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 한 사회생물학자가 바라본 여자와 남자
최재천 지음 / 궁리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름만 보고 남자분이신줄 알았어요." 내 이름을 먼저 알고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런 말을 하며 놀란다. 내 이름이 여자한테 흔히 쓰이는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싸이xx에서 검색해보면 나와 성도 같고, 이름도 같고, 출생연도까지 같은 여자사람이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있기는 하다.) 그래도 나는 내 이름이 좋다. 아버지께서 직접 사주작명 공부를 해가며 어렵게 첫 자를 정하고, 끝자는 항렬을 따라 정성들여 지어주신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항렬자가 여자 이름에 흔히 쓰는 자가 아닌 탓에, 어머니는 딸인데 굳이 항렬자를 쓸 필요가 있느냐며 여자다운 이름으로 하자고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도 엄연히 이 집안의 자손이라며 항렬자를 고집하셨고, 그 결과 나와 내 여동생은 '남자 이름 같다'는 말을 들으며 이름에 걸맞게 씩씩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시대가 변해서 요즘은 '남자 이름 같다' 말보다는 '중성적인 이름이다' 라는 말도 아주 종종 듣는다. 그러고 보면 내 이름과 비슷한 이름이 TV 드라마 여주인공 이름으로 쓰이기도 하는 것 같다. 내 이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요즘 젊은 부모들이 선호하는 이름들도 대개 민준, 민서, 시우, 지우처럼 언뜻 들어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가는 이름들이라고 한다. 앞으로는 남성적인 가치와 여성적인 가치를 모두 아우르는 사람이 성공하기 쉽기 때문에 이런 이름들을 선호한다고 하는데, 우리 아버지가 미리 앞을 내다보신 것일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얼마전 최재천 교수님이 2003년에 내신 책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를 읽다가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발견했다. 성구별 없이 중성적인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최근에서야 나타난 트렌드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찍이 십 여 년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셨다는 것이 놀랍다.

 

여자 아이라고 해서 지나치게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은연중 그 이름에 걸맞게 살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일이다. 아예 여성 이름과 남성 이름이 정해진 영어권의 사람들도 최근 다양한 이름들을 만들어 부르고 있다. 우리말은 영어에 비해 훨씬 덜 성차별적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딸이든 아들이든 아름답고 지적인 이름을 지어줄 수 있다. (p.34)

 

최재천 교수님 책은 얼마전 <통섭의 식탁>을 읽고나서부터 틈틈이 찾아 읽고 있다. 수학의 '수', 과학의 '과' 자만 들어도 치를 떨었던 전형적인 문과 인간인 내가 오로지 자의로 과학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니...! 사실 이전까지 과학 하면 어려운 이론과 용어도 많아 좀처럼 가까이할 엄두가 안 났는데, <통섭의 식탁>을 읽으면서 과학이라는 것이 우리 생활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으며(당연하다!), 인문학, 사회과학 같은 학문과 마찬가지로 사회를 이해하고 통찰하는 데에도 새로운 관점을 줄 수 있는 학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읽은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역시 과학을 통해 사회를 이해하고 통찰할 수 있는 책이다. 여성주의, 페미니즘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듣지만, 대부분 인권과 평등권 같은 권리 차원의, 당위적인 논리에 기반한 경우가 많다. 그에 반해 이 책은 교수님의 전문 분야인 사회생물학에 기반하여 자연을 근거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결코 열등하지 않고 오히려 우월한 사례도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양성평등의 당위성을 이끌어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도발적이고 급진적인 내용 때문에, 예상대로, 출간 당시 대한민국 마초들로부터 '남자망신 다 시킨다'며 원색적인 비난까지 들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양성평등의 당위성을 사회생물학에서 찾는 것은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은 내용이라고 하니 일부 남성들에게만 반발을 산 것은 아닌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이 책이 여성의 권익을 무조건 옹호한다기 보다, 양성의 차이와 동등성을 인정함으로써 여성의 권리도 신장하고, 남성들 또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역할을 찾자는 내용인 것 같다. 책에 보면 '여성의 시대가 오면, 남성들도 무겁기만한 책임의 굴레를 벗고 인간답게 살 날이 오리' 라는 말이 나온다. 여자로서 '여자답게', '여성스럽게' 사는 것도 참 억울하고 불편한 일이지만, 남자가 '남자라서', '남자이기 때문에' 느껴야하는 부담과 억압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얼마 전 읽은 김정운 교수님의 <남자의 물건>에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가 나왔다. 남자 화장실 중에는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라는 문구가 붙어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 눈물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감정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감정인 슬픔과 분노의 산물이다. 그런데 그저 남자라는 이유로 대한민국 남자들은 인간으로서 감정을 표현할 권리를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 난 내가 여자로 태어나서 불쌍하다는 생각만 하고 살았는데, 이런걸 보면 남자들도 불쌍하다. (아 아버지...)

 

 

그러고보니 최재천 교수님이 이 책 제목을 기막히게 잘 지으셨다. 남자도 화장을 하고 여자도 복근을 키우는 시대, 이것이 바로 현재 2012년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닌가. 어떤 이는 말세라고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른다. 세상이 미쳤다고,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비비크림을 바르며 외모에 자신감을 키우는 남자들과 운동하는 재미에 푹빠져 삶의 활력을 얻는 여자들의 모습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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