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리커버 특별판)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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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은 물론 자기 집 한 채 가지기도 힘든 이 나라를 가리켜 청년들은 '헬조선'이라고 부른다. '탈한국'을 목표로 해외 취업이나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1905년 인천 제물포에서 멕시코로 향하는 기선에 올라탄 조선인들도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김영하의 소설 <검은 꽃>은 멕시코로 떠난 제1세대 조선인 이민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그린 수작이다. 


이들은 먼저 하와이로 떠난 조선인 이민자들이 등 따습고 배부르게 잘 산다는 거짓 소문에 속아 겨우 멕시코행 배표를 구해 태평양을 건넌다. 이들 중에는 몰락한 왕족인 이 씨 일가도 있고 일제가 장악한 군대에서 쫓겨난 군인들, 얼마 안 되는 논밭마저 일제에 빼앗기고 도망친 농민들, 궁을 떠난 내시, 천주교 신부와 사기꾼도 있다. 이들은 출신도 다르고 고향도 다르지만, 고국인 조선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보기로 마음먹은 건 똑같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건 고국에서보다 비참한 삶, 고독한 미래다. 


이들은 멕시코 땅을 밟기가 무섭게 멕시코 전역에 있는 에네켄(애니깽) 농장으로 끌려가고, 생전 처음 보는 꼬부랑글씨로 적힌 계약서에 의해 에네켄 농장의 채무 노예가 된다. 선박용 로프를 만드는 재료인 에네켄은 선인장과 비슷하게 생긴 작물로, 표면이 거칠고 가시가 많아서 잘못 만졌다가는 손바닥이 긁히고 까져서 피투성이가 된다. 그런 에네켄은 하루에 수백 개씩 수확하고, 조금만 일을 게을리해도 농장주한테 채찍질 세례를 당하고, 그렇게 굴욕을 당하며 하루 종일 일해도 배불리 먹거나 마음 편히 잘 수도 없고. 얼마나 끔찍한지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 자살을 택하는 이도 많았다는 말이 납득이 된다. 


다만 작가는 이들의 생애를 비극적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쓰러지고 죽어나가는 배 안에서도 소년과 소녀는 사랑에 빠지고, 농장주 허락 없이 농장 밖으로 나가면 총살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이들은 사랑을 속삭이고 몸을 섞는다. 제물포에서 신부의 십자가를 훔쳤던 도둑은 신심을 인정받아 농장주의 심복이 되고, 십자가를 잃어버린 신부는 가혹한 노동으로 인해 그동안 억눌렀던 신기(神氣)가 튀어나와 무당이 된다. 농장주의 감시를 피해 모인 조선인들끼리 굿판을 벌이고 잔치를 즐기기도 한다.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을까. 작가의 상상에 불과할까. 


작가는 농장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 몇몇이 멕시코에 불어닥친 혁명과 내전의 바람 속에서 또다시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모습도 자세히 그린다. 이 또한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작가의 상상에 불과한 지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과 일본, 멕시코에 모두 적을 두었으나 어느 나라로부터도 마땅한 보호와 지원을 받지 못한 이들이 끝내 자기들 힘으로 나라를 세운다는 결말은 감동뿐 아니라 통쾌함마저 준다. 한민족의 역사를 그린 민족 문학, 역사 소설로 시작해 민족이나 국가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고발하며 끝나는 점도 김영하 다운 파격이라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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