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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과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의 기억과 친구의 기억이 조금씩 다르거나, 심지어는 전혀 달라 당황할 때가 종종 있다. 가령 나는 친구가 A를 좋아한다고 해서 도와줬는데, 친구는 내가 자진해서 다리를 놓은 것으로 기억하는 식이다. 누구의 기억이 진실인지 가려줄 사람마저 없는 경우, 그때까지 좋았던 추억은 진실인지 아닌지 애매하다는 이유로 빛을 바라고, 오해 내지는 혼란으로 애처롭게 전락한다.
현대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인간의 불확실한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토니의 반에 어느 날 에이드리언라는 범상찮은 소년이 전학을 온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고, 졸업 후 다른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토니는 편지 한 통을 받는다. 편지는 에이드리언이 토니의 전 여자친구인 베로니카와 사귀기로 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토니는 베로니카에 대한 배신감과 에이드리언에 대한 질투심으로 속이 뒤틀렸지만 쿨하게 인정했고, 얼마 후 미국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한참 후 집으로 돌아온 토니는 비극적인 소식을 듣게 되고, 그로부터 몇십 년이 지나 노년이 되어서야 그 시절에 대한 자신의 기억이 반쪽짜리였음을 깨닫게 된다.
토니가 그랬듯이 내가 지금껏 진실로 여겨온 기억 또한 내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본, 현실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것도 모르고 내멋대로 남을 미워하거나 욕한 적은 없는지 돌아본다. 아니, 내가 남을 미워하거나 욕했을 때 대부분이 착각 내지는 오해는 아니었을까. 혼란스럽다. 나는 이 책을 뒤에서 남 험담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반쪽짜리 기억으로 남을 미워하고 욕하고, 그러고도 속시원하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인간의 기억이 불확실하다는 사실은 다른 식으로도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친구와 깔깔대며 웃었던 기억, 연인과의 애틋했던 시간처럼 좋았던 기억들이 백퍼센트 진실이 아니며, 그들과 온전히 공유할 수 없었다니. 내가 즐겁고 행복했던 만큼 그들도 즐겁고 행복했을까? 반대로 내가 슬펐거나 외로웠던 시간 동안 그들은 나를 생각하고 사랑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어떤 관계도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없으며 이를 알고 있음에도, 기억이라는 녀석이 늘 나를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 원통하고 또 애달프다.
이 책은 스웨덴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 맨부커상 수상작이다. 부커상 수상작을 읽은 건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읽다만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에 이어 세번째. 이 책을 알게 된 건 '이동진의 빨간책방' 덕분이다. 동진 님이 하도 극찬을 하셔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실망스럽지 않았다. 책을 읽고나서 방송을 다시 들었는데 들은 듯한 기억이 나는 대목이 하나도 없어 다시 한번 기억이라는 녀석에게 뒤통수를 맞은 듯 했다. 기억에서 지워지기 전에 줄리언 반스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