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물건 - 김정운이 제안하는 존재확인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TV가 너무 좋아서 방송국에 취직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대학교에 들어가고부터는 TV를 일주일에 십 분도 채 안 보게 되었고, 이러다가는 TV가 없어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대신 인터넷으로 미국과 일본 방송을 본다는 게 함정...) 그런데 요즘은 TV를 꽤 본다. 주로 버라이어티. 일단 일요일에는 시즌2로 바뀐 <1박 2일>을 꼭 본다. 그 전엔 한번도 안 봤는데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방사수는 못하지만 다시보기 서비스로 <힐링캠프>를 챙겨본다. 이효리 편도 좋았고, 최근에 방영된 법륜스님, 정대세 선수 편도 좋았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편이 바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님 편. 전부터 매체를 통해서 자주 성함을 듣기는 했지만 어떤 분인지는 잘 몰랐는데, 이 방송을 통해 살아오신 얘기도 듣고, 한국사회, 한국 남자들에 대한 파격적이면서도 통찰력있는 견해를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방송을 보자마자 바로 교수님의 책 두 권 <남자의 물건>과 <노는 만큼 성공한다>를 구입했다. 두 권 다 좋았지만, 같이 읽은 동생도 더 재밌다고 한 <남자의 물건>이 더 좋았다.

 

 

+

 

우리는 행복하려고 산다. 재미있으려고 산다. 한국 사회에는 행복과 재미를 이야기하면 한 급 아래로 내려다보는 어쭙잖은 어숙주의가 존재한다. 자유, 민주, 평등과 같은 가치를 이야기하면 폼 나 보인다. 그러나 자유, 민주, 평등은 수단적 가치다. 행복과 재미는 궁극적 가치다. 물론 수단적 가치가 확보되어야 궁극적 가치를 얻어낼 수 있다. 그러나 자유, 평등, 민주라는 조건이 이뤄진다고 자동적으로 사는 게 행복하고 재미있어지는 것이 아니다. (p.33)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남자의 물건'에 관한 책이다. 이어령, 신영복, 차범근, 문재인, 안성기, 조영남, 김문수, 유영구, 이왈종, 박범신 등 이 시대를 대표하는 중장년층 남성 명사 10인이 아끼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 물건을 통해 그 사람의 인생과 성격 등을 알아보는, 이른바 '물건을 통해 매개된 존재의 스토리텔링' (p.8)이라고 할 수 있다.

 

물건이라고 해도 대부분 대량생산된 똑같은 '제품'들인데 어떻게 소유자의 개성과 인격을 나타낼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대량생산된 제품 중에서도 사람마다 고르는 물건은 제각각이다. 내가 자주 들르는 커뮤니티에는 가방이나 지갑, 필통에 담긴 소소한 소지품을 공개하는 게시판이 있다. 이 곳만 보아도 사람의 취향과 개성이 전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꽃무늬에 집착하고, 어떤 사람은 특정 브랜드 제품만 구입한다. 유난히 분홍색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노톤의 물건만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뭐, 명사들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지 않을까.

 

 

+

 

그는 남녀 차이를 '상자'와 '책상'으로 비교해 설명한다. 여자의 물건은 대부분 '상자'다. 상자는 여자의 자궁 같은 것이다. 생명을 잉태해 시간을 소유하는 것처럼, 여자는 상자 안에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보석을 담는다.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남자는 시간을 소유하는 대신 공간을 정복하려 한다. 그래서 옛날 남자들은 달리는 말에 그토록 집착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금전적 여유가 조금만 생기면 남자들은 자동차 전시장을 기웃댄다. 보다 빠르고 폼 나는 차를 타고 달리는 만큼 그 공간이 자기 것이 된다는 환상 때문이다. (pp.164-5)

 

책에 소개된 명사들의 물건들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을 몇 가지 소개해 본다. 먼저 이어령의 책상. 공부하는 사람한테 책상만큼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 나한테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께서 열심히 번 돈으로 사주신 책상이 첫 책상이었다. 원목으로 된 아주 좋은 책상이었는데 학년이 올라가면서 몸이 커지는 바람에 사촌동생에게 물려주었다. 지금 쓰는 책상은 고등학교 때 구입했다. 아주 튼튼하고 널찍하지만 방에 비해 너무 커서 조금 작은 것으로 바꿀까 몇 번을 고민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어령 교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책상이라는 것은 '끝도 없는 광활한 지식의 영토를 달릴' 때 필요한 준마 같은 것이라고 하니 더 이상 고민하지 말아야겠다.

 

 

+

 

삶이란 목적을 사는 게 아니라, 과정을 사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목적이 중요하다. 그러나 목적에 의해 과정이 생략된 삶을 사는 것처럼 불행한 삶이 없다. 군대 간 이들은 제대 날짜만 생각한다. 유학 떠난 이들은 학위 따는 날만 기다린다. 언젠가는 제대하고, 언젠가는 학위를 딴다. 그러나 제대 날짜를 기다리고, 학위 따는 날을 기다리며 지나간 내 젊은 날은 과연 내 삶이 아니란 이야긴가? 그렇게 제대하면 뭐하고, 그렇게 학위를 따면 뭐하는가. 그 사이에 '우리 기쁜 젊은 날'은 맥없이 사라져버리는데. (p.187)

 

"감옥에 있을 때도 꼭 미운 사람이 하나는 있어요. ... 그래서 그 사람이 출소하잖아요? 나가면 그날 저녁은 참 행복해요. ... 그런데 며칠 있으면 또 그런 사람이 생겨나요. ... 그러면서 깨달았지요. 그 사람에게 물론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이 환경이 그런 대상을 필요로 하는구나." (pp.190-1)

 

신영복 교수님 인터뷰도 아주 감명 깊게 읽었다. 세상에는 미워하는 마음이 참 많다. 남을 미워하고, 조직을 미워하고, 제도를 미워하고, 사회를 미워하고... 나도 마찬가지다. 누가 밉기도 하고, 현실이 밉기도 하고, 남이 미운 얘기하는 얘기도 밉다. 그런데 신영복 교수님 말씀을 읽고 미움이라는 게 누가 나한테 그런 마음이 들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원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 마음에 미움이 없다면 미운 사람이 있어도 밉지 않을텐데. 나는 특히 남이 남을 미워하는 얘길 듣는 게 참 싫다. 어머니가 가족들을, 지인들을, 하다 못해 개까지 밉다고 하는 얘길 들으면 내 마음에 미움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힘들고 괴롭다. 근데 어쩌면 그게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내 마음에도 미움이 있기 때문에 더 힘들고 괴로운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이 마음을, 미움을 어떻게 풀면 좋을까. 신영복 교수님은 서예를 하시면서 마음을 다스린다고 하시는데, 나한테는 어떤 처방이 좋을까. 생각해봐야겠다.

 

 

+

 

적어놓고 보니 진지한 내용만 있는 것 같은데, 차범근, 안성기 인터뷰도 굉장히 재밌고, 문재인, 김문수 인터뷰도 (인터뷰 자체가 재미있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김정운 교수님의 해석이 참 재밌었다. 차범근 감독님은 사실 내가 아주 어릴 때 현역으로 활동한 분이고 감독으로 데뷔하신 이후의 모습만 본터라 전성기에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하셨는지 잘 몰랐는데 이 책을 읽고 확실히 알았다. 안성기 님도 배우로만 봐왔는데 미술에 조예가 깊다고 하셔서 신선했다. 온 국민이 인정하는 '국민 배우'가 겨우 5천원짜리 캔버스를 산다고 아내에게 타박을 듣는 대목도 재밌었다

 

이렇게 책 내용을 다시 떠올려보니 책 앞머리에 여자에게는 화장품, 가방, 옷, 구두 같은 소중한 물건들이 많이 있지만 남자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대목이 새롭게 다가온다. 왜 여자들한테는 화장품이나 옷 같은, 외모를 꾸미는 데에 필요한 물건들만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반론도 반론이지만, 그것들을 빼면 과연 여자들에게는 어떤 소중한 물건들이 있을까, 생각해봐야 되지 않을까. 음, 나한테는 책, 추억의 물건들이 담긴 상자, 딱 이 두 가지뿐인데, 이 둘로 어떻게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두고두고 고민해봐야겠다.

 

+

 

이렇게 <남자의 물건>과 <노는 만큼 성공한다>를 연달아 읽고나니 다른 저서들도 읽어보고 싶어져서 냉큼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남자가 아니라도 <남자의 물건>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이 책도 여자, 심지어는(?) 결혼 안 한 여자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한다. 이렇게 이전 저서들을 다 읽을 쯤이면 이 책의 후속편 내지는 김정운 교수님의 다음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