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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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글은 재미있는 건 물론이고 잘 읽혀서 참 좋다. 얼마 전에 읽은 <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도 그런 책이다. 애써 잠을 청해야 했던 그 날 밤, 쉬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집어든 책이 이 책이었다. 재미없는 책이면, 잘 읽히지 않는 책이면 금방 잠이 들었으련만, 이 책은 내 기분과 다르게 너무나도 재미있고 잘 읽혀서 금방 다 읽고 다른 책을 골라야 했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이 영국 히드로 공항 관계자로부터 아주 매력적인 제안을 받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제안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일주일 동안 공항에서 머물면서 그곳을 배경으로 글을 쓰는, 즉 "상주작가"가 되어달라는 것. 공항에 대해 우호적인 글만 쓸 의무는 없다고 전했지만, 저자는 이 제안을 받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술가로서, 사실상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자인 기업을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이 모순적이고 굴욕적이라고 느껴졌던 탓이다. 하지만 돈보다도 그의 마음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공항이라는 공간이 작가에게는 참으로 매력적인 글감이라는 것이었다. "공항 터미널은 현대 문화의 상상력이 넘쳐나는 중심이다. 만약 화성인을 데리고 우리 문명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들 - (중략) - 을 깔끔하게 포착한 단 하나의 장소에 데려가야 한다면, 우리가 당연히 가야 할 곳은 공항의 출발과 도착 라운지밖에 없을 것이다." (p.16) 결국 저자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공항의 "상주작가"라는 세계 최초의 시도가 시작되었다.

 


저자는 일주일 동안 공항과 공항 인근 호텔에 머물며 그곳을 자세히 관찰했다. 건축의 외관 또는 인테리어에 시선을 두기도 하고, 오고가는 사람들이나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관찰하거나 인터뷰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저자는 "상주작가"로서 해야할 단순한 관찰이나 기록에 그치지 않고, 그곳의 이야기를 현대사회의 속성과 인간의 실존 문제로 확대했다. "비행이라는 의식은 겉으로는 세속적으로 보이지만, 이 비종교적인 시대에도 여전히 실존이라는 중요한 주제 그리고 세계의 종교 이야기에 그 주제들이 굴절되어 나타난 모습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p.113) 질병이나 사고로 죽을 위험이 현저히 낮아진 현대 사회에서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깝게 느낄 일이 많지 않다. 그러나 비행기를 탈 때만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하고, 심한 경우 공포증을 겪기도 한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 오늘 당장 죽을 수도 있다, 그 누구도 영원히 살 수는 없다 - 는 진리를 일깨워 주는 곳. 그 곳이 바로 공항이라고 저자는 풀이했다.

 


이런 데에서 위대한 작가와 그냥 작가의 차이점이 보이는 것 같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쓰는 작가가 가장 좋은 작가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알랭 드 보통은 공항이라는 평범한 주제로도 쉽고 재미있는 글을 쓸 줄 알고, 그 안에 어려운 개념을 녹여내는 재주를 가진 대단한 작가다. 이 책이 나온 이후 작가들이 공항을 무대로 글을 쓰거나 아예 공항에서 글을 쓰는 일이 늘었다고 한다. 공항이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매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작가라면 한번쯤 알랭 드 보통처럼 글을 써보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어찌됐든 히드로 공항 관계자의 예상은 적중한 것 같다. 공항을 찾는 작가들을 비롯하여,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공항에, 그 중에서도 히드로 공항에 가보리라 마음먹게 만드는 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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