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김중혁의 <뭐라도 되겠지>를 읽다가 공감 가는 구절을 발견했다. 저자는 대학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로장학금을 받았다. 그 시절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들이 돌아보니 삶에 더할 나위 없는 자양분이 되었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나도 학교 때 근로장학금을 받았다. 1학년 때는 신청 자격이 안되어서 못하고, 졸업학기 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안 한 걸 빼면 꼬박 5학기, 2년 반을 받은 셈. (근로장학금은 웬만한 아르바이트보다 시급이 높고, 공강 시간을 활용하여 학교 안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제도이므로 대학생들에게 강추한다.) 2학년 겨울 방학 때 일했던 곳이 중앙도서관이었다. 우리학교 도서관은 관내에 가방을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는 대신 도서관 입구에 가방을 맡기도록 되어 있었는데, 내가 일했던 곳이 바로 그곳 가방 보관소였다. 그 해 겨울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교직원 선생님들, 같이 일하던 친구들과 보냈던 시간이 떠오른다. 귤도 까먹고, 교직원 선생님이 가을에 학교 교정에서 모아두신 은행도 구워먹고 그랬는데... 지금은 다들 어떻게 지내려는지...

 

 

혼자 일할 때는 시간이 나는 틈틈이 책을 볼 수도 있었다. 그 때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고르라면 바로 이 책,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다. 표지에 나온 흑인 소년의 긴박한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겠지만, 내용이 정말 손이 오들오들 떨릴 정도로 긴장되고 절박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 전까지는 인종차별을 직접 겪어본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어서 이것이 미국 내에서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 아니 어떤 문제인지조차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 많이 반성했고, 그 후로는 인종문제에 관한 책을 틈틈이 들여다보려고 했다.

 

 

 

캐서린 스토킷의 소설 <헬프>도 바로 인종문제, 구체적으로 말하면 흑인 인권 문제에 관한 소설이다. 같은 주제를 다룬 기존의 책들과 달리, 이 책은 흑인이 아닌 백인의 시각에서 쓰여졌다는 점이 독특하다. 저자 캐서린 스토킷은 실제로 흑인 인권 운동이 정점에 다다랐던 1960년대에 미국 남부 미시시피의 백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느 남부 백인 가정 자녀들이 그러했듯이 저자 역시 어머니가 아닌 흑인 보모의 손에 자랐고, 부모님이 일찍 이혼하시는 바람에 흑인 보모를 어머니처럼 따르며 자랐다.

 

<헬프>의 주인공 스키터는 저자의 분신 같은 인물이다. 스키터는 흑인 가정부의 손에 자란 백인 여성으로, 대학 졸업 직후 고향집에 도착하자마자 보모이자 가정부였던 콘스탄틴이 떠났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딸처럼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콘스탄틴이 왜 아무 말없이 떠났는지 스키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 콘스탄틴이 어디로 떠났는지, 왜 떠난 건지 이유를 물어도 가족들, 마을 사람들 모두 대답을 피했다.

 

이 때, 스키터의 오랜 친구 미스 힐리는 스키터가 시름에 빠졌든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흑인은 더럽고 병균을 옮기는 인종이니 흑인 가정부들이 백인 주인들과 같은 화장실을 쓰면 안되고, 흑인 가정부가 쓰는 화장실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마을에서 흑인 소년이 어이 없는 이유로 린치를 당하고, 흑인들이 죽어나가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스키터는 콘스탄틴이 떠난 이유가 이 말도 안 되는 현실과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 지망생이었던 그녀는 이 이야기를 글로 쓰기로 마음먹는다. 흑인인데다가 여자라는 이유로 가장 심한 차별을 받고 하찮게 여겨지는 존재, 남의 자식을 온 정성을 다해 키우고도 작별의 인사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떠나야했던 콘스탄틴 같은 흑인 가정부들의 삶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백인 여성인 스키터가 흑인 가정부들의 삶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흑인들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고, 백인은 흑인과 같은 자리에서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니 글 쓰는 데 필요한 인터뷰를 할 수가 없었다.

 

이 때 그녀를 돕게된 또다른 흑인 가정부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에이빌린이다. 에이빌린의 도움으로 스키터는 여러 흑인 가정부들을 소개 받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에이빌린의 집에서 비밀스럽게 인터뷰를 진행한다. 인터뷰를 통해 스키터는 흑인 가정부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들도 자신처럼 똑같은 감정과 꿈을 가진 여성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스키터가 포기해야 한 것도 많다.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한 인종이라고 굳게 믿는 가족들, 친구들이 그녀로부터 등을 돌렸고, 사랑하는 남자에게도 그녀의 비밀스런 작업에 대해 고백할 수 없었다. 게다가 미스 힐리의 악행이 도를 지나칠 정도로 심해져 각종 사건을 불러 일으켰다. 그때마다 미스 힐리와, 그녀만큼이나 악독한 백인 사회와 질긴 인종차별의 벽 앞에서 스키터는 많이도 울었다. 하지만 책을 완성해야한다는 집념과, 책을 써서 그렇게라도 흑인 가정부들에게, 콘스탄틴에게 속죄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끝까지 맞섰다.

 

 

분명 교과서나 책에서 1968년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되었다든가, 70년대까지도 흑인 인권운동이 활발했다든가 하는 내용을 배웠지만, 이렇게 소설로 접할 때에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뿌리>만 해도 흑인들이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무렵의 이야기라서 먼 옛날 얘기처럼 들렸지만, <헬프>는 불과 몇십년 전인 1960년대가 배경이라서 섬뜩하기까지 했다. 60년대라면 비틀즈가 미국에 진출하고, 케네디가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고 공언했던 시대가 아닌가.

 

주제는 진지하지만 등장인물 한명 한명이 개성있고, 스토리 전개가 스릴있으며, 따뜻함과 유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서 미국 내에서는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고, 엠마 톰슨 주연으로 영화화까지 되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흑인 인권 문제에 있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측에 속하는 백인 여성이 이런 주제의 책을 쓴 것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저자도 이런 비판이 있을 것을 가장 우려했다고 한다. 그저 백인 여성과 그녀를 키운 흑인 보모 사이의 사랑과 추억을 바탕으로 쓴 소설로 보기엔 흑인 인권 문제가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는 공공연히 다루어지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흑인 인권 문제를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고전인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는 흑인을 비하하는 'nigger'라는 말이 300번 가까이 등장하는데, 이 때문에 보수적인 지역이나 흑인 학교에서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거나 'nigger'를 'slave'로 고쳐서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여 원문 그대로 가르칠 것인지, 아니면 흑인들의 의사를 인정하여 이 책을 가르치지 않거나 수정할 것인지를 두고 미국에서는 여전히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헬프>에도 여러번 이 표현이 등장한다. 캐서린 스토킷 역시 마크 트웨인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사회상을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이고, 마크 트웨인이 살았던 시대와 지금은 많이 다르지만, 여전히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소설은 소설일뿐이지만 현실과 떨어질 수 없고, 이야기를 통해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한편에서는 고통을 받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돌이켜보니 올 한해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감명 깊었고 재미있게 읽은 책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번역본은 책이 두 권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비싼 반면, 한 권짜리 페이퍼백인 원서는 번역본 한 권 값도 안 되어서 원서로 구입해서 읽었다. (많이 어렵지 않으니 도전해보시길!)

 

우리나라에서는 흑인 인권 문제가 큰 이슈가 아니다보니 이 소설이 미국에서만큼 주목을 받지는 못한 것 같지만, '인권'이라는 큰 차원으로 보면 어느 나라에서든 의미가 있는 문제이니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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