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적 공간 - 왜 노인들은 그곳에 갇혔는가
오근재 지음 / 민음인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종로3가 역 5번 출구로 나와 운현궁 맞은편에 있는 서울노인복지센터에 들러 점심 식권을 서둘러 예약하고 종묘시민공원까지 되돌아오는 동안 거의 모든 골목길에서 금은방과 마주친다. 금은방 끝자락에 자리한 간판 없는 허름한 식당들과 소주방, 좁은 골목 사이에서 커피 파는 아줌마들을 만나면 그곳이 바로 종묘시민공원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혹여 노인복지센터에 늦게 도착해서 점심 식권을 못 받게 되더라도 이곳에서 파는 콩나물 국밥 정도라면 3500원의 용돈으로도 허기를 면할 수 있다. 지금은 비록 젊은 시절처럼 금은방을 드나들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시민공원과 금은방의 경계가 담으로 차단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그것은 자신들의 쉼터가 삶의 공간으로부터 아직까지는 격리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다. (p.204)



요즘 나이 쉰은 노인이 아니라지만, 현재 오십대 중반인 부모님이 문득 노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올해로 입사한 지 삼십 년째인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앞두고 계시고, 어머니는 갱년기 탓에 몸도 마음도 예전같지 않으시다. 이러다 몇 년 후면 환갑을 맞으실 테고, 나나 동생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영락없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실 터. 내 기억 속에는 지금의 나처럼 젊었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남아있는데, 지금 내 눈 앞에 계신 두 분은 그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에 더 가깝다. 멀게만 느껴졌던 노인의 삶이 이제 우리집 거실까지 넘어들어온 것이다. 

 


<퇴적 공간>은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인 노인 문제를 다뤘다. 노인 문제 하면 보통 고령화사회나 실버산업, 은퇴후 생활 등 경제, 사회적인 측면에서 접근한 책이 많은데, 이 책은 홍익대학교 조형대학장을 지내며 오랫동안 학자, 교육자로서 살아온 저자의 이력을 살려 노인 문제를 인문, 철학, 예술, 역사 등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했다. 그래서 이제까지 읽은 여느 노인 관련 책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서울이라는 공간을 인문학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한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책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저자는 탑골공원을 비롯하여 종묘시민공원, 서울노인복지센터, 허리우드 극장, 인천 자유공원 등 노인들의 '아지트'에 직접 가봤다. 이제껏 강남역, 명동, 홍대 등 서울 시내 젊은이들의 공간을 다룬 책은 많이 보았지만, 노인들의 공간을 다룬 책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저자가 같은 노인으로서 보고 느낀 바를 여실히 담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노인이 아닌 사람들이 노인 문제를 말하는 경우는 많지만 노인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어쩌면 이것 또한 노인들을 중심부에서 밀어내는 이 사회의 병폐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 아닐까. 이제껏 무심코 지나쳤던 '퇴적 공간'을 알고 나니 태어나고 자란 이 도시 서울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