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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ㅣ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황정은 작가를 알게된 건 '창비 라디오 책다방'보다 먼저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통해서였다. 그 때만 해도 한국 소설을 그리 많이 읽지 않았는데, 영화든 책이든 깐깐하기로 소문난 이동진 DJ가 황정은 작가를 하도 강력하게 추천해서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 언제인가 '창비 라디오 책다방'을 듣게 되었다. <헌법의 풍경>, <욕망해도 괜찮아> 등을 쓴 김두식 교수님이 진행한다고 해서 듣기 시작했는데, 같이 진행하는 분의 목소리가 낭랑하니 예뻐서 누구일까 하고 귀를 기울였더니 다름아닌 황정은 작가였다. 이거슨 운명이다, 라는 생각에 그날부로 황정은 작가의 책을 샀는데 어쩐지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기대가 커서 실망하면 어쩌나, 목소리에 속은 게 아닐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황정은 작가의 신간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나왔다. 이 책을 읽으려면 먼저 전에 산 책들을 읽어야 할텐데 하는 생각에 잔뜩 겁을 먹고 <백의 그림자>를 집어들었다.
그런데 아, 이 소설 정말 좋다. 그동안 내가 읽은 책들에 비하면 상당히 얇아서 금방 읽을 줄 알았는데(금방 읽기는 했다), 다 읽고나니 잘 만들어진 두 시간짜리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은교와 무재의 사랑 이야기는 지극히 환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라서 소설 한 편을 읽고도 두 편의 소설을 읽은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잘난 곳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평범한 여자와 남자가 만나 평범한 공간에서 평범한 사랑을 하는 이야기인데 왜 이렇게 특별하고 로맨틱하게 느껴지는지. 인기 드라마나 영화 속 인스턴트 사랑에 익숙하던 내 입에 누군가가 공들여 키운 유기농 채소가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왜 이동진 DJ가 강력추천했는지, 황정은 작가의 담담한 목소리와 말씨가 그토록 매력적으로 들렸는지 알 것 같다. 그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 주변에서 펼쳐지는 상황은 현실의 복사판이라는 점도 좋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몰린 전자상가, 그 안에서 개미처럼 살아가는 인간들, '슬럼'이라고 불리는 동네에서 나고자란 남자...... '그림자'라는 소재는 등장인물들을 이어주는 화제이기도 하지만 그들 자신의 처지를 일컫는 은유가 아니었는가 싶다.
그저께 밤에 이 소설을 읽고 곧이어 어젯밤에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었는데,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이 소설에 비해 책 자체는 얇지만 무게감은 더 묵직하다. 제목만 보아서는 어두운 '그림자'보다야 '앨리스씨'가 훨씬 가벼울 듯 한데 말이다. 정확한 이유야 나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창비 라디오 책다방' 내용으로 짐작건대 작가 자신이 사회 문제에 전보다 관심을 가지고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물론 황정은 작가의 사회에 대한 관심은 <백의 그림자>에서도 엿보인다). 아무래도 황정은 작가를 오래오래 좋아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