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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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는 1935년 일본 에히메현에서 태어나 1958년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며 명성을 얻은 일본의 대표적인 소설가다. 그는 평소 전후 일본 사회의 불안정한 분위기와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서슴 없이 내보이며 왕성한 사회 참여를 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소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역시 작가의 정치적인 성향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패전 이후 멈춰 있는 일본의 역사관과 민중 봉기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삭제하는 일본사회에 대한 비판 등이 그렇고, 현대가 아닌 전근대, 지식인층이 아닌 민중, 활자가 아닌 구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점이 보통의 주류 작가들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또한 주인공이 아닌 사쿠라라는 여성과 주인공의 여성 혈육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역사를 재건하는 장면에서는 페미니즘적인 면모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핵심은 뭐니뭐니 해도 '문학'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등단 5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기도 한 이 소설에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반영되어 있는 부분을 여러번 볼 수 있다. 지적 장애를 가진 친아들 '히카리'가 등장하는 점이 그렇고, 도쿄대 은사 와타나베 가즈오 교수가 등장하는 점도 그렇고, 주인공이 글쓰기를 통해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내보이는 작가라는 점도 작가 자신과 닮았다.

 

하지만 소설에서 변화의 주체가 되는 사람은 작가 본인이 아닌 사쿠라와 민중들이다. 이미 일흔을 훌쩍 넘긴 작가가 직접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기는 무리라는 인식을 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가 오랫동안 지향해 온, 체제가 아닌 민중들, 즉 풀뿌리에서 비롯되는 변화에 대한 소망의 연장이 아닐까 싶다.

 

문학 그 자체로는 정치적으로 혁명을 일으킬 수도, 사회적으로 큰 변혁을 가져오기도 없지만, 민중들 스스로가 - 특히 여성들 -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뿌리를 찾고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 - 이것이야 말로 50여년 간 일본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저자가 문학에 기대하는 힘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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