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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른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4년 11월
평점 :

사람은 언제까지 어린이이고 언제부터 어른일까. 베스트셀러 <어린이라는 세계>를 쓴 김소영 작가의 신작 <어떤 어른>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나 자신의 지난날을 헤아리면서 어린이였던, 청소년이었던, 어른이었던 날들 내내 나는 나였다는 걸 알았다." (6쪽) 정말 그렇다. 언제까지 어린이, 언제부터 어른이라는 기준이 나라마다, 사회마다, 개인마다 다양하게 있지만, 나이에 상관 없이 '나는 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나라, 어떤 사회에서는 어린이인 '나'들과 어른인 '나'들을 구분한다. 대체로 그 구분은 약자인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때로는 그 구분이 어린이를 차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린이를 보호한다는 건 무엇이고 차별한다는 건 무엇일까.
이 책은 오랫동안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했고 현재는 독서교실 선생님으로서 어린이들을 만나고 있는 저자가 바람직한 어른의 태도란 무엇인지 고민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에 이런 사례가 나온다. 어떤 어린이가 친구 문제로 고민하자 지켜보던 부모님이 이런 말을 했다. "졸업하면 다시 안 보는 사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어른 되어서 만나는 친구가 더 좋은 친구다" 부모님 입장에선 어린이를 위로하기 위해 (좋은 뜻으로) 한 말이고, 내용 자체도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어린이 당사자에게는 이런 말도 상처가 된다. 졸업하면 안 볼 사이니까, 어른 되어서 만나는 친구가 더 좋은 친구이니까 지금 만나는 친구와 겪는 문제는 별일 아닌 걸로 치부하는 어른들의 이런 태도는 어린이 입장에선 보호가 아니라 차별이다.
어린이는 순수하다, 명랑하다, 활달하다 같은 생각도 편견이다. 어른들 한 명 한 명이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니듯이 어린이들도 한 명 한 명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닌다. 그런데 어른들 멋대로 어린이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 놓고는 그에 맞지 않는 어린이에게는 '어린이답지 않다'는 딱지를 붙인다. 이러한 편견이 확장된 사례가 '노 키즈 존'이다. 저자는 '노 키즈 존' 자체에는 반대하지만 어린이 동반 손님을 배제할 수 밖에 없는 업주들의 입장 또한 이해하므로, 단순히 '노 키즈 존'이라고 명시하는 대신 어린이 동반 손님이 수긍할 만한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해줄 것을 제안한다(예 : 식탁에 화기가 있어서 위험하다, 깨지기 쉬운 장식품이 많다). 이렇게 하면 어린이 동반 손님 입장에서 차별 당하는 느낌이 들기보다는 보호 받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어린이'라는 사실은 명백히 어린이의 정체성이다. 정체성 때문에 특정한 장소에 출입을 못 하게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논리적으로 어쩔 수 없이 차별이다. 이 차별이 사회적으로 허용된다면 '노 휠체어 존'이, '노 시니어 존'이, 또 '노 무슨 무슨 존'이 생길 것이다. 사실 문제 상황을 가정한다면 차별과 배제는 가장 쉬운 해결책이다. 나는 이 어려운 문제를 어렵게 풀고 싶다. 평등을 찾아가는 길은 원래 어려운 법이니까. (264쪽)
인간은 어린이일 때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어른일 때도 자란다. 후자는 보통 '늙는다'라고 표현하지만, 늙음, 노화를 수용하는 과정 또한 개인에게는 '자람'이다. 늙는다고 생각하면 서럽고 슬프지만, 젊을 때 누린 것들을 헤아리면 그렇게 서럽고 슬프지만도 않다. 저자는 <아기 공룡 둘리>의 연재를 실시간으로 읽고 '뉴 키즈 온 더 블록'을 1집 때부터 좋아한 것이 자랑인데, 같은 이치로 <슬램덩크>, <세일러문>의 TV 애니메이션을 실시간으로 보고 H.O.T, 동방신기, 엑소를 데뷔 때부터 본 내가 자랑스럽다(ㅎㅎ). 앞으로 건강 관리 열심히 해서 일흔 넘어서도 잘 먹고 잘 읽는 할머니가 되어야지. 그때 '노 시니어 존', '노 휠체어 존' 같은 차별을 안 당하려면 (머지 않아 어른이 될) 어린이들이 어린이라는 이유로 차별 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