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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주얼 베이컨시 1
조앤 K. 롤링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수첩 / 2012년 12월
평점 :
딸아이의 분유값 걱정을 하던 싱글맘이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며 엄청난 부와 명예를 거머쥔 이야기는 동화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해리포터 시리즈>를 낳은 영국의 작가 조앤.K.롤링에게는 말이다.
조앤 롤링의 신작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녀가 왜 책을 썼을까 궁금했다. 혹자는 글쓰기라는 작업이 '천형(天刑)'에 가까운 고역이라고 하던데, 더 이상 분유값을 벌기 위해, 또는 유명해지기 위해 글을 쓸 필요가 없는 그녀가 다시 펜을 잡은 이유는 뭘까? 게다가 이번 신작이 그녀의 주특기인 어린이, 청소년 대상의 판타지물이 아닌 성인 대상의 정통 소설이라는 말을 듣고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후속편을 낸다면 또 한번 화제가 될텐데, 왜 그녀는 안전한 길을 따르지 않았을까?
이런 의문들은 <캐주얼 베이컨시>를 읽으면서 시원하게 풀렸다. 어쩌면 그녀가 이 책을 쓰기 위해 <해리포터 시리즈>를 쓴 것이 아닐까 싶을만큼 큰 감동을 받았다. 장장 십 년이라는 기간 동안 대작 판타지물을 쓰면서 이런 매력적인 소재와 예리한 관찰력, 도발적인 문제 의식을 품고 있을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캐주얼 베이컨시>는 영국의 조용한 시골 마을 패그 포드의 지역구 의원 배리 페어브라더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시작된다.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추리소설 같은 느낌도 든다. ) 공석이 된 페어브라더의 의원직을 누가 채울 것인가를 두고 평화롭게만 보였던 마을 사람들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그러면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해묵음 경쟁심과 부정, 욕망들... 얼마전 대통령 선거를 치렀기 때문에 선거라는 주제와 선거에 대한 묘사, 인물들의 관계가 유난히 마음에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시골 마을의 지역구 의원직을 두고도 이렇게 멀쩡했던 사람들이 광기어린 모습을 보이는데 현실 선거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뭐 그런 상상도 해보면서.
소설의 표면적인 소재는 선거지만, 실질적인 소재는 가정으로도 볼 수 있다.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고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소위 말하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온 후보들. 그러나 그들이 가정에서도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집에 돌아가면 한 가정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인 그들은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욕망과 비열함, 폭력성을 유감 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의 자식인 패츠와 앤드루 그리고 수크빈더 세 아이는 선거를 계기로 이제까지 참아왔던 분노와 저항심을 표출하게 된다.
이 세 아이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소녀 크리스털이 나오는 부분을 읽을 때마다 영국 10대들의 고민과 방황, 좌절을 그린 드라마 <스킨스(Skins)>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청소년 대상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만큼 폭력과 마약, 성에 대한 묘사까지도 적나라한 드라마 <스킨스>를 보면서 느꼈던 충격을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느꼈다. (소설이라서 드라마만큼 수위가 높지는 않지만 청소년에게 읽히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더 큰 충격은 부모와 교사를 비롯한 어른들의 위선과 허영, 폭력을 경멸하던 아이들이 언제부터인가 그토록 혐오했던 어른들의 모습을 닮고 있었다는 것. 그에 반해 (겉보기에는) 따뜻한 가정이 있고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아이들과 달리, 마을에서 가장 타락하고 혐오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던 소녀 크리스탈이 마치 이들의 죄를 씻듯 순수와 희망의 상징으로 남는 장면을 보며 묘한 슬픔과 감동을 동시에 느꼈다.
궁극적으로 이 소설은 영국 중산층의 욕망과 권태, 하위 계층의 고달픈 생활을 동시에 보여주고, 기성 세대의 과오와 젊은 세대의 반발심을 여러 차원으로 나누어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채로운 매력이 있는 수작이다.
형식상으로 보나, 주제로 보나 <해리포터 시리즈>와 닮은 점이 많은 작품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연관하여 생각하게 되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닮은 점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 세계에 다른 차원의 세계가 존재한다든지, 보이지 않는 계급 구조가 있다든지,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의 갈등이라든지, 선한 존재의 죽음으로 인해 혼란이 생긴다든지 등등... 특히 선한 인물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도입부라든가, 한 아이의 죽음과 새로운 부활이라는 마무리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시작과 결말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또한 이 소설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10대와 기성세대, 아내와 남편, 선생과 학생 - 이런 이분법적인 구도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부자와 빈자가 같은 욕망을 향해 치닫고, 세대가 서로를 닮아가며, 가족과 학교가 질서를 잃고 혼란을 겪는 모습을 통해 이분법적인 세상의 섞임 내지는 혼돈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하듯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선이 가지고 있는 악한 이면과, 악이 가지고 있는 선한 이면 같은 이중적인 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는 작가의 이런 세계관과 사회 의식을 판타지라는 프리즘으로 여과하여 보여준 작품이고, <캐주얼 베이컨시>야말로 작가 조앤 롤링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작품 세계가 아닐까 싶다. 앞으로 그녀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