다는 것이다. 몇 년 후 톰은 세상을 떠났고, 충격을 받은 저자는 더는 예전처럼 일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회사를 그만둔 그는 뉴욕의 상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취직했다. 하루 여덟 시간에서 열두 시간 동안 미술관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라니. 정신적으로 다른 일을 하기 힘들었던 저자에게는 최적의 직장으로 보였다.


저자는 그로부터 10년 동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일했다. 이 기간 동안 저자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얻은 건 생계 유지를 위한 수입 그 이상이다. 저자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미술관에 자주 드나들었다. 대학에서 미술사 수업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작품 하나 하나를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관찰한 건 경비원 일을 하면서가 처음이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 "예술 작품에 대해 배우지 말고 예술 작품으로부터 배우라(Don't learn about art. Learn from it.)" 많은 사람들이 미술의 역사와 화가의 생애 등을 공부하지만, 작품 하나 하나를 자신의 삶 또는 일상과 연결해 보는 경험은 하지 못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사례(example)다.


미술관 경비원들의 세계를 경험해 본 것도 뜻 깊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경비원으로 일을 시작한 첫 날부터 경비원 일을 그만둔 마지막 날까지의 일들을 자세히 보여준다. 블루칼라 노동이라는 이유로 경비원이라는 직업을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자가 직접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경비원만큼 능력이 다양하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모인 직종이 드물다. 저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경비원 동료 중에는 투자 은행가도 있고 예술가도 있다. 생계를 위해 경비원이 된 경우도 있지만 예술이 좋아서, 봉사하고 싶어서 이 직업을 택한 경우도 있다. 저자처럼 관람객들의 질문에 정확히 답변하기 위해 자신이 맡은 전시관의 작품이나 화가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도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저자가 얻은 가장 큰 기쁨은 삶을 긍정하게 된 것이다. 형의 투병과 죽음을 겪으며 저자는 삶이란 언제 어떻게 갑자기 끝날지 모르는 두렵고 불안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서 삶은 끝나도 예술은 남는다는 걸 눈으로 확인했고, 필멸을 알면서도 삶을 예술에 바친 예술가들을 진심으로 경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경탄한 삶의 경이로움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어졌다. 어쩌면 형이 저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도 이것이 아닐까 싶다. 삶은 짧다. 그러니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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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란 뭘까? - 쓰기에서 죽기까지 막간 1
유진목 지음 / 난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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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가 '쓰기에서 죽기까지'인 줄 모르고 이 책을 샀다. 유진목 시인의 책이니까, 유진목 시인의 책을 좋아하니까 일단 구입부터 한 것이다. 사놓고 보니 126쪽. 분량도 적도 책 크기도 작아서 금방 읽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책장이 잘 안 넘어갔다. 물가에서 물을 향해 걷다가 물속에 들어가면 한 걸음 한 걸음이 점점 더 무겁고 둔해지듯이, 처음에는 가볍게 읽혔던 문장들이 갈수록 묵직하고 의미심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책의 후반부에 드러나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쓰지 않겠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왜 책 제목을 <재능이란 뭘까?>라고 지었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저자 스스로 "정말로 죽지 않을 만큼만 돈을 주고 살려두면서 다른 선택도 못하게 하는 저주"(87쪽)라고 일컬은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가리키는가 싶었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제목의 '재능'은 예술적 재능만이 아니라 심리적 또는 정신적 재능을 의미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 정확하게는 비관 대신 낙관을 택하는 재능, 불행보다 행복을 헤아리는 재능, 죽음에 이끌리지 않고 삶을 기꺼이 살아내는 재능. 어떻게 보면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재능보다 이런 재능이 개인의 삶의 질을 더 높이지 않나 싶다. 잘 먹고 잘 살아도 불행한 사람은 불행하고, 잘 못 먹고 못 살아도 행복한 사람은 행복하니.


어쩌면 사랑의 재능인가 싶기도 하다. 사랑을 발견하는 재능, 사랑을 시작하는 재능, 사랑을 지속하는 재능, 사랑을 끝내는 재능... 아 난 정말 이런 재능이 별로 없어서, 거리에서도 사랑을 발견하고 아무 걱정 없이 사랑을 시작하며 의심 한 점 없는 마음으로 사랑을 지속하고 미련 없이 사랑을 끝내는 사람들이 너무 부럽다. 나는 왜 사랑을 잘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시작할 용기도 못 내고 지속하는 건 더욱 젬병이며 끝내는 건 또 왜 그리 어려워 하는지. 그러고 보면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재능이 큰 사람은 사랑도 잘하는 것 같고. 너무 부럽네. 나는 왜 이럴까.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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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널 미워해 - 『정년이』 원작자가 쓴 유난한 사랑의 목록
서이레 지음 / 마음산책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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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나를 웃기고 울린 콘텐츠 중에 <정년이>를 빼놓을 수 없다. 드라마 <정년이>를 보고 너무 재미있어서 원작 만화 <정년이> 단행본 전 권을 구입해 한 권 한 권 읽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던가. 나에게 이토록 충격적인 즐거움을 준 만화는 이전에 없었고(이건 확실)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이건 불확실). 그렇다면 <정년이> 원작자 서이레 작가님의 산문집 <미안해 널 미워해>도 읽어볼 밖에. 


읽어보니 <정년이>의 주인공 윤정년이 썼나 싶을 정도로 문장이 솔직하고 일화들도 재미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의 눈을 피해 몰래 만화를 탐독하던 어린 시절, 할 말은 하는 성격 때문에 '교무실 파이터'라는 별명이 붙었던 학창 시절, 작가가 된다는 꿈만 믿고 즐겁게 대학 생활을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웹툰 작가로 데뷔하고도 인기작을 내지 못해 고민하던 사회 초년생 시절 등 좌충우돌하는 청춘 서사 그 자체다. 팬데믹 시기에 우연히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고 '그알 폐인'이 되셨다는 일화도 재미있었다. 나도 한 번 각 잡고 봐볼까.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사실 따로 있다. 바로 작가님의 인생 첫 만화가 김동화, 한승원 작가님의 <천 년 사랑 아카시아>였다는 것! 작가님이 초등학교 5학년 또는 6학년 때 동방신기가 데뷔했다는 걸로 보아 나보다 5, 6살 어리신 것 같은데 나도 아는 만화를 보셨다니 신기했고, 내가 그 만화에서 기억하는 유일한 장면을 작가님도 강렬하게 기억하고 계신 점이 놀라웠다. 돌이켜 보면 이 시절 만화 중에 충격적인 작품이 많았는데 지금도 읽히는 작품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재조명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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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른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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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언제까지 어린이이고 언제부터 어른일까. 베스트셀러 <어린이라는 세계>를 쓴 김소영 작가의 신작 <어떤 어른>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나 자신의 지난날을 헤아리면서 어린이였던, 청소년이었던, 어른이었던 날들 내내 나는 나였다는 걸 알았다." (6쪽) 정말 그렇다. 언제까지 어린이, 언제부터 어른이라는 기준이 나라마다, 사회마다, 개인마다 다양하게 있지만, 나이에 상관 없이 '나는 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나라, 어떤 사회에서는 어린이인 '나'들과 어른인 '나'들을 구분한다. 대체로 그 구분은 약자인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때로는 그 구분이 어린이를 차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린이를 보호한다는 건 무엇이고 차별한다는 건 무엇일까. 


이 책은 오랫동안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했고 현재는 독서교실 선생님으로서 어린이들을 만나고 있는 저자가 바람직한 어른의 태도란 무엇인지 고민한 내용을 담고 있다책에 이런 사례가 나온다. 어떤 어린이가 친구 문제로 고민하자 지켜보던 부모님이 이런 말을 했다. "졸업하면 다시 안 보는 사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어른 되어서 만나는 친구가 더 좋은 친구다" 부모님 입장에선 어린이를 위로하기 위해 (좋은 뜻으로) 한 말이고, 내용 자체도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어린이 당사자에게는 이런 말도 상처가 된다. 졸업하면 안 볼 사이니까, 어른 되어서 만나는 친구가 더 좋은 친구이니까 지금 만나는 친구와 겪는 문제는 별일 아닌 걸로 치부하는 어른들의 이런 태도는 어린이 입장에선 보호가 아니라 차별이다.


어린이는 순수하다, 명랑하다, 활달하다 같은 생각도 편견이다. 어른들 한 명 한 명이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니듯이 어린이들도 한 명 한 명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닌다. 그런데 어른들 멋대로 어린이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 놓고는 그에 맞지 않는 어린이에게는 '어린이답지 않다'는 딱지를 붙인다. 이러한 편견이 확장된 사례가 '노 키즈 존'이다. 저자는 '노 키즈 존' 자체에는 반대하지만 어린이 동반 손님을 배제할 수 밖에 없는 업주들의 입장 또한 이해하므로, 단순히 '노 키즈 존'이라고 명시하는 대신 어린이 동반 손님이 수긍할 만한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해줄 것을 제안한다(예 : 식탁에 화기가 있어서 위험하다, 깨지기 쉬운 장식품이 많다). 이렇게 하면 어린이 동반 손님 입장에서 차별 당하는 느낌이 들기보다는 보호 받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어린이'라는 사실은 명백히 어린이의 정체성이다. 정체성 때문에 특정한 장소에 출입을 못 하게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논리적으로 어쩔 수 없이 차별이다. 이 차별이 사회적으로 허용된다면 '노 휠체어 존'이, '노 시니어 존'이, 또 '노 무슨 무슨 존'이 생길 것이다. 사실 문제 상황을 가정한다면 차별과 배제는 가장 쉬운 해결책이다. 나는 이 어려운 문제를 어렵게 풀고 싶다. 평등을 찾아가는 길은 원래 어려운 법이니까. (264쪽)


인간은 어린이일 때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어른일 때도 자란다. 후자는 보통 '늙는다'라고 표현하지만, 늙음, 노화를 수용하는 과정 또한 개인에게는 '자람'이다. 늙는다고 생각하면 서럽고 슬프지만, 젊을 때 누린 것들을 헤아리면 그렇게 서럽고 슬프지만도 않다. 저자는 <아기 공룡 둘리>의 연재를 실시간으로 읽고 '뉴 키즈 온 더 블록'을 1집 때부터 좋아한 것이 자랑인데, 같은 이치로 <슬램덩크>, <세일러문>의 TV 애니메이션을 실시간으로 보고 H.O.T, 동방신기, 엑소를 데뷔 때부터 본 내가 자랑스럽다(ㅎㅎ). 앞으로 건강 관리 열심히 해서 일흔 넘어서도 잘 먹고 잘 읽는 할머니가 되어야지. 그때 '노 시니어 존', '노 휠체어 존' 같은 차별을 안 당하려면 (머지 않아 어른이 될) 어린이들이 어린이라는 이유로 차별 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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