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 인문학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속옷 문화사 지식여행자 10
요네하라 마리 지음, 노재명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우연이라면 얄궂게도,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을 읽은 날 저녁에 요네하라 마리의 <팬티 인문학>을 읽었다.

한국어판 제목이 다섯 글자라는 점 말고도 두 책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일본 문화에 대한 책이라는 것.

 

다만 롤랑 바르트는 철저히 서구인의 시각에서 일본 문화를 바라본 반면에,

요네하라 마리는 일본 땅에서 태어나 일본인 부모 밑에서 자란 일본인이면서도,

학창시절을 외국 - 체코 프라하 - 에서 보냈기 때문에

이방인의 시선이 가미된 관점에서 자국의 문화를 관찰한다는 점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요네하라 마리의 대표작 중 하나인 <팬티 인문학>은

그녀의 통통 튀는 호기심과 재기 넘치는 글재주가 유감 없이 발휘된 책이다.

 

그녀가 평생에 걸쳐 연구한 주제는 크게 성(性), 언어, 문화 - 이렇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어느 책을 보나 세 가지 주제에 대한 화제가 등장하지만

제목에서도 느껴지듯이 이 책에는 성적인 내용이 등장하는 빈도가 높은 편이다.

(그러나 야한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나만 그런가?)

 

그녀는 어릴 때부터 속옷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아니, 정확히는 속옷 너머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먼저였고, 속옷에 대한 관심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기독교계 유치원에 입학한 첫날, 새로 만난 친구들과 맛있는 점심밥보다도

십자가에 못박힌 아저씨(?)의 그곳(!)을 가리고 있는 것의 정체가 궁금했다는 그녀는

사춘기 시절에는 일본 소설과 러시아 소설을 독파하며 성적인 호기심을 해소했고,

성인이 된 후에는 글을 쓰면서 본격적으로 연구에 몰입했다.

 

사실 그녀의 호기심은 남다르다고 할만한 것은 아니다.

옛날 사람들은 언제부터 속옷을 입었을까, 어떤 속옷을 입었을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떤 속옷을 입을까...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한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다만 그녀는 호기심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호기심을 개인적인 경험에 접목시키고 다양한 나라의 문헌을 넘나들며 본격적으로 연구했다는 점이 다르다.

 

러시아어를 비롯한 언어구사 능력과 유학 경험이 바탕이 되기는 했지만,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일본의 여성들이

공중목욕탕에서 맨몸을 보이는 것은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은 왜일까,

와이셔츠가 일반적인 셔츠 길이보다 더 길고 맨 밑부분이 트여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비에트계 학교에서 가정 시간에 팬티 만드는 방법을 가르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사소한 호기심과 개인적인 경험조차도 역사와 문화의 소산으로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인문학적인 열정과 탐구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연재와 강연을 통해 그녀의 연구가 발표될 때마다

전국 각지에서 독자들이 전화와 편지 등을 통해 의견을 덧붙인 것을 보며 일본인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속옷이라는 - 극히 사소하고 사적인 영역조차도 집요하게 연구하고 공적인 담론으로 만들어내는 이런 문화.

이런 문화적 토양이 있었기 때문에 요네하라 마리라는, 희대의 글쟁이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시간이 허락한다면 평생을 속옷 연구에 바치고 싶었다던 그녀, 요네하라 마리.

가끔 그녀가 그리워질 때면

그녀가 세상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서둘러 데려가신 것이라고 애써 나를 위로한다.

하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책의 후속편을 볼 수 없는 것은 나만이 아닌, 인류의 손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