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거기, 머물다 - 공경희 북 에세이
공경희 지음, 김수지 그림 / 멜론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나에게는 유나라는 딸아이가 있다. 그 아이가 모리 교수처럼 강하고 고운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며 엄마로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번역했다. 아니, 그보다 내 자신이 그처럼 강하고 고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될 각오로 번역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 책은 나를 다시 깨어나게 해준 글이었다. (p.113) 

 

대학 입학 면접시험 때 면접관은 내게 "왜 어문학 계열에 진학하려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다른 문화권과 우리 문화 사이의 다리가 되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미리 마음 먹었던 것도, 면접시험용으로 생각해둔 그럴듯한 대답도 아니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떠오른 일종의 '재치'였는데 영문과 졸업 후 전혀 뜻하지 않게 번역 작업을 시작해서 십오 년 가까이 일하고 있는 요즘, 그 대답이 '재치'를 넘어 나도 모르게 운명을 말해버린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p.153)  

 

정신분열증을 끌어안고 그림 속으로 빠져들었던 고흐 덕분에 우리는 그의 강렬한 그림들을 볼 수 있다. 또 로트렉이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며 물랭루주의 무희들을 그림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낮은 존재들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화가의 마음에 다가설 수 있다. 결국 예술가의 고통을 딛고 예술을 즐기는구나 싶어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p.235) 

 

이 작품(달팽이는 왜 길을 떠났을까)을 번역하면서 나는 줄곧 '떠남'에 대해 생각했다. 매일 반복되는 생활을 일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매일 떠나는 여행은 아닐까 묻기 시작했다. 번역을 하면서 대하는 글, 거기 담긴 글쓴이의 생각과 그 글을 읽는 나의 느낌, 그것을 나의 이해력과 문화적 경험에 실어 우리말로 담아내는 일. 읽고 옮기는 글의 내용과 작가의 생각이 늘 바뀌고, 나의 표현도 늘 바뀐다. 혹시 그런 게 떠남이고 여행이고, 새로운 세계로의 모험이 아닐까. (pp.345-6)



읽는 책이 대부분 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 번역가에게까지 관심을 가진 건 최근의 일이다. 아마도 일본어 번역가 권남희 님이 쓰신 에세이집 <번역에 살고죽고>를 읽고나서부터가 아닌가 싶은데, 특히 저자가 역자후기마다 딸 정하에게 보내는 문장을 남긴다는 부분이 인상에 남아 그 때부터 권남희 님이 쓰신 책을 읽을 때면 본문이 아닌 역자후기부터 살피는 특이한 버릇까지 생겨버렸다.



앞으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등을 번역한 영미 번역의 대가 공경희 님이 번역한 책을 읽을 때는 역자 후기에 혹시나 딸 유나의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았는지 찾아보는 버릇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25년 이상의 경력을 자랑하는 공경희 님의 역자 후기를 모은 에세이집 <아직도 거기, 머물다>를 읽으면서 나는 번역가로서의 저자보다도 번역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 아이의 엄마, 한 여자의 아내,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도 열심히 살고 끊임없이 성장한 저자의 모습에 더 많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딸 유나와 얽힌 에피소드들이 인상적이었는데, 십여 년 전만 해도 어린 딸에게 읽히고 싶은 동화책을 번역하던 저자가 이제는 숙녀가 된 딸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인물들을 소개하는 대목들을 보면서, 이렇게 어머니의 마음으로 책을 대하고 글을 쓰는 저자라면 독자로서 믿고 따를 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번역한 책 중에 내가 읽은 것을 꼽아보니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파이 이야기>, <우리는 사랑일까>, <행복의 추구> 등등 제법 많았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감명 깊게 읽은 책들이라는 것. 특히 <파이 이야기>와 <행복의 추구>는 페이지가 넘어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는데 두 권 다 저자가 번역한 책들이라니 반갑고 고마웠다. 나도 언젠가 좋은 책을 번역해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소개해보고픈 꿈이 있는데 언제쯤 이루어질지...... 데뷔 이래 하루도 쉬지 않고 번역을 했다는 저자의 노고를 생각하니 꿈만 꾸고 노력을 안 해서는 택도 없는 일이겠다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