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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진 1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5월
평점 :
나는 읽고 싶은 책이 생기면 메모를 해두었다가 구입할 여건이 될 때마다 구입해서 읽는다. 처음에는 한두페이지 정도였는데 읽고 싶은 책이 쌓이면서 페이지 수가 점점 늘고, 가장 최근에 넣어둔 책부터 구입하게 되다보니 처음에 넣어두었던 책은 보관함 맨 앞에 쳐박혀(?) 있는 채로 있는 것이 늘 안타까웠다. 마침 연말이기도 하고,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읽어치우자(!)는 마음으로 구입한 책 중 하나가 바로 신경숙의 [리진]이다.
처음 이 소설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외딴 방], [깊은 슬픔] 등으로 유명한 신경숙 작가가 역사소설을 썼다는 점도 신선했지만, 조선말 고종대에 궁중 무희였던 소녀 리진이 프랑스 외교관의 눈에 띄어 프랑스로 간다는 줄거리가 허구가 아닌 사실이라는 점에 가장 놀랐다.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 일제와 청나라, 서구 열강의 먹잇감이 될 위기에 놓여 혼란스러웠던 그 시대에 그 누가 편안히 살았겠냐마는, 역사의 한복판인 궁중에서 엄청난 사건을 전부 목도하고, 저 먼 프랑스까지 건너갔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맺은 여성의 생애는 그 시대의 어떤 인물의 인생보다도 처연하고 절절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이 소설이 그저 역사와 허구를 결합한 팩션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오누이처럼 자란 강연, 리진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외교관 콜랭, 리진의 인생을 비극으로 이끈 홍종우 등 리진을 흠모한 남자들과, 어린 리진을 거두어준 서씨, 블랑 교주, 명성황후와 고종, 모파상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여 그녀의 인생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끄는 과정도 볼거리다.
특히 이 소설에서 명성황후는 리진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존재로 등장한다. 리진의 주변에 많은 남성들이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이 소설은 로맨스 소설로 보이기 쉽지만, 리진과 명성황후라는 두 여성이 남성 우위의 전통에 맞서고 신분 차별을 넘은 우정을 쌓다가 구한말이라는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대척하는 관계가 되고, 결국에는 함께 몰락하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리진은 콜랭과 혼인하여 프랑스로 떠나면서 나인 신분을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된다. 나라면 그런 상황을 기회로 여기고 프랑스에서 새로운 삶을 꾸리는 데 여념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리진은 프랑스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조선으로 돌아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왜였을까?
내 생각에 리진은 한번도 제 뜻대로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궁중무희가 된 것, 콜랭과 혼인한 것, 도망치듯 파리로 떠난 것, 파리에서의 생활 모두 리진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선택이었다. 리진은 누구보다 현명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여성이었으나 그 삶을 지킬 힘은 없었다. 마치 소설에 나오는 직지와 의궤, 도자기처럼 - 가치가 높지만 지킬 힘이 없어 빼앗기고 만 문화재처럼 말이다.
명성황후 또한 뜻은 높았으나 시대적 여건상 그 뜻을 펼칠만한 힘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렇게 리진과 명성황후 두 사람은, 비록 나인과 왕비라는 신분 차이는 있지만 닮은꼴이었고 같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리진은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반쪽이나 다름없는 명성황후의 곁으로 다시 돌아왔고, 명성황후의 죽음을 따라 자신도 최후를 맞이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본다면 이 소설은 결국 리진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명성황후에 대한 이야기이고, 여성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